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정공파松亭公派
3. 송정공파松亭公派
 ◦ 하수일河受一  - 파조편 참조
  ◦ 하찬河瓚 1595년宣祖 28 - 1642년仁祖 20
자字는 중진仲珍이요, 송정松亭 하수일河受一의 중자仲子이다. 하겸재河謙齋 홍도弘度로 더불어 도의道義로 사귐이 매우 친밀하였다. 그가 죽으매 회봉 하겸재가 묘명墓銘을 사문師門에 정의情誼가 두터웠다.
  ◦ 하자징河自澂 1614년光海君 6 - 1645년仁祖 23
자字는 성회聖會이니 하찬河瓚의 아들이다. 일찍부터 겸재謙齋의 문하에서 깊이 기대期大을 입었음이 두텁더니 그가 즉음에 이르러서 겸재가 울면서 하직하였다. 그 사辭에 이르기를, 일재逸才를 생각하니 호탕浩蕩한 사원詞源이었네, 대를 이어받은 절기節氣는 능력能力 고건高騫이었도다. 편언片言으로써 속俗된 사람을 놀라게 함이여, 장사치사 여번璵璠을 넘었도다. 질사疾邪 높은 말에 지껄이어 옥로玉露가 번성했도다. 세상에서 만일 나를 썼더라면 혼연渾然히 비쳐 주리다 하였다.
  ◦ 하자호河自灝 1619년光海 11 - ?
자字는 여우汝愚이요, 하찬河璨의 아들이다. 아우 하자혼河自渾의 자는 원초原初인데, 함께 하겸재河謙齋의 문하에서 수업하니 하겸재가 심히 애중愛重히 여겼다. 주자朱子의 서책書冊 가운데서 학문하는 요점要點을 들어 힘쓰도록 하였다.
 
 ◦ 하무河楙 1647 仁祖 25 - 1686 肅宗 12
자字는 덕언德彦이요, 호號는 태헌台軒이니 애각재愛慤齋 찬贊의 손자이고 자호自灝의 아들이다.
어려서 학업에 힘써 인근 사백詞伯들로부터 많은 칭송稱頌을 받았고 시문詩文에 능하였으며 당대 명유名儒 지명당知命堂 세응世應을 길렀으니 그 가르침을 알 수 있다. 저서著書로는 태헌집台軒集이 있다
   ◦ 하세희河世熙 - 정려편 참조
  ◦ 하세응河世應 1671 顯宗 12 - 1727 英祖 3
자字는 응서應瑞요, 호號는 지명당知命堂이니 송정 수일受一의 현손이고 태헌台軒 무楙의 아들이다. 1699년에 생원生員시에 합격하였다. 학문이 발상하고 준수한 지절을 소지하였으며 경상우도의 남명학에 경상좌도의 퇴계학을 접목하는 고리 역할을 하였다. 언제나 나라를 염려하여 의義 실행에 앞장섰다. 공公은 촉석루矗石樓 삼장사三壯士:충의공 趙宗道, 충익공 郭再祐, 金誠一의 사사祠祀를 청하는 소를 올렸으나 조정은 사당의 첩설疊設을 금한다는 명분으로 불허하였고 연이어 박제인朴齊仁을 조임도趙任道 서원에 병향並享 하기를 청하는 소를 올렸다. 공은 지역에서 많은 유림의 일을 주관하기도 하였으니, 정충단을 창렬사로 승격시켜 위패의 순서를 바로잡고 의식을 정하기도 하였다. 저서著書로는 지명당집知命堂集이 있다.
 
 ◦ 하필청河必淸 1701 肅宗 27 - 1758 英祖 34
자字는 천기千期요, 호號는 태와台窩이며 경상 도사를 지낸 수일受一의 5세손이며 지명당 세응世應의 아들이다. 1738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해 성균관成均館 전적典籍을 거쳐서 찰방察訪이 되었다. 기질이 출중하여 그때의 여론에 합치되지 않아 지위가 덕망에 따르지 못했다. 당시 조정은 당쟁으로 시끄러웠다. 미관말직의 벼슬보다는 학문에 뜻을 둔 태와台窩는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으로 돌아와 각봉재覺峯齋를 낙수암落水岩으로 이전하여 중건하고  각봉재覺峯齋에서 학문을 익히며 유유자적 하였다. 저서著書로는 태와집台窩集이 있다.
  ◦ 하달중河達中 1723년景宗3 -1799년正祖 23
 자字 군학君學이요 송정松亭 수일受一의 6세손이며 할아버지는 석계石溪 세희世熙이고 아버지는 윤청胤淸이다.
공公은 어려서 제형을 따라 수학하였고 자라서는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기 위해 강학 장소로 연못가에 조그만 한 정사를 지어 자연을 완상玩賞하며 학문에 전념하였다
 공公은 일찍이 문의文意를 해독하였고 사서史書에 능하였을 뿐 아니라 독서를 통해 학문적 포용성을 길렀고 자신의 수양과 더불어 고을의 풍습을 교화하는데 앞장섰다
 공公은 향상 충효에 관심을 가졌을 뿐 아니라  주손冑孫으로서 전통윤리傳統倫理에 심혈心血을 쏟았으니 금일에 이르기까지 자손들이 윤리倫理를 습득하게 된 것은 오직 공公의 음우陰佑에 힘입어 후손들은 그 높은 은덕을 잠시라도 잊지 못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평생 자연을 벗 삼아 학문에 정진하던 공公은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 하정중河正中 1737년英祖 13 - 1793년正祖 17
자字는 군직君直이요, 호號는 사암士庵이니 하자혼河自渾의 현손이다. 성품이 한결같이 빛나고 불기不羈하였으며 좋은 풍신風神에 문장文章이 능하였다. 아름다운 산수山水에 놀기를 좋아하고 두 번이나 평양平壤에 들어갔고 경사京師에 문사文詞로 이름난 자와 모두 시詩와 서序를 만들어 주고 다니어 수백여 편數百餘篇에 이르렀다. 이로부터 온 나라를 두루 교류交流하니 비록 얼굴로써 하지 아니했더라도 그 이름을 들을 사람은 흠모欽慕하지 아니하는 이가 없었으며 번암樊菴 채상국蔡相國으로 더불어 도의로 맺고 가장 친밀하였다.
 
 ◦ 하이태河以泰 1751 英祖 27 - 1830 純祖 30
 자字는 오겸五兼이요, 호號는 함청헌涵淸軒이니. 석계石溪 세희世熙의 증손자이며  달중達中의 아들이다. 어릴 때 모친이 별세하고 아버지 병시중을 몸소 맡아 하면서 아버지 병환 때문에 봉양하는 일에만 전심하면서 나들이도 줄이고 과거 공부도 폐지하였다
선조先祖 송정선생의 시문詩文인 송정세과松亭歲課 4권을 간행해 송정의 시문을 널리 알리는 일에 힘썼다. 만년에 낙수암에 집을 지어 함청헌이라고 편액을 걸고 자제들을 모아 학문을 장려했다. 이때 경전과 여러 선인들의 글을 읽은 다음에 고금古今의 이치理致를 알게 되었다. 무자기無自欺 즉 자신을 속이지 말라 라는 글을 써 붙이고 또 기둥에는 승직준평繩直準平 즉 먹줄같이 곧고 준칙같이 공평하다는 뜻의 네 글자를 써 붙이고 스스로를 경계했다. 정재 유치명 학맥의 정통을 계승한 선비로 당시 영남학파의 존장이라고 할 수 있는 선비이다. 저서는 유고遺稿가 있다.
 ◦ 하치중河致中 1758년英祖 34 - ?
자字는 내윤乃允이요, 호號는 사연舍淵이니 하자호河自灝의 현손玄孫이다. 집이 가난하여 몸소 밭 갈고 글을 읽었으며 부모를 섬김에 정성을 다하였고 글을 쓸 때는 종이를 펴놓고 한 글자도 고치거나 더 바르지 아니하였다. 만년晩年에는 방장산方丈山 가운데에 우거寓居하면서 저서著書로 스스로 즐겼다.
   ◦ 하우현河友賢 1768 英祖 44 - 1799 正祖 23
 초휘初諱는 송일頌逸이다, 자字는 강중 康仲이요, 호號는 예암 豫菴이니 송정松亭 수일受一의 8세 주손이고 경태慶泰의 아들이다. 어릴 때 부친을 여의고 조부의 슬하에서 자랐다. 8세 때에 소학을 읽고 10세 때에 사서의 뜻을 이해하고 자라서는 과거공부를 하였는데, 이때 문득 선비가 세상에 태어나 옛날 선현들이 했던 일들을 본받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내가 이제 힘을 쓸 곳을 알았다 하고는 과거공부를 그만두고 경서를 탐독하였다
문집에는「추정유잠가중용성명도追訂柳潛可中庸性命圖」개정중용성명도改訂中庸性命圖「미발재중도未發在中圖」등 어려운 경서의 내용들을 알기 쉽게 그림으로 풀이한 것들이 실려 있다. 후산 허유后山許愈가 공公의 문집 서문을 찬撰하면서 공을 중국 안자에 비유했다. 주위 사람들이 건강을 위해 지나친 독서를 만류하면, 죽고 사는 것은 하늘의 명에 따른 것이니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하며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799년 3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저서著書로는 예암집豫菴集이 있다.
  ◦ 하진현河晉賢 1776 英祖 52 - 1846 憲宗 12
 자字는 사중師仲이요, 호號는 용와容窩이니 석계石溪 세희世熙의 현손이며 함청헌涵淸軒 이태以泰의 아들이다. 부친의 명으로 남계南溪 이갑룡李甲龍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연마하였다. 시서詩書를 배우는 것을 평생의 벗으로 삼겠다는 굳은 의지를 드러내기도 했다. 이때 그의 나이 38세였다. 고향에서 학문에 정진하면서 우선 선대의 휼륭한 업적을 글로 남겨 후세에 전하고자 했다. 「시랑공유사후찬언侍郞公遺事後贊言,」「호정선생유집발浩亭先生遺集跋」 「환성재 하락선생문집발喚醒齋河洛先生文集跋」 「내복재선생문집보유발來復齋先生文集褓遺跋」「서송정선생선조세과편후書松亭先生先祖歲課編後」 「지명당공유사知命堂公遺事」 「태와공유사台窩公遺事」 등의 글이 문집에 실려 있다. 이 글의 주인공들은 하공진, 하륜, 하락, 하항, 하수일, 하세응, 하필청 등 수곡의 진양하씨 문중 으로 이 지역 학맥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진양연계재중건기晉陽蓮桂齋重建記」「연계재상량문蓮桂齋上樑文」「강은열공사영정이안고유문姜殷烈公祠影幀移安告由文」등의 글도 실려 있어 지역의 유림 일에 남다른 열정을 가진 것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대각서원 중건, 겸재집 간행의 일에 앞장서서 일을 추진시키기도 했다. 만년에는 사산초당士山草堂을 짓고 학문에 정진하였다. 저서著書는 용와집容窩集이 있다.
   ◦ 하경현河景賢 1779 正祖 3 - 1833 純祖 33
 자字는 유중孺仲이요, 호號는 고재顧齋이니 송정松亭 수일受一의 8세손이며 함청헌 이태以泰의 아들이다. 천성天性이 온공溫恭하여 부모에게 효도하고 친족親族과 돈목하며 가규家規를 엄수하였다.
천자天姿가 탁이卓異하고 시문詩文에 능하여 제현諸賢간에 명성이 높았고. 학문은 육경六經을 근본 삼아 탐독耽讀하였고 문장행의文章行誼가 세상에 추중推重되니 향당鄕黨의 사백詞伯들로부터 많은 칭송을 받았으며, 대각서원 중건기, 옥동서원 오현五賢의 봉안문, 오방재 중건기등을 지어 많은 시문을 남겼다. 저서著書는 고재집顧齋集이 있다.
   ◦ 하봉운河鳳運 1790 正祖 14 - 1843 憲宗 9
자字는 치서致瑞요, 호號는 죽헌竹軒이니 경상도사慶尙都事를 지낸 송정松亭 수일受의 9세 주손이며 예암豫菴 우현友賢의 아들이다.
10세 때에 부친을 여의고 종조부 함청헌涵淸軒 이태以泰에게 글을 배우면서 한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글을 읽었다. 진주 연계재蓮桂齋 중창重創, 진주향안晉州鄕案 교감, 종천서원에서 겸재 선생 문집 간행 등의 일에 참여했으며 낙수암落水庵을 중수하는 일 등을 주도적으로 진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남명 선생을 모신 덕천서원 원임의 직책도 맡아 남명 정신 선양에 지대한 공을 세우기도 했다. 덕천서원 원임을 맡았다는 것은 그 당시 유림에서 그의 위치가 어떠하였는지를 짐작케 한다. 저서著書는 죽헌집竹軒集이 있다.
   ◦ 하대현河大賢 1796년正祖 20 - 1845년憲宗 11
자字는 신여愼汝이요, 호號는 사와士窩이니 함와涵窩 하이태河以泰의 다섯째 아들이다. 함와와 성품이 엄준嚴峻 하였고 어릴때 부터 이목耳目에 유염孺染되어 덕기德器가 성인成人과 같았으며, 성장해서는 학문을 배워서 다듬었고 낙민洛閩의 글 읽기를 좋아하여 열심히 반복하여 자신의 말을 외우는 것과 같이 하였다. 유정재 치명柳定齋致明을 공손히 뵈오니 유치명이 깊이 장허獎許를 가하였다.
   ◦ 하계현河啓賢 1804 純祖 4 - 1869 高宗 6
자字는 능중能仲이요, 호號는 묵와黙窩이니 송정松亭 수일受一의 8세손이며 함청헌 이태以泰의 아들이다. 성품이 호준豪俊하여 매사에 솔선하는 미덕이 있어 많은 칭송을 받았다. 진주시 수곡면 사곡리 낙수암에 진양 하씨 시조 증문하시랑동평장사贈門下侍郞同平章事 공진拱辰공의 사당 경절사祠堂擎節祠를 중수하여 주손 하봉운河鳳運을 도와 시조始祖 휘일諱日: 陰 12월,15일에 제향祭享을 올리는 일을 주도하고 숭조의 얼을 높이 추앙推仰하였다. 저서著書는 묵와유고黙窩遺稿가 있다
   ◦ 하홍운河洪運 1822년純祖 22 - 1895년高宗 32   
자字는 우서禹瑞이요, 호號는 쌍강雙岡이며 함와 이태涵窩以泰의 손자이다. 박학博學으로 시詩에 능했으며 명성이 높았다.
   ◦ 하협운河夾運 1829 純祖 29 - 1906 光武 10
자字는 한서漢瑞이요, 號는 미성未惺이니 송정松亭 수일受一의 후손이며 정현正賢의 아들이다. 성격이 온후溫厚하고 재기才氣가 탁월卓越하였다. 학문에 전념하였으며, 시문詩文에 능하였고 높은 식려識慮가 있어 회봉晦峯 겸진謙鎭의 어릴 때 재기를 크게 바로 보고 항상 훈육訓育 하였다  저서는 미성집未惺集이 있다.
 
  ◦ 하재문河載文 1830 純祖 30 - 1894 高宗 31
 자字는 의윤義允이요, 호號는 동료東寮이니 경상도사 송정松亭 수일受一의 후손이며 경운慶運의 아들이다. 하동군 옥종면 안계리에 있는 모한재慕寒齋에서 경서를 읽어 성현聖賢들의 가르침을 배웠다.
 공公은 모한재慕寒齋에서 족조族祖인 월촌 하홍달河弘達의 지도를 받으며 선비들과 학문에 매진했다. 월고 조성가와 함께 진주향교에서 행한 향음주례에 참
석해 대학 등을 강론했으며 만성 박치복 등과는 산천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