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정공파襄靖公派
20. 양정공파襄靖公派
   ◦ 하경복河敬復 - 파조편 참조
  ◦ 하계보河季溥
 공은 판서공 승해承海의 증손으로, 의정부 좌찬성 양정공 경복敬復의 손자이며, 판중추부사 강장공 한漢의 넷째 아드님이다.
 공은 문과文科에 급제하였고, 부친 강장공의 강직함을 이었고 숙형叔兄 경절공의 청렴성을 닮았다. 조부 양정공과 부친 강장공의 음덕이 더해지고 숙형叔兄 경절공과 성종 임금과의 지우知遇를 고려한다면 크게 현달할 수도 있었을 것이나 공公의 강직함이 이유되어 대간직臺諫職에 오래 머물게 되었다. 
 연산이 즉위한 후 대간臺諫들을 자주 하옥下獄하고 엄한 형벌로 억압하자 통훈대부 사헌부 장령(정4품)직을 끝으로 향리 월횡에 은거하였다.
 공은 3남 1녀를 두었는데 3남 모두 문음으로 벼슬을 받았다. 장자長子 선무랑 응應과 중자仲子 종사랑 순順은 보직을 알 수 없는 음관이었고, 계자季子 항恒은 중앙군 5위의 사정(정7품직)에 올랐다.
 공의 묘는 옥종면 대곡리 추동楸洞의 자좌子坐이며 옛날 비명碑銘이 다 없어져 1985년 다시 수비竪碑하였다. 묘갈명은 순천인 김철희金喆熙가 찬하였다.
  ◦ 하 항 河恒
 공의 증조는 의정부 좌찬성 양정공 경복敬復이며, 조부는 판중추원사 강장공 한漢이다. 공은 옥종 월횡에서 장령공 계보季溥와 영인令人 정씨 사이의 3남 1녀 중 계자季子로  태어났다.
 공은 천성이 침착 중후하고 재지才智와 기량器量이 비상非常하여 가업家業을 이어 뜻을 입신양명立身揚名에 두었다. 형제간에 우애가 있어 동상화락同床和樂이 깊었으며 문음으로 천거되어 중앙군대 오위 중의 하나인 충무위 사정(정7품)에 올랐으며 이후 통훈대부의 품계를 받았다.
 아들이 없는 숙부 경절공이 낙향하였을 때 공은 몸을 다해 친부親父처럼 섬겼고 거주지를 처가妻家 성주이씨의 선향先鄕인 단성丹城으로 옮겨 한가롭게 노닐며 여생餘生을 마치니 후손들이 단성인丹城人이 되었다. 공의 손자 여관汝灌‧ 여윤汝潤 형제가 무과에 급제하여 선대先代의 무관직을 이었는데 장손 여관은 임진왜란 때 전장에서 용맹을 크게 떨쳐 훈련원 첨정(종4)에 올랐다.
 공의 묘는 산청군 신안면 중촌리 안곡安谷에 있으며 묘갈명墓碣銘은 성산星山 이도복李道復이 찬撰하였다. 후손들은 산청(장란,술계,슬매,모고), 하동청암, 거창수월, 합천하빈 등에 세거하고 있다.
 ◦ 하천령 河千齡 -양정공 5대손
 공은 판충추부사 강장공 한漢의 현손玄孫으로, 증조는 사헌부장령 계보季溥이고, 조부는 선무랑 응應이며, 부친은 참봉 취원就元이다. 공의 자字는 사수士壽이며 선대의 세거지 월횡에서 성장하여 진사과에 입격하였다. 공은 아들이 없어 종형제 만령萬齡의 중자仲子 윤민潤民을 계자系子로 입적시키니 윤민潤民도 생원시에 입격하였다.
 공의 묘는 옥종면 안계리 심방동 후록後麓에 있으며 후손들은 수곡면 사곡, 단성면 창촌 등지에서 세거해오고 있다.
 ◦ 하현령 河玄齡 1546 ~ ? -양정공 5대손
 공은 판충추부사 강장공 한漢의 현손으로, 증조는 사헌부장령 계보季溥이고, 조부는 선무랑 응應이다. 공은 기자전 참봉을 지낸 침랑공 취형就亨과 진양강씨 사이의 셋째 아드님으로 옥종 월횡에서 태어나 남명학의 학문적 분위기에서 성장하여 문음으로 헌릉 참봉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진주성이 함락된 후 세거지에서 가까운 정개산이 새로운 산성으로 지정되면서 영무성 하응도가 별장으로 선임되니, 공公 또한 옥종 지역의 장정들을 이끌고 의병으로 참전하였다. 진주목사 나정언이 정개산성으로 피신해온 후로 왜적은 수천의 병력으로 공격하였으니 산성山城이 함락되면서 엄청난 인명피해를 입었는데 공의 인척을 비롯한 수많은 지역민들이 희생되었다. 이때부터 정개산성 너머 골을 억망골億亡谷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온다. 공의 배配는 청천하씨 참봉 응거應擧의 여女이며 수민秀民‧ 부민富民 두 아드님과 세 따님을 두었다. 후손들이 월횡문중을 이루고 있다.
  ◦ 하여관河汝灌 -양정공 5대손
 공의 증조는 사헌부 장령 계보季溥이고, 조부는 충무위 사정 항恒이다. 예빈시 참봉을 지낸 취문就文과 진양정씨 사이의 5형제 중 맏이로 태어나 중제仲弟 여윤汝潤과 함께 무과에 급제하여 무반가武班家의 가통家統을 이었다. 임진왜란 때 여려 전투에서 용맹을 떨쳤으나 불행하게도 동생들을 잃는 아픔도 겪었으며 전란 후 통훈대부 훈련원 첨정(종4품)에 올랐다. 공이 선대의 가첩家牒을 잘 보존하였기에 왜란 후 단목가의 창주공(諱 澄)이 공의 집안에서 전해 내려온 가첩을 바탕으로 진양하씨 첫 대종보『신유보』를 편집할 수 있었다. 공은 함안박씨 도사都事 윤수潤壽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1남 1녀를 두었는데 독자獨子 대용大容도 통사랑의 품계를 받았다. 공의 후손들이 신안문중, 슬매문중, 수월문중 등을 이루고 있다.
 ◦ 하은용 河銀容 1611년 光海君 3 - 1683년 숙종 9 -양정공 6대손
 공은 사정공 항恒의 증손이며 조부는 참봉 취문就文이다. 부친은 여택汝澤(1562~1623)이며, 첨정 여관汝觀은 공의 백부이다. 공의 자字는 운상雲祥이며 만년에 가선대부의 품계를 받았다. 공은 5형제를 두어 그 후손들이 합천 하빈, 산청 신안, 청암 위태 등에 세거하면서 하빈문중, 신안문중, 위태문중을 이루고 있다.
  ◦ 하윤민河潤民
  자字는 덕여德汝이요, 강장공 하한河漢의 6대손이며 생부生父는 만령萬齡이고
양부는 진사 하천령河千齡이다. 공公은 성균 진사成均進士를 지냈다.
  ◦ 하춘련 河春璉 -양정공 6대손
 공은 장령공 계보季溥의 중자仲子 종사랑 순順의 증손이며, 조부는 취인就仁이다. 공은 사천에서 휘諱 추령樞齡과 회진임씨 사이의 둘째 아드님으로 태어나 무과에 급제하여 가선대부(종2품)에 올랐다. 배위는 사천이씨 세동世東의 여女이며 독자獨子 한운澣雲도 무과에 진출하여 선략장군(종4품)을 지내고, 독손獨孫 홍원弘源도 충의교위(정5품)를 지냈으
니 3대가 연이어 무반직에 종사하였다. 후손들은 사천 정동 고자실 문중을 이루어 고자실, 고성 삼산, 함양 도천 등지에서 세거해왔다.
  ◦ 하한운河澣雲
양정공 하경복河敬復의 후손이고 무과에 급제하고 가선대부를 지낸 춘연春璉의 아들이다.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선략장군宣略將軍을 지냈다.
  ◦ 하홍원河弘源
자字는 이원而元이요, 양정공 하경복河敬復의 후손이고 무과에 급제하고 선략장군을 지낸 한운澣雲의 아들이다. 무과에 급제하고 충의교위忠毅校尉를 지냈다.
 ◦ 하준해 河遵海 1589 宣祖 22 - 1633  인조 11 -양정공 7대손
 공은 장령공 계보季溥의 장자 선무랑 응應의 현손으로, 증조는 침랑공 취형就兄이며, 조부는 참봉공 현령玄齡이다. 공은 옥종 월횡에서 휘諱 수민秀民과 진양강씨 사이의 장자로 태어나 당숙 생원공 윤민潤民에게서 일찍부터 학문의 요체를 깨우쳤다. 광해 즉위년 인근의 족숙族叔 송정 하수일이 이조정랑을 사직하고 낙향하자 그의 문하를 출입하면서 ‘경敬으로써 안을 곧게 하고 의義로써 바깥을 반듯하게 하라’는 남명의 경의敬義사상을 전수받았다. 일찍이 사마시에 입격하여 성균관에서 수학하였고 1613년(광해 4년) 24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내‧외직을 두루 거친 후 통훈대부의 품계에 올랐다. 금정도金井道(現,청양군) 찰방일 때 여러 일에 뛰어나고 엄정하며 공명정대하였으므로 이민吏民이 두려워하면서도 경애하였다. 1615년(광해 7년) 인목대비가 유폐되자 눈물을 흘리면서 탄식하더니 인끈(紱,벼슬)을 던지고 향리 월횡으로 돌아왔다. 집을 월봉산 아래에 세우고 편액을 임월재라 이른 다음 자질子姪을 훈적訓迪하며 경적經籍으로 스스로 즐기다가 일찍 세상을 떠나니 향민이 모두 안타까워하였다.
 공의 장자 처사공 순楯도 학문하는 자세와 수행의 도를 일찍부터 터득하여 문행으로 이름이 알려져 통덕랑(정5품)의 품계를 받았고 5형제를 두어 그 후손들이 월횡문중을 이루어 양정가襄靖家의 구심점으로 이어왔다. 첫째 수희受熙는 월횡에서 대를 이어 그 후손들이 월횡 인근에서 세거해왔고, 둘째 진희晉熙의 후손으로 19세기 중엽 학문으로 유명한 월촌 하달홍이 있으며 후손들은 사월, 천평 등지에서 세거하고 있다. 셋째 연희延熙는 백형 수희의 숙자叔子 담일湛一을 계자로 입적하여 그 후손들이 신안 안봉에서 세거해왔고, 넷째 윤희는 후손을 두지 못하였으며, 다섯째 대희大熙는 사천 정동 건지미乾占로 이거하여 그 후손들이 건점,노천,초전,죽천 등지에서 세거하며 사천문중을 이루고 있다.
  ◦ 하경렴 河景廉 - 양정공 7대손
 공은 장령공 계보季溥의 장자 선무랑 응應의 현손으로, 증조는 침랑공 취형就兄이며, 조부는 참봉공 현령玄齡이다. 부친은 부민富民이며, 찰방공 준해는 공의 종형從兄이다. 
 일찍이 겸재 하홍도의 문하에서 배워 시율詩律이 뛰어나 널리 이름이 알려졌다. 어질고 선善하며 학문에 깊이가 있어 향시에는 누차 입격했으나 경시京試에 오르지 못해 모두가 애석해 하였다. 겸재 하홍도의 문인록과 진양지 유행편에 공公에 대한 기록들이 실려 있고 문집이 전한다. 곤명 원당이 후손들의 세거지이다.
 ◦ 하봉천 河奉天 -양정공 8대손
 공은 사정공 항恒의 5대손이며, 여택汝澤의 증손이고, 가선대부 은용銀容의 손자이다. 신안 중촌에서 필인必仁과 임씨 사이의 장자로 태어났다. 공의 자字는 천익天翼이고 동지중추부사의 위계를 받았다. 공의 후손들은 합천 하빈문중을 이루고 있다.
 ◦ 하시천 河始天 1688 肅宗 14 - 1765 英祖 41 -양정공 8대손
 공은 사정공 항恒의 5대손이며, 여택汝澤의 증손이고, 가선대부 은용銀容의 손자이다. 신안 중촌에서 휘諱 필대必大와 진주강씨 사이의 계자季子로 태어났으며 자字는 천여天與이고 첨지중추부사의 위계를 받았다. 공의 후손들은 합천 하빈, 무주, 김해 등지에 세거지를 두고 문중을 이루고 있다.
 ◦ 하중구 河重龜 -양정공 10 대손
 공은 사헌부 장령 계보季溥의 중자仲子 종사랑 순順의 7대손으로, 가선대부 춘련春璉의 현손이며 교위 홍원弘源의 장손이다. 사천 정동에서 선고先考 희진熙晉과 경주정씨 사이의 장자로 태어나 영조 4년 무신란 때 진압군으로 참여하여 반란군을 토벌하는데 공을 세워 분무원종훈奮武原從勳으로 공신록에 기록되는 녹권綠卷을 하사받았고 행군기감에 특배되었다.
 공의 묘는 사천 정동 가곡柯谷 묘좌卯坐이며, 후손은 사천 고자실문중이다.
 ◦ 하원일 河元一 1705년 肅宗 31 - 1788년 正祖 12 -양정공 10대손
 공은 장령공 계보季溥의 장자 선무랑 응應의 7대손으로 찰방공 준해遵海의 증손이다. 공은 사천 건점에서 입사천공入泗川公 대희大熙의 중자仲子로 태어나 가선대부 중추부사에 올랐다. 공의 배위 숙부인 광주김씨는 증贈참판 김하현의 따님이다.
 공의 현손 노천공魯川公 진도進圖(1809~1853)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학문이 일취월장하더니 퇴계의 주리설을 정통학맥으로 잇는 안동을 참된 마음으로 수차례 왕래하면서 정재 유치명의 문하를 출입하였고, 성주에서 이원조를 만난 후 부터 거업擧業을 접고 성리학에 몰두하였다. 동년이면서 족숙族叔되는 옥종의 월촌 선생을 자주 찾아가 학문을 논하고 선조의 현창사업顯彰事業에도 힘써 노력하였으나 불행히도 45세로 조세早世하여 학문적 재질을 꽃피우지는 못하였으나 선대에서 계속 저술해온 선대의 문적을 잘 정리하여 후대로 전하게 하였다.
 공의 6세손 초산공 빈헌斌憲 (1871~1954)은 자가 윤장允章)이고 호는 초산樵山으로 사천 향교 전교典校를 지내면서 후학을 양성하여 민족정신을 고취시키는데 앞장섰으니 사천지泗川誌에, “득문위기得聞爲己하여 불구성예不求聲譽하고 둔세불원遯世不怨하였다” 고 기록 되어있다. 또한 선대의 세거지인 옥종 월횡을 자주 왕래하면서 백촌 선생과 교유하면서 학문의 폭을 넓히고 선조의 보본사업報本事業과 양정가襄靖家의 돈목敦睦을 위해 노력하였다.
 ◦ 하덕중 河德重 -양정공 11대손
 공은 사헌부 장령 계보季溥의 장자 선무랑 응應의 8대손으로, 진사 천령千齡의 6대손이며 영상榮尙의 현손이다. 공의 증조는 종박宗璞이고, 조부는 학선學善이며, 해명海明과 전주이씨 사이의 중자仲子로 태어났다. 공의 자字는 여위汝威이고 19세기 초에 행절충장군을 지내고 첨지중추부사에 올랐다. 묘는 하동 청암면 오대사五臺寺 서강西岡 궁항촌 안산 간좌이며 후손은 사곡 문중이다.
 ◦ 하필도 河必圖 1678년 肅宗 4 - ? -양정공 12대손
 공은 강장공의 장자 록사 맹보孟溥의 10대손이다. 공의 증조부 신국藎國이 덕산 양산에서 곤명으로 이주한 이래 공公 역시 사천현감 재직을 연고로 손량(초량)을 정주지로 택하였다. 공의 현달로 조고祖考 이청以淸은 통정대부 중추부사에 추증되었고, 선고先考 인철仁澈은 좌승지겸 경연 참찬관에 추증되었다.
 공은 숙종 때 무과에 올라 사천현감 등 여러 관직을 거쳤고 평생에 의롭지 못한 것을 보면 비분강개悲憤慷慨하는 대절大節이 있었으며 충의忠義가 늠름하였다.
 1728년(영조 4년) 이인좌 등 소론 과격파와 일부 남인이 합세하여 영조와 노론정권을 타도하기 위한 반란(무신란, 이인좌의 난)을 일으키자, 기층 민중의 저항적 분위기가 바탕이 되면서 지방의 사족과 토호 그리고 중간 계층이 호응하게 되어 이인좌는 청주성을 함락시키고 서울로 북상할 만큼 세력이 커졌다. 한편 영남지방에서도 동계동계 정온鄭蘊의 후손인 정희량鄭希良이 반란세력에 가세하여 그 세력이 커져 안음‧ 거창‧ 합천‧ 함양 등을 반도叛徒들이 점령하였다. 이에 경상도 관찰사의 지휘 아래 관군이 토벌에 나서자, 전前 현감으로 상중이었던 공公도 기복起復하여 두 아우 응도應圖, 처도處圖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곤양군수 우하형과 합세하여 거창현 소사평에서 싸워 정희량의 반도
叛徒를 평정하는데 큰 공功을 세웠다. 이로서 분무원종훈奮武原從勳으로 공신록에 기록되는 녹권綠卷을 하사받고 통정대부에 추증되니 세칭 일가쌍충一家雙忠이라 하였다. 공에게는 응도應圖, 치도致圖, 재도載圖, 처도處圖, 취도就圖, 명도命圖 등 6명의 아우들이 있었는데 응도, 치도, 취도는 통덕랑에, 재도는 장사랑에 제수되었고, 처도는 공신녹권을 받았다. 공의 세 아들 성후聖垕, 성기聖基, 성위聖湋와 조카 9명도 통덕랑의 품계를 받았다. 공의 형제 후손들은 사천시 곤명면 손량을 세거지로 하여 초량문중을 이루고 있다.
 1719년(숙종 45년) 단목 단지가丹池家의 호군공 하형, 창주가滄洲家의 하응운 등이 주축이 되어 진양하씨 족보를 간행할 때, 사천현감이었던 공이 초계군수 하옥과 함께 개보주사開譜主事로 참여하여『기해보』의 간행을 도왔다.『기해보』는 현존하는 진양하씨 시랑공계 대동보大同譜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 하성위河聖緯
양정공 하경복(河敬復)의 후손이니, 무과에 급제하고 통정대부를 지낸 하필도河必圖의 아들이다. 무과에 급제하고 통덕랑을 지냈다.
  ◦ 하달홍 河達弘 1809년 純祖 9 - 1877년 高宗 14 -양정공 13대손
 공은 장령공 계보季溥의 장자 선무랑 응應의 10대손이며 진희晉義의 현손이다. 증조는 의일義一이고, 조부는 덕광德廣이며 부친은 석흥錫興이다. 공의 자字는 윤여潤汝이며 호는 월촌月村 또는 무명정無名亭이며 옥종면 월횡리에서 성장하여 7세 때 진사 최중집崔重集에게서 배웠다. 공은 풍채와 심정이 엄정하고 문사文詞가 섬박譫博하며 행의行誼 또한 순박하고 독실하였다. 13세 때 진주목사가 덕천서원에서 시행한 백일장에 나가 뛰어난 시재詩才를 과시하여 여려 선비들로부터 격려와 칭찬을 받았다. 공은 문장에 관심이 깊어 한유‧유종원‧소식 등 당송팔가문唐宋八家門을 본보기로 삼아 문장을 지었는데, 한말 대문장가 회봉 하겸진은 공의 시와 문장을 당송팔가의 문장에 뒤지지 않는다고 평가하였다. 조선시대 성리학의 6대가六大家 중의 한사람으로 꼽히는 거유巨儒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1798~1879)과 물재 노광리 등과 도의교로 지냈다. 1859년 노사 기정진이 월횡을 방문하였을 때 월고 조성가, 노백헌 정재규, 계람 최숙민 등과 동석하여 강회講會를 갖게 되면서 학문의 폭을 넓혔다. 겸재의 학문 도장인 모한재에서 남명학을 계승하고 많은 후생을 지도하였는데 하씨가河氏家의 문하생으로, 공의 장자 이곡 하인수, 양정가襄靖家의 월주 하조헌, 송정가松亭家의 동료 하재문, 겸재가謙齋家의 이곡 하응로 등이 뛰어났다. 당시 진주목사 정현석이 향교에 고을의 선비들을 모아놓고 향음주례를 시행할 때 공을 주빈으로 초대하니 공이 ‘향음주례서문’을 짓고 행사를 차질 없이 마쳤다. 겸재 하홍도 선생의 문집이 세상에 나오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여기다가 겸재 선생의 문집 발간을 주도하였으며, 병인양요로 나라가 어수선하여지자 외국과 통상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며 이른바 위정척사의 의지를 강하게 드러내었다. 안동의 정재 유치명 문하를 출입하면서 선조 양정공의 묘갈명을 받아와 양정공 묘소를 정비하는 등 선조의 업적을 기리는 일에도 앞장을 섰다. 공이 저술한『태극도주해太極圖註解』『진학설進學設』『균부설均賦設』『동해송변東海頌辨』등은 모두 당시에 널리 회자膾炙되었다. 성환혁이 묘갈명을 찬하였고, 문인 정기균이 찬한 행록과 공산 송준필이 찬한 행장 및 공公의 문집 5책이 전한다. 후손들은 단성면 사월문중을 이루고 있다.
 ◦ 하조헌 河租憲 1843년 ~ 1933년 -양정공 16대손
 공은 장령공 계보季溥의 장자 선무랑 응應의 13대손으로 찰방공 준해의 9대손이며, 통덕랑 순楯의 장자 수희受熙의 7대손이다. 증조의 휘諱는 달홍達洪이며, 조고祖考의 휘諱는 서운瑞運이고, 선고先考의 휘諱는 상제相濟이다. 공은 옥종 월횡에서 태어났으며, 자字는 중희仲希이고 호는 월주月洲 또는 애헌艾軒이다.
 족대부族大夫 월촌공(휘,달홍) 문하에서 수학하여 문장과 글씨가 뛰어나고 행의行誼 또한 순백하여 사림에서 무겁게 여겼다. 일찍부터 학문적 재질이 있어 장차 크게 유위有爲될 것이라 하였으나 서양열강의 통상요구로 사회가 어수선하니 거업擧業을 접고 오로지 위기지학爲己之學에만 힘썼다. 평생에 언행이 결백하고 정직하여 거짓이 없었고 진실된 덕을 안으로 쌓아 영문令聞이 밖으로 드러났다.
 일찍이 월산 조성주, 이곡尼谷 하응로 등과 더불어 향약鄕約을 만들어 방인坊人들을 면려하였다. 양정공의 현창사업顯彰事業에 큰 공적을 남겼고, 유고遺稿가 전하며 최근 간행된『영남선유묵적』에 기록과 글씨가 실려 있다. 후손들은 월횡문중으로 옥종면 안계 등지等地에 거주하고 있다.
 ◦ 처사 하달규 河達圭 (1826년~1895년, 양정공 13대손) - 효자편 참조
 ◦ 이곡梨谷 하인수 河仁壽 (1830년~1904년, 양정공 14대손) - 효자편 참조
 ◦ 월은 하상진 河相晉 (1841년~1915년, 양정공 15대손) - 효자편 참조
 ◦ 백촌 하봉수 河鳳壽 (1867~1939, 양정공 14대손) - 독립 유공자편 참조
  ◦ 하이청河以淸 1638년  祖 16 - ?
천거天渠의 손자이며 신국藎國의 아들이다. 증 통정대부 동지중추부사贈通政大夫同知中樞府事를 지냈다.
  ◦ 하인철河仁澈   
신국藎國의 손자이고 아버지는 증 통정대부 동지중추부사贈通政大夫動止中樞府事 이청以淸이다. 증 좌승지겸경연참찬관贈左承旨兼經筵參贊官을 지냈다.
  ◦ 하해청河海淸
  자字는 천일千一이요, 양정공 하경복河敬復의 후손이며 삼선三善의 아들이다. 벼슬은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