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강공파松岡公派
12. 송강공파松岡公派
  ◦하 항河恒  - 파조편 참조
  ◦ 하인상 河仁尙 1571 宣祖 4 - 1635 仁祖 13
 자字는 임보任甫이고 호號는 모송재慕松齋이다. 증 순충보조공신 자헌대부 이조판서 진평군晉平君 위보魏寶의 장손이고 송강공 항恒의 아들이다.
 공은 타고난 재능과 인품이 뛰어났으며 가학家學을 계승하여 실천을 중시하더니 1613년광해군5 생원시에 입격하여 성균관에 유학하였다. 1614년 북인들이 국모國母를 폐위시키려 했을 때 성균관 유생들이 모여 공公이 앞장서 발언할 것을 원했더니 公이 분질러 이르기를 “신하된 자들이 강상綱常의 죄를 범하려 하는데 하늘과 땅 사이에서 용납이 되겠는가” 하고는 고향으로 돌아와 과거를 포기하고 권귀權貴(권문귀족)의 집에는 한 번도 발걸음 하지 않았다. 이 일을 두고 훗날 태계 하진이 공公의 제문에서 “이는 곧 동옹桐翁(동계 정온)이 했던 일과 같은 셈이다”라고 하였다. 1617년광해9 공公의 숙부 창주공이 주축이 되어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을 문묘文廟에 배향配享 할 것을 요청하는 소疏를 올릴 때 公이 소두疏頭로 추대되어 영남 선비 수백 명을 창도唱導하였다. 인조반정 후 천거薦擧로 종사랑從仕郞을 지냈으나 일찍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초당을 짓고 동계 권도(1557~1644) 등 여러 학자들과 학문을 강론講論하면서 후진을 교수하니 많은 사람들이 모여 일시에 이름이 드높았고 태계 하진 등이 公의 문門에서 나왔다. 어버이 상을 당하여서는 3년 동안 죽을 먹으면서 시묘살이를 하여 어버이의 효행을 이었다. 적자嫡子를 두지 못해 종제從弟 지상의 차남 계문을 아들로 삼았다.『교자록』이 있어 세상에 행해졌으며 모송재집慕松齋集을 남겼고 진주 청계서원淸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 하계문 河啓文 1613 광해 5 ~ ? 
 자字는 비서丕瑞이며 송강공 항恒의 손자이며 모송재의 아들이다. 단동에서 장사랑공 지상智尙의 중자仲子로 태어나 모송재공에게 입후되었다. 효우孝友가 남달라 부모님 생시에는 뜻을 살피면서 지극한 정성으로 봉양하였고 세상을 떠난 후에는 상장제례에 예와 공경함을 다하였으며 서제庶弟들을 달래어 그 은애恩愛로 감복시켰다. 문중의 주손冑孫으로서 자신을 낮추어 겸손하고 검소함으로서 문중의 돈목과 종족 보호에 최선을 다해 전통 있는 명문가의 아름다운 관습을 지켜나갔다. 일찍이 공公의 종대부 죽헌공께서 “아무개는 덕성스럽고 참되고 알차서 어버이를 섬기고 처자를 이끄는데 정성을 다한다” 라고 하여 종사를 이어갈 재목으로 지목하였다. 향리에서 학행과 덕망으로 널리 알려져『향안록』에 올랐다. 두 아드님과 세 따님을 두었는데 아드님은 세윤世潤과  대윤大潤이다.
◦ 하대윤 1649 인조 27 ~ ?
 자字는 ○이고 호號는 지수헌篪叟軒이다. 송강공 항恒의 증손으로, 모송재의 손자이며 계문啓文의 둘째 아드님이다. 인조 기축년 단동 세제에서 태어나 성장하면서 효우가 남달랐다. 학문과 행의行誼로 두드러져 향리에서 추중되어 진주 향안과 경상우도의 으뜸서원인 덕천서원의 청금록에 이름이 올랐다. 평생 선행을 쌓고 의로움을 즐기면서 선대의 뜻을 잇고 후손을 유복하게 하는데 마음을 쏟았다. 공은 네 아드님을 두었는데 계자季子 경룡慶龍의 손자 진홍鎭泓이 진주 서쪽 수곡으로 옮겨와 살게 되었다. 공이 세상을 떠난 200여년 후 태계공의 후손 제남 하경락(1876~1947)이 묘지명墓誌銘을 지었다. 공이 남긴 교훈이 ‘근본에 보답하며 선조를 추모하는 일’이었기에 후손들이 공의 뜻을 받들고 추모하기 위해 광복 후 병진년1976년에 수곡면 효자리에 창기조創基祖인 공公을 모시기 위해 재사를 지어 모원재慕遠齋라 편액을 걸었다.
 
◦ 하경룡 河慶龍 1694 숙종 20 ~ ?
 공의 자字는 ○이고 호號는 목옹이다. 송강공 항恒의 현손으로, 모송재의 증손이며 계문啓文의 손자이고 지수헌 대윤의 계자季子이다. 공은 숙종 갑술년에 태어나 진주 동쪽 닥밭골楮田洞에 살았는데, 단동의 족제族弟 치와공癡窩公(諱응명-단지공의 현손)과 서로 시詩를 주고받으며 친하게 지냈다. 치와공의 유고에 공公이 남긴 시詩 여려 편이 발견되어 전하고 있는데 공의 시편詩篇은 보통 자연의 경치를 읊은 것이 아니고 윤리를 순화하고 예禮를 중히 여기는 내용으로 가락과 운치가 온화하고 맑다. 공의 손자 진홍鎭泓이 진주의 서쪽 수곡으로 옮겨 터를 잡으니 후손들의 세거지가 되면서 공의 묘를 지금의 창촌 모세곡에 이장하였다.
◦ 하극호 河極浩 1724 경종4 ~ 1789 정조13
 공의 자字는 일숙一叔이고 호號는 단연丹淵이다. 송강공 항恒의 5대손으로, 모송재의 현손이며 휘諱 세윤世潤의 손자이고 휘諱 명룡命龍의 아들이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 문사文詞가 일찍 이루어져 주위의 칭송을 받았다. 학문적 성과가 뛰어났으나 노론의 권력독점으로 세도가 날로 나빠지니 명리名利의 뜻을 버리고 성리학에만 전심하였다. 괴천槐泉 유문룡柳汶龍, 현와弦窩 윤동야尹東野 등의 제현들이 추중推重하였다.
 
◦ 하진락 河鎭洛 1758 英祖 34 - 1814년 純祖 14
 공의 자字는 탁지卓之이고 호號는 겸와謙窩이다. 송강공 항恒의 6대손으로, 명룡命龍의 손자이고 단연 극호極浩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자질이 뛰어나더니 뜻을 돈독히 하고 힘써 배웠다. 성품이 온순하여 어버이를 섬기고 형을 받드는 효우孝友가 남달라 주위로 부터 많은 칭송을 받았다. 여러 번 향시에서 수석을 하였으나 예조의 회시會試에서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입재立齋 정종노鄭宗魯의 문하에서 학문이 뛰어나니 당시 제현諸賢들이 추중推重하였다. 문집文集이 전하고 있다.
◦ 하이범 河以範 - 효자·열녀편 참조
 
◦ 하계락 河啓洛 1868 高宗 5 - 1933년
 공의 자字는 도약道若이고 호號는 옥봉玉峰이다. 송강공 항恒의 10대손이고, 지수헌의 증손인 진명鎭明의 현손이며 농은農隱 경칠慶七의 손자이다. 수곡 효자동에서 송담松潭 두원斗源과 연일정씨 사이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책읽기를 좋아해 늘 책을 가까이 하였다. 8세 때 모친상을 당했으며, 17세 때 밀양박씨 인호仁浩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박씨는 면우 곽종석의 생질이요 사촌沙村 박규호朴圭浩의 종질이다.『진양속지』‘열행조烈行條’에“부인 밀양박씨는 천성이 순하고 효성스러워 시부모를 잘 모시고 남편을 공경하는 등 예의규범에 어긋나는 일이 없었고, 특히 계시모繼媤母를 섬기는 데에 정성을 다하니 향리에서 모두 그 효행에 감복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공은 1895년에는 백촌 하봉수 ‧ 회봉 하겸진 등과 남해 노량을 유람하면서 이충무공 사당에 참배하였고, 이듬해엔 조부의 명으로 백원서숙百源書塾을 지어 많은 선비들과 학문을 연마하였다. 1897년에는 백촌 하봉수 ‧ 약헌 하용제 등과 삼가 뇌룡정을 경유해 성주 대포大浦로 가서 한주 이진상의 학덕을 기리는 사당인 삼봉서당三峯書堂을 참배하였고, 돌아오는 길에 교우 윤주하 ‧ 회당 장석영 ‧ 대계 이승희 등 한주의 제자들과 성주 무흘산에 들어가 한강 정구 선생의 유적을 둘러보았다. 1898년에 면우 선생을 모시고 단성 남사에서 향음주례를 했으며 다음해에는 거창 다전으로 가서 면우 선생에게 배우기를 청하였고, 고향 수곡에서 극재 하헌진 ‧ 회봉 하겸진 등과 낙수암에서 글을 읽었는데 이때 공은“회봉은 재주가 높아 미치기가 어렵고, 극재는 행동이 독실해 본받을 만하다”고 하면서 두 선비의 장점을 본받고자 하였다. 당시 청곡사에서 진행되던 남명 선생의 문집 중간重刊의 일을 도왔고, 면우 선생이 대원사에서‘주자어류’를 간행할 때도 참여했으며, 면우 선생이 세상을 떠난 후 니동서당 건립과‘면우집’발간 때도 힘껏 도왔다. 1925년에 운곡雲谷의 가덕리로 이주하였으며, 만년에 뜻이 맞는 선비들과 수곡 창촌에 만수당晩修堂을 세우고 백촌 하봉수 ․ 회봉 하겸진 등의 덕망있는 선비들과 함계 계契를 조직하여 학문을 강론하고 시詩를 읊조리며 평생을 보냈다. 만수당에는 지금가지 공이 쓴 기문이 걸려있고, 문집文集이 전한다.
 ◦ 하장환(河章煥 - 독립유공자편 참조
◦ 하용환 河龍煥 1892 高宗 29 - 1961
 공의 자字는 자도子圖이고 호號는 운석雲石이다. 송강공 항恒의 11대손으로 옥봉 계락啓洛의 아들이다. 
 수곡면 효동에서 태어나 성품性稟이 관유寬裕하고 예를 행함에 있어 당시의 모범이 되었다. 14세 때 거창 다전의 면우 곽종석에게 학문을 배우고 싶었는데 길도 멀고 나이도 어려 부친이 허락하지 않다가 공이 간곡히 청하니 마침내 허락하여 수곡에서 거창 다전까지 300리 길을 왕래하며 학문을 익혔다. 모친 밀양박씨가 곽 면우의 생질이 되는 인연으로 일찍부터 면우 선생에게 나아가 학문을 배울 수 있었는데 중재 김황이 쓴 묘표에 “군은 면우 선생에게 중표척손重表戚孫이 되어 일찍 귀의하여 왕래하였다”고 되어있다. 공의 나이 20세가 되지 않아 이미 학문이 깊어져 마을 선비들이 함부로 대하지 못하였으며, 오로지 아버지처럼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전념하여 부귀영달을 누리기보다 자신의 마음을 수양하는데 전념하였다. 족형族兄인 회봉 선생에게도 질정하여 학문의 폭을 넓힐 수 있었기에 공의 학문은 면우로부터 시작되었지만 족형인 회봉 선생에게 많은 영향을 받아 회봉 선생의 학문방법을 평생 따랐다고 할 수 있다.『진양지』에 공은 성품이 너그럽고 문학이 넉넉하여 당시에 명망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저서로는 운석집雲石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