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자孝子 · 열녀烈女
  글쓴이 : 진양하씨대…     날짜 : 13-08-05 13:17     조회 : 711    
 효자孝子 · 열녀烈女
       
  ◦ 하현부河玄夫
 벼슬이 사직에 이르렀고, 90세가 된 어머니가 병환이나 똥을 맛보고 종기를 빨았으며 부모의 상喪을 당해서는 6년 동안 상을 입었다. 승람에 등재됨
  ◦ 하항河恒 - 파조편 참조
  ◦ 하맹보河孟寶 - 정려편 참조
  ◦ 하경휘河鏡輝 - 정려편 참조
  ◦ 하원河沅 1628년인조 5년 - 1707년숙종 33년
 공의 자字는 대중大中이고 호號는 송파松坡이다. 죽헌공 성惺의 손자이며 부위공 달원達遠의 둘째 아드님이다. 천품이 간중簡重하여 어릴 때부터 가르침을 받을 적에 부모에게 근심을 끼치지 않았다. 14세에 부친의 상喪을 당했는데 예제와 정성이 지극하여 그 숙성함이 대인大人과 같았다. 모부인 성주이씨를 섬김에 뜻을 받들어 순종하였으며 감지甘旨(맛이좋은음식)와 약이藥餌(약이되는음식)의 봉공捧供이 알맞았고 치유厠牏(뒷간)의 역役도 정성으로 몸소 행하고 남이 대신하게 하지 않았다. 이에 모부인은 높은 연수年數에도 강녕하셨고 공은 이미 늙어서 백발이었다. 거상居喪에 이르러서는 피눈물을 흘리며 죽과 나물로 연명하며 예를 지켜 상제를 마치니 향리에서 공의 효성에 감동하여 사실을 관청에 알리려 하자 공이 힘써 중지시켰다. 명리名利를 싫어하여 일찍부터 거업擧業을 그만두고 여력으로 경전經傳에 힘쓰더니 더욱 성리서性理書에 치중하여 가언嘉言과 선행善行을 대하면 반드시 반복하여 궁구窮究하면서 평생 실용할 자료로 삼았다.
 ◦ 하현河灦 1643 仁祖 21 -1689 肅宗 15
 공公의 자字는 여해汝海이고 호는 만향당 晩香堂이다. 단지공丹池公 진사進士 협悏의 장손이며, 구이당 달영達永의 아드님이다. 四. 五세에 글을 읽을 줄 알았으며 절하고 꿇어앉는 것이 성인成人과 같았으며, 성품과 행동이 순효純孝하였고 숙부 용강공의 문하에서 가학家學을 전수받았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모부인을 섬기면서 온화한 목소리로 한결같이 순종하였으며 새벽이면 반드시 세수하고 머리를 빗고서 당堂에 올라 평생토록 하루같이 문후를 하면서 지극히 봉양하였다. 모부인의 병환이 있자 변을 맛보아 병의 증세를 살피고, 위독한 지경에 이르자 자신의 손가락을 베어 그 피로서 모부인의 목숨을 연장시켰으며, 돌아가심에 이르러서는 3년의 여묘살이를 정성을 다해 마쳤다. 이에 온 고장 사람들의 여론을 모아 유생 박사순 등이 공을 정려하여 포양襃揚해야 한다고 향장鄕狀과 도장道狀을 올려 그 아름다운 선행先行을 세상에 널리 알리고 현창顯彰하고자 노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후에 산 아래에 사는 사람들은 모부인의 산소가 있는 그 골짜기를 하효자河孝子 시묘곡侍墓谷이라 일컬으며 공의 효행을 칭송하였다. 남명학파의 핵심으로 활동하였으며, 『만향당유집』이 전해진다.
  ◦ 하세희河世熙 - 정려편 참조
  ◦ 하한주河漢周 1682년肅宗 8  ~ 1733년英祖 9
 초휘初諱는 재후載垕, 자字는 이호而浩요, 호號는 사검당思儉堂 또는 제암霽岩이다. 증 통정대부 형조참의 도형道亨의 아들이요, 참판공 경호慶灝의 현손이며, 운수당雲水堂 공 후손이시다. 성품이 순효純孝하여 부모를 하루도 빠짐없이 곁에서 모셨다. 부모가 분가시키려 하니 울면서 청하여 말렸고, 형 한명漢明과 담을 사이에 두고 살면서 우애가 돈독하였다. 거상居喪 중에는 도에 지나치게 울어 주야로 피눈물을 흘리니, 이웃과 고을에서 효우한 군자라고 하였다. 효행으로 주지州誌에 실려 있다.
  ◦ 하원용河元龍 - 정려편 참조
  ◦ 하진태河鎭兌 - 정려편 참조
  ◦ 하응현河應賢 1782년 正祖 6 - 1833년 純祖 33                 
 자字는 사언師彦이다. 함와공 하이태河以泰의 아들이다. 글 읽는 것을 상례喪禮에서 익혔으니 천성이 효성스러웠다. 해제孩提 때 아버지의 명령을 받고 밖에 나갔다가 돌아오니 밤이 깊었는데 문이 닫히어져 있었다. 아버지가 잠에서 놀래어 깰 것을 두려워하여 감히 부르지도 못하고 또 돌아와서 얼굴을 대하지 않는 것도 염려스러운데다가 사실私室에서 편안히 지내는 것도 마땅치 못하므로 드디어 문밖 노지露地에서 부복俯伏하여 새벽에 이르렀다. 이 밖에 계모繼母를 섬김에도 또한 지행至行이 있었다.     
  ◦ 하필명河必明 - 정려편 참조
  ◦ 하준현河駿顯 1800년正祖 24 - 1870高宗 7
 초휘初諱는 익경益慶이요, 자字는 성모聖謨이다. 운수당 윤潤의 후손이고 통덕랑 을 지낸 한주漢周의 현손이며, 병림秉霖의 아들이다. 천성이 극히 효성스럽더니, 집이 심히 가난하여 일찍부터 의지할 곳을 잃고 백부 집에서 살았다. 아버지가 금화현에서 떠돌이 생활을 한다는 소문을 듣고 가서, 아버지를 따라 낮에는 나무하고 밤에는 글을 읽으면서 자식 된 도리를 다하였고. 아버지가 종기를 앓으니 직접 빨아 드리며 쾌유하기를 하늘에 빌었다, 제철이 아닌 음식물을 정성껏 공양하니, 사림士林에서 글을 올려 집안을 회복케 하였다.
◦ 하이범河以範 1803년純祖 3 - 1878년高宗 15
 공의 자字는 극겸極謙이고 호號는 야은野隱이며 수계壽階로 통정대부 부호군에 올랐다. 증 순충보조공신 자헌대부 이조판서贈純忠翊祚功臣資憲大夫吏曹判書 진평군晉平君 하위보河魏寶의 후손이고 송강공 항恒의 7대손으로, 지수헌의 현손이며 관호觀浩의 손자이고 진홍鎭泓의 아들이다. 진한鎭漢의 차자次子로 태어나 재종숙 진홍鎭泓에게 입양되어 후사(後嗣)를 이었다. 公이 세상을 떠난 지 16년 뒤인 1893년고종30 유생 강재영 등이 예조에 상언하여 공의 효행이 조정에 알려져 그 마을에 정문旌門을 세우라는 특명이 내려졌다. 예조입안의 내용에, “진주에 사는 통정通政 하이범은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초츤齠齔의 나이(이를 갈 무렵)에 어버이를 모시더니 어버이가 병이 들자 단지斷指하여 피를 대접하였고, 정우丁憂(부모상을 당함)에는 예제를 따르기를 어른과 같이 하였다. 모부인이 풍증風症으로 여려해 동안 몸져 누워있자 약이藥餌(약이 되는 음식)와 음선飮膳(마실 것과 반찬)을 반드시 직접 복로服勞하였다. 얼룩비둘기가 풍병에 좋다는 말을 듣고 곧 눈 덮인 언덕에 올라서 그물을 치고 축원을 하니 두 마리의 비둘기가 스스로 그물에 내려앉았다. 초례醮禮를 치르는 날에 문득 마음이 동하여 빨리 집으로 돌아오니 모부인이 위독하였다. 급히 단지斷指하여 피를 흘려 소생시킨 후 북두성에 빌어 다음날 까지 삶을 연장시켰다. 상을 당하여서는 예법대로 하였으며 날이 갈수록 돈독하여 나이 여든이 되도록 항상 애모哀慕함을 그치지 않았다. 그 형兄을 섬기기를 엄부嚴父와 같이 하여 우애와 공경함이 돈독하였다. 국휼國恤(국상)을 만나서는 사흘 동안 소복素服으로 곡을 행하였으니 이것은 ‘애愛를 경敬’으로 ‘효孝를 충忠’으로 옮기는 의리인 바,……⟨중략⟩…… ” 라고 하였다.  
  ◦ 하재원河載源 - 정려편 참조
  ◦ 하달규河達圭 1821년 純祖 26 - 1895년 고종 32 -양정공 13대손
 공은 장령공 휘諱 계보季溥의 장자 선무랑 휘諱 응應의 10대손이며 휘諱 영상榮尙의 6대손이다. 증조의 휘는 해영海永이고, 조부의 휘는 덕삼德三이며 부친의 휘는 필흥必興이다. 공의 자字는 여삼汝三이며 옥종면 월횡에서 성장하였다.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어릴 때부터 한 가지 아름답고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반드시 어버이에게 드리니 향도鄕道에서 효경상孝敬賞을 받았고 주위에서 감탄하여 이르기를, “인자人子의 도리로서 과연 이와 같이 하겠는가” 하였다. 나이 14세 때 추운 날 어버이가 병들어 창증脹症이 매우 심하였는데 의원이 이르기를, “오직 례어鱧魚(가물치)라야 다스릴 수 있을 것이다” 하므로 공이 지극한 정성으로 구하여 드리니 어버이의 병이 좋아졌다. 집안이 가난하고 어버이가 늙었으매 이에 글 읽는 것을 폐하고 농사짓고 나무하는 것을 업業으로 하여 날마다 망이산望夷山에서 나무를 하여 구들을 따뜻하게 하니 마을 사람들이 모두 효자라고 칭찬하였다. 공은 평생토록 좋은 의복과 좋은 음식을 멀리하였는데 어버이를 사모思慕하여 그러한 것이었다. 나이 사십에 비로써 장가를 들어 아들 봉수鳳壽를 낳았는데, 공이 일찍 학문할 기회를 잃은 것을 스스로 한탄하여 아들에게는 학문을 시켰다. 공의 아들 백촌栢村 봉수鳳壽는 학문과 효행으로 양정가襄靖家를 빛나게 하였다.
 이곡 하인수가 찬한 행록과 회당 장석영이 찬한 묘갈명이 있으며 후손들이 사곡문중을 이루고 있다.
 ◦ 하인수河仁壽 1830년 純祖 30 - 1904년 高宗 41 -양정공 14대손
 공은 장령공 계보季溥의 장자 선무랑 응應의 10대손이며, 진희晉熙의 5대손이다. 증조曾祖는 덕광德廣이며 조부祖父는 석흥錫興이고 월촌공 달홍達弘의 독자獨子이다. 공의 자字는 천지千之이고 호는 이곡梨谷 이며 옥종면 월횡리에서 태어나 7세에 모친상을 당하더니 애호哀號를 그치지 않고 혈루血淚가 옷깃을 적시었다. 어버이 뜻에 순응하고 가르침대로 따르며 호발毫髮의 위오違忤도 없었으며 잠시도 어버이 곁을 떠나지 아니했다. 앉거나 일어서는 데에는 항상 정해진 자세를 취했으며 당실堂室에 거처할 때는 족슬足膝의 흔적을 두었다. 어버이 월촌공의 학문에 유염擩染되어 일찍부터 문행이 이루어지고 성리학에도 깊이가 있었다. 선공先公이 만세晚歲에 심양心恙이 있어서 가르치고 명하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은 것이 많았으나 어김없이 모두 따랐는데, 살고 있는 장옥行廊이 휴결休缺된 곳이 없는데도 고칠 것을 명하니 즉시 고쳤다. 사람들이 혹 이를 비난하면 이르기를, “아버지의 가르침에 어떻게 감히 고침이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하기를 수년 동안 지내더니 선공先公의 심양은 마침내 물약勿藥(약을 쓰지 아니함)에 이르니 원근의 장보章甫(선비)들이 지극한 정성으로 받들지 않는 이가 없었다. 
 타고난 자질이 남달라 부친 월촌공이 일찍부터 독서에 치중할 것을 강조하였고, 자라서는 부친으로부터 소학을 집중적으로 지도받았다. 당시 공부모습을 지켜보던 할머니 강씨는 “그 아비의 그 아들이다” 라고 흐뭇해하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월촌공은 자식이 재주만 믿고 게으름을 부릴까 염려되어 중용에 ‘남이 한번해서 능히 하거든 자신은 백번을 해보고, 남이 열 번해서 능하거든 자신은 천번을 해야 한다’ 는 구절에서 뜻을 취해 아들의 자字를 천지千之라고 지어주었다. 같은 마을에 사는 월고 조성가와 함께 노사 기정진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많은 질의를 하였는데 공이 경서에 깊이가 있는 것을 알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노사는 친구인 월촌에게 글을 보내 “아들이 그대의 뜻을 잘이어 가니 그대 가문의 큰 복이 될 것이다. 누가 이를 뛰어 넘겠는가” 라고 하였다. 1875년 만성 박치복, 이곡尼谷 하응로 등과 함께 한주 이진상(1818~1886)을 만나 강회講會를 가지면서 가학家學인 남명학에 퇴계학을 수용하였고 기호학계 학자들과도 폭넓게 교유하였다. 당시 선비들이 남명 선생의『학기學記』및『신명사도神明舍圖』를 다시 정리하여 바로 잡으려 할 때 公이 조변條辨을 자세하게 정리하여 선생의 본뜻을 천명闡明하였고 산천재에 머물면서 제생을 훈회하였다. 서예에도 능해 석봉 한호의 서법을 연구하여 필법이 정묘精妙하였으며 ‘개운루’ 등 많은 편액을 남겼다.
 공이 세상을 떠나니 노백헌 정재규(1843~1911)는 시詩로서 곡哭하여 이르기를 “효양孝養에 어김이 없는 것은 증씨曾子의 뜻과 같고, 시명詩名은 또 종문宗文의 집에 있었구나” 라고 하였다. 사촌 박규호가 찬한 행장과 공산 송준필이 찬한 묘갈墓碣, 백촌 하봉수가 저술한 묘지墓誌, 그리고 공의 문집 2권이 전한다.
  ◦ 하상진河相晉 1841년~1915년 -양정공 15대손
 공은 장령공 계보季溥의 장자 선무랑 응應의 12대손이며 수희受熙의 6대손이다. 증조는 대흥大興이며, 조부는 달원達源이고, 청운淸運의 장자長子이다.
 공의 자字는 재원再源이고 호는 월은月隱이며, 당시 효성이 지극하여 『진양지』 효열록에, 「아버지가 병들어 여려 해가 되어 단을 모아 놓고 하늘에 빌었더니 어느 날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말하기를 “너는 무주에 가서 모인某人을 찾아 약을 구하라” 하므로 문득 깨어서 그 노인의 말대로 무주에 갔더니 모인某人이 있었고 그 사람도 공公의 성명을 알고 있었다. 기이하게 여겨 물으니 대답하기를, “일찍이 나의 꿈속에서 그 노인이 말했기 때문에 자네가 효자인 것을 알았노라” 하고 약을 주므로 가지고 돌아와서 다려드리니 아버지의 병이 즉시 나았다」 라고 실려 있다. 후손들은 월횡문중을 이루고 있다.
  ◦ 하의용河毅鎔 1836 憲宗 2 - 1884년 高宗 21
  초휘初諱는 우종宇鍾이요, 자字는 성필聖弼이다. 운수당雲水堂 후손이며. 송헌공 명세命世의 5세손이고 재천載千의 아들이다. 효행이 탁이卓異하여, 어머니 병에 손가락을 베어 연명시킨 것이 여러 번이었다. 유림儒林에서 글을 올려 가문을 회복시킨 일이 주지州誌에 실려 있다.
   ◦ 하한장河漢章
 별시위 사과別侍衛 司果를 지낸 치천値千의 후손이고 통정대부 의상義相의 손자이며 우주遇舟의 아들이다. 공은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여 향리에 많은 이들이 장계狀啓를 올려 그 효성을 높이 찬양하였다. 조정에서는 뼈에 사무치도록 부모를 사모하고 봉양하는 마음이 지극하여 이를 본받게 종신토록 복급 2결을 하사 받았다.
   ◦ 하홍河泓
자字는 중해仲海이요, 창주 하증河憕의 손자이다. 성품이 강명剛明하고 정직正直하며 효우孝友에 돈독하였다. 어머니의 병환이 20년이나 계속하였으나 일심으로 게을리 하지 아니하였고 똥을 맛보고 손가락 피를 드리우고 하늘에 빌어 쾌유하기를 빌었다 마침내 회복되어 건강을 되찾게 되었다. 상喪을 당하여서는 최질을 벗지 아니 하고 죽을 마시다가 시휘로 드디어 일어나지 못하였다,
 
  ◦ 절부 진양강씨節婦晉陽姜氏 - 정려편 참조
  ◦ 효열부 재령이씨孝烈婦載寧李氏 - 정려편 참조
  ◦ 열부 분성김씨烈婦盆城金氏 - 정려편 참조
◦ 열부 진양강씨晉陽姜氏
사인士人 하상현河尙顯의 처로 군수 운수당 윤潤의 후예後裔이다. 1790년 정조14년에 생生하여 1824년 순조24년에 졸卒하였다. 아버지는 통덕랑 강 복姜福이며, 감사監司 윤潤의 손녀요, 증 이조참판 이일履一의 증손이다. 부덕婦德이 있어 시부모를 정성껏 받들었으며, 간언間言하는 사람이 없었다. 1822년 순조22년에 지아비 상현尙顯의 상喪을 당하여, 염습殮襲하고 전奠 올리는 것을 친히 행하여 유감遺憾이 없었고, 슬퍼하여 마음을 상傷하는 것이 법도에 지나쳤다. 남편의 종상일終喪日에 평소와 같이 시부모를 봉양하고 가사家事를 돌본 후에 방에 들어가 자결自決하였다. 이런 열행烈行으로 주지州誌에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