충의
  글쓴이 : 진양하씨대…     날짜 : 13-08-05 13:17     조회 : 544    
  충  의忠義
   ◦ 하계선河繼先
 자字는 소옹紹翁이요, 초휘初諱는 계인繼仁이다, 증 순충익조공신 자헌대부 병조판서贈純忠翊祚功臣資憲大夫兵曹判書 거원巨源의 후손이다. 무과에 급제하고 감찰을 지냈다. 1593년癸巳에 의병을 일으켜 진주성이 함락될 때 장렬하게 순절했다. 1743년英祖 19에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추증되고 진주 창렬사에 배향되었다.
   ◦ 하락河洛 1530년中宗 25 - 1592년宣祖 25
자字는 도원道源이요, 호號는 환성재喚醒齋이다. 판윤공 유游의 후손이고 생원 진사를 지낸 인서麟瑞의 아들이다. 남명 조식南冥曺植의 문인門人이다. 39세 때1568년에 진사進士과 장원을, 생원生員과 1등 2위의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대과의 꿈을 안고 서울로 올라가 성균관에 들어갔다. 천거薦擧로 왕자사부王子師傅에 임명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상주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당시 상주목사尙州 牧使 김해金澥가 상주성을 지킬 계책을 논의하려고 공公을 성으로 불렀다. 이때 공公은 아들 경휘鏡輝와 장정 수십명을 거느리고 상주성으로 들어가다가 왜적의 기습을 당해 부자父子가 순절했다. 이후  승정원 좌승지承政院 左承旨에 추증追贈되었다.
   ◦ 河天瑞
 호號는 망추정望楸亭이요, 순천 군수順川郡守 운수당 윤潤의 현손이며, 관작官爵은 증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 겸 경연참찬관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 이다.
  공公은 학행學行으로 천거薦擧되어 선무랑宣務郞 행 전생서典牲署 참봉參奉으로 지내시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강덕룡, 신남 등과 의병활동에 적극 가담하였다. 송암 이로李魯가 쓴 용사기龍蛇記에 하천서가 강덕룡, 신남 두 분과 함께 군사를 조련함에 위엄을 떨치니 기율이 엄정하였다고 하였고, 성이 무너지는 것은 완지完池가 얕기 때문이라고 하여 깊게 하는 것 등 그 공을 다 기록할 수 없다고 하였다. 우산 이분李芬이 쓴 진양성기晉陽城記에는 하천서의 공이 가장 두드러졌다고 하였다.
 공公이 의병 활동을 적극적으로 한 것은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역설力說한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의 학문적 영향이 컸다고 볼 수 있다. 공公의 매제妹弟인 이곤변李鯤變은 남명 선생의 절친切親이었던 구암龜巖 이 정李楨의 손자이며, 공公의 외조外祖 이 림李霖 또한 남명 선생과 교유交遊했다. 뿐만 아니라, 공公의 장인丈人인 안분당安分堂 이공량李公亮은 남명 선생의 아버지 조언형의 사위이니 공公은 남명 선생의 생질서甥姪婿요, 신암 이준민의 매부妹夫가 된다. 그리고 의병장 곽재우가 남명 선생의 외손서外孫婿라는 점을 고려하면, 공公 또한 그 영향을 많이 입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공公은 효성이 깊어 선고先考, 선비先妣를 우봉곡에 장사지내고 골짜기 아래에 망추정望楸亭이라는 집을 짓고 기거하면서 부모의 산소山所를 보살폈다고 한다.
 
   ◦ 河慶灝
  초휘初諱는 경남慶男, 자字는 사회士會요, 호號는 읍추헌泣楸軒이다. 망추정 천서天瑞의 아들이요, 진사 취양就洋의 현손이며, 조산대부 운수당雲水堂의 5세손이다.
선조宣祖 때 별시 무과에 뽑히시어 선전관宣傳官 훈련부정을 지내시고, 임란 때 체찰사 윤두수의 중군으로 여러 번 공을 세웠다. 체찰사가 서애 유성룡에게 글을 써서 말하기를, 河某는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지만 공功은 배나 되며, 湖海의 승첩에서  뛰어났다고 하였다. 임금이 의주로 몽진할 때, 통군정에 이르러 문득 하경남이 어디 있느냐고 급히 불러서 별초관으로 뽑아 전모前矛를 삼으니, 임금의 총애를 받음이 이와 같았다. 선조 38년 1605년에 선무원종공신 일등宣武原從功臣一等으로 녹훈錄勳되었으며, 절충장군 행 용양위부호군, 공조참의, 병조참지, 병조참판을 역임하고, 인조 24년 1646년 11월에 아들 진룡震龍이 영국원종공신일등寧國原從功臣一等에 책록策錄됨으로써 1647년 2월에 가선대부嘉善大夫 대사마 겸 동지의금부사大司馬兼同知義禁府事에 증직되었다.
 공公은 천성이 효우孝友하고 청검淸儉하여 공功을 자랑하지 않았으며, 임종에 자손들에게 경계警戒하여 선대先代 훈공勳功을 자랑하지 말라고 하였다. 또 명銘을 문장가文章家에게 받지 말고 공公의 관함官銜을 절충折衝장군 행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이라고만 쓰도록 하였다. 공公의 뜻인즉, 국난國難을 당하여 변변찮은 공功이 있었으나 나라와 임금에 대한 충성에서 당연한 것이니, 후손들이 선대의 공훈을 빙자하여 교만하지 말고 청검淸儉을 신조信條로 삼으라는 것이다.
 공公은 정부인貞夫人 성산 이씨와 혼인하였으나 무자無子로 상처喪妻하고, 군자감정 신인서愼仁恕의 따님인 정부인貞夫人 거창 신씨와 혼인하여 1남 3녀를 두었으니, 1남은 통훈대부 행 이산군수 쌍부헌 진룡震龍이요, 3녀는 참판參判 남두병南斗柄, 판관判官 강호량姜好亮, 승의랑承議郞 정광원鄭光元이다. 공公은 또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 전의이씨全義李氏를 우봉곡에 장사지내고 우모소寓慕所를 짓고 읍추헌泣楸軒이라 명명하였으며, 항상 어머니를 그리는 마음에 자신의 호號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