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  조派祖
1. 문충공파文忠公派
  ◦ 하륜河崙 1347년忠穆王3 -1416년太宗16
  - 상세한 내용은 ‘역사상 현조’ 편 참조
2. 부사공파府使公派
  ◦ 하지돈河之沌 1365년 恭愍王 14 - 1427년 世宗 9
 
 문과에 급제하여 가선대부 검교한성판윤檢校漢城判尹을 지낸 유游와 영덕현부인盈德縣夫人 진양정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지정至正 을사乙巳-1365년 공민왕 14년에 태어났다. 식목녹사式目錄事를 지내고 순충적덕병의보조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우의정 판병조사判兵曹事로 추증되고 진강부원군의 봉호를 받은 시원恃源의 증손이고 통정대부로 부윤을 지낸 윤구允丘의 손자요, 문충공 호정 선생의 당질堂姪이다. 향년이 63세이다.
 1423년 世宗 5에 진사進士가 되고 여러 직책을 거쳐 중직대부 연산 부사종3품를 지냈다. 형제간에 우애하며 함께 착실히 공부하고 학문에 뜻을 세워 크게 이루었으며 모두 벼슬하였으니, 백형 지혼之混은 가선대부 한성소윤嘉善大夫漢城少尹이요, 공과 함께 동생 지명之溟은 소년 진사進士로, 공은 중직대부 연산부사中直大夫延山府使요, 지명之溟은 초계草溪 군수郡守요, 계제季弟 지행之涬은 풍저창 주부豊儲倉主簿를 지냈다.
 배위配位는 영인令人 김해 허씨許氏니 낭장郞將 승유承孺의 따님으로 전이판서典吏判書 옹邕의 손녀이다. 이남 이녀를 두었으니, 장남 영濚은 통훈대부 흥양 현감通訓大夫興陽縣監으로 지효至孝하여 친상親喪에 여막廬幕에서 시묘侍墓하였다. 자부子婦 죽산 박씨竹山朴氏는 도통사都統使 죽성공 영충竹城公永忠의 따님이다. 차자 순淳은 무후無后며, 장녀長女는 주부主簿 창녕 성규昌寧成揆의 처妻요, 차녀는 연일 병마절제사延日兵馬節制使 남원南原 양역梁嶧의 처妻로, 대사간 사귀思貴의 자부子婦이다. 영濚은 이남二男인데, 장남 문손文孫은 직장直長이요 차남次男은 사직司直 충손忠孫이니 후손이 함양 칠평과 창원 내곡에 산다.
3. 송정공파松亭公派
  ◦ 하수일(河受一 1553년 明宗8 - 1612년 光海君4 
 
 자字는 태역太易이요, 호號는 송정松亭이니, 호조정랑 면沔과 함안 조정견趙廷堅의 따님인 함안조씨 사이의 아들이다. 생원 희서希瑞의 손자이고 증조는 진사로 황간현감을 지낸 형瀅이다. 재종숙부叔父인 각재 하항河沆에게서  학문을 배우고 평생 남명 선생을 사숙私淑하였다. 1582년에 단성 향교 성전중수기를 지었으며 1583년에 덕천서원 세심정기와 수우당명, 촉석루 중수기를 지었다. 이때 진주 일원에 남명학맥을 이은 학자들이 많았음에도 젊은 나이인 그가 이런 글들을 지은 것으로 보아 문명이 크게 울렸음을 알 수 있다.
 1589년에 생원이 되고 1591년에 문과에 급제했다. 1592년 6월에 진주에서 소모유사召募有司가 되어 의병400여명을 얻었으나 군량 부족으로 다 흩어지고 말았다. 8월에 다시 의병을 모았다. 1600년에 성균관 전적으로 벼슬길에 올라 영산현감을 지냈다. 1607년에 형조좌랑, 정랑을 역임하고 1608년에 이조정랑이 되었다가 1609년 6월까지 경상 도사都事를 역임하였다. 1609년에 관직을 버리고 귀향하여 수곡 정사에서 후학 양성에 정진하면서 겸재 하홍도河弘度 등 많은 문하생을 배출하였다. 그의 문학은 치지致知, 역행力行, 우국憂國과 안분安分·관조觀照로 파악 되는 바, 경의敬義에 바탕한 실천적인 학문 태도에서 우러나온 작품들이라 볼 수 있다. 공은 1612년에 60세로 생을 마감하였고 사후에 대각서원에 배향되었으며 공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적비가 낙수암에 있다. 저서로는 송정 문집文集이 있다.
 배위配位 숙인 파평윤씨坡平尹氏는 진사 언례彦禮의 여로 일녀를 두니 조징송趙徵宋의 처妻요,  배위配位 숙인淑人 밀양손씨密陽孫氏는 참봉 천뢰天賚의 여로 삼남 삼여를 두니 남은 완琬 찬瓚 관瓘으로 관瓘은 출후하고 여서女婿는 이육李堉 정지鄭墀 조징기趙徵杞며, 완琬의 남은 자온自溫이요, 찬瓚의 삼남 오녀는 자징自澂 자호自灝, 자혼自渾 및 정세주鄭世柱 강준姜埈 이위李蘤 윤사정尹思正 송정두宋挺斗의 처妻며 관瓘의 이남 일녀는 자겸自濂, 자형自衡 및 노전盧洤의 처妻이고, 자온自溫의 자는 억檍이며 억檍의 자는 세희世熙니 효행으로 정문을 받들었고, 자子는 윤청胤淸이며 그 자子는 달중達中이다.
4. 수긍재공파守肯齋公派
   ◦하천일河天一 1558년 명종 13 - 1601년 선조 34
 
 자字는 태초太初요,  호號는 수긍재守肯齋이니, 호조정랑 면沔과 함안 조정견趙廷堅의 따님인 함안조씨 사이의 차자次子이다. 생원 희서希瑞의 손자이고 증조는 진사로 황간현감을 지낸 형瀅이다. 재종숙부 각재 하항河沆의 문인이다. 
 공公은 1558년 가정 무오년에 태어나 22세인 선조宣祖12년 1579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유일遺逸로 찰방察訪을 지냈으며, 시문詩文에 고묘高妙하고 역학易學에 깊었으며 문집文集이 있다.  1601년 만력 신축년에 세상을 떠났다.
 부인은 안릉安陵 이씨李氏이며, 두 아들을 두었는데, 직장直長 경瓊과 선교랑宣敎郞 장璋이다. 큰아들은 후사가 없고 다만 외동딸이 창녕 성씨인 성황成鎤에게 시집갔다. 둘째 아들은 네 아들을 두었으니 선교랑宣敎郞 자한自漢, 주부主簿 자황自潢, 자회自淮, 자영自瀛이다.
 공이 세상을 떠난 후 송정선생이 그 문고를 편집하여 서문을 붙였는데 지금 전하지 않고 있다. 『송정세과松亭歲課』중 시문들이 여기저기 보이나 겨우 약간편이다. 「칠팔구육설七八九六說」은 주자 계몽의 의미를 깊이 발명한 것이다. 이 또한 부군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일 것이다. 묘소는 진주시 수곡면 효자리 세성산에 있다.
5. 환성재공파喚醒齋公派
  ◦ 하 락河洛 1530년 中宗 25 - 1592년 宣祖 25
 
 자字는 도원道源이요, 호號는 환성재喚醒齋이니 판윤공 유游의 후손이고 생원 진사를 지낸 인서麟瑞의 아들이다. 조부는 집의執義를 지낸 충沖이고, 증조는 진사로 현신교위 의흥위 좌부장左部將을 지낸 응천應千이다. 27세가 되던 해인 1556년 明宗11년 남명南冥 선생을 사사師事하였다. 스승의 지도에 따라 「근사록」을 읽고 주역과 예기를 강론하며 성리학의 철학적 근원과 실천적 원리의 이해에 매진했다.
 39세 때 1568년에 증광시에서 진사進士과 장원을, 생원生員과 1등 2위의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대과의 꿈을 안고 서울로 올라가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바로 왕자사부王子師傅에 임명되었다.
 1584년 율곡 이이李珥와 우계 성혼成渾이 탄핵을 받고 조정을 떠나게 되자 임금께 상소하여 이들의 죄가 없음을 변론하였다. 이때 올린 상소가 「대신소大伸疏」로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전한다. 사림士林이 분열되고 조정이 혼탁해지자 벼슬을 버리고 상주로 내려가 살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상주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당시 상주목사尙州牧使 김해金澥가 상주성을 지킬 계책을 논의하려고 공公을 성으로 불렀다. 선생이 분연히 말하기를, “한번 죽음으로 나라에 보답하는 것이 나의 뜻이다.” 하고는 활을 메고 말에 올라 아들 경휘와 함께 수십 인을 거느리고 주성州城으로 달려갔다. 적병이 갑자기 들이닥치자 선생은 중과부적임을 느끼고 아들을 급히 불러 말하기를, “이곳은 내가 죽을 곳이니 너는 돌아가 집안을 보전하라.” 하였다.
 경휘鏡輝가 울면서 “부친이 이미 죽음을 작정했으니 자식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하고 드디어 동시에 목숨을 잃었다.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자 아버지는 충忠으로, 아들은 효孝로 정표旌表를 입었고, 뒤에 선생은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로 추증되었고, 진주 도동서원道洞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著書는 환성재집喚醒齋集이 있다.
 선생은 후사가 없어 종질을 취하여 양자로 삼았으니 곧 송정 수일受一과 수긍재守肯齋  천일天一의 막내아우인 경휘鏡輝이다. 경휘鏡輝는 생원生員이요 손남孫男 선璿은 주부主簿로 문행이 있다.
 묘소는 진주시 수곡면 사곡 월아동月牙洞에 자좌子坐로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이 지은 갈명碣銘이 있다.
6. 각재공파覺齋公派
  ◦ 하 항河沆 1538년 中宗 33 - 1590년 宣祖 23
 
 자字는 호원灝源이요, 호號는 각재覺齋 또는 내복재來復齋이니 생원 풍원헌豊月軒 하인서河麟瑞의 아들이다. 조부는 집의執義를 지낸 충沖이고, 증조는 진사로 현신교위 의흥위 좌부장左部將을 지낸 응천應千이다. 아버지의 명으로 후계後溪 김범金範에게서 수학하였다. 김범金範은 상주 출신으로, 학행으로 천거되어 옥과 현감에 제수된 인물로 사후에 옥성서원玉成書院에 배향되었다. 이후 1556년에 남명선생을 찾아가 예를 갖추고 스승으로 섬기고 소학, 근사록과 성리학을 익히고 전습함에 남명선생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다양한 서적을 탐독하여 음양陰陽 의약醫藥까지도 모두 섭렵하여 두루 통달하였고 학문과 행실로써 사우들의 추중을 받았다. 스승 남명이 설중한매雪中寒梅 눈 속에 핀 매화 라 하여 인품의 깨끗함을 칭찬했다. 공은 1567년에 생원시에 합격한 이후 참봉에 재징再徵 되었으나, 불취不就하고 과거공부를 접고 오직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1576년 여러 제현들과 덕천서원을 건립하였고. 뒤에 덕천서원 초대 원장이 되었다. 덕천 서원지와 산해연원록을 찬술하였는데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전해지지 않고 있다. 공은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대각촌 각봉 아래로 옮겨 초옥을 짓고 후학 양성에 심혈을 쏟았다. 이로 인해 호를 각재라 하였다. 이때 글을 배운 사람들로는 송정 하수일河受一, 사호 오장吳長, 겸재 하홍도河弘度 등이다.
 각재는 만년에 다시 옛날 살던 곳으로 돌아와 집을 짓고 내복來復이라 명명하고 여기서 생을 마쳤다. 이때가 1590년宣祖 23이니 향년 53세였다. 1610년 대각서원에 배향되고 저서로는 각재선생 문집文集이 있다.
 배위配位는 대구大丘 유씨柳氏 현감縣監 예원禮源의 여식이요, 아들은 경소鏡昭이며 사위는 류덕용柳德龍이다. 임진란 얼마 후에 사림이 대각서원에서 선생을 향사享祀하였으나 지금은 폐지되었다.
 묘소는 진주시 수곡면 응봉鷹峰 자좌子坐이다.
7. 호군공파護軍公派
   ◦ 하 비河備
 증조부 휘 윤구允丘는 문과에 급제하여 부윤府尹을 지냈으며, 조부인 휘 유游는 문과에 급제하고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역임했다. 아버지 휘 지명之溟은 진사로 문과에 급제하고 군수를 지냈고, 어머니는 숙인淑人 재령 이씨載寧 李氏로 안렴사按廉使 일선日善의 따님인데 부덕婦德이 있었다.
 공公은 어려서부터 특이한 자질이 있었으며, 십오륙 세에 이르러서는 시문으로 명성을 크게 떨쳤다. 관직은 선략장군宣略將軍 호군護軍에 이르렀고, 관직에 있을 때 충성과 의리로 스스로를 격려하였다. 단종이 왕위를 물려주었을 때에, 단계丹溪 하위지河緯地 공과 대화를 나누다가 말이 당시의 일에 미치자 강개하여 오열하였고 마침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것이 공公의 평생의 큰 줄거리다. 배위는 영인令人 포산 곽씨苞山郭氏는 의영고사義盈庫使 득종得宗의 따님이고, 3남 4녀를 낳았다. 장남 구천遘千은 생원生員으로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선생과 도의로 사귀었다. 차남 치천値千은 문과에 급제하여 사과司果를 지냈고, 3남 수천受千은 수찬修撰을 지냈으며 외직으로 찰방察訪을 역임하였다. 딸은 이숙정李叔貞, 전맹원全孟元, 정원종鄭元宗, 남치신南致信에게 출가하였다. 구천遘千은 4남 4여를 두었는데 장남 주澍는 현감을 지냈고, 차남 충沖은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집의執義를 지냈으며, 호號를 돈재遯齋라고 하고 점필재佔畢齋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삼남 순淳은 진사이며, 사남 영泳은 벼슬을 하지 않았다. 딸들은 이희적李希績, 손난줄孫蘭茁, 어득호魚得湖, 민여익閔汝翼에게 출가하였다. 충沖의 아들 종영宗嶸은 참봉을 지냈고, 종의宗嶷는 생원시에 합격하여 참봉을 지냈으며 호號는 낙포樂圃이다. 딸은 유방춘柳芳春, 장심張心에게 출가하였다. 순淳의 아들 종수宗峀는 참봉을 지냈으며 영泳의 아들은 종헌宗巘과 종서宗嶼이다. 풍渢의 아들 종악宗岳은 진사進士이고 차자次子는 종암宗嵓이다. 개漑는 종무宗嵍와 종계宗계의 두 아들을 두었으며 딸은 신경심申景深에게 출가하였다.
 1455년 단종 손위로 관직에서 물러나, 진주시 수곡면 정곡 효자리 효동으로 돌아와 은둔하다가 외가가 있는 밀양 대항으로 전거하였다. 처남인 청백리 곽안방郭安邦 공이 누이의 집을 방문하여 대항마을의 지형을 보고 남천강은 마를지언정 대항의 하씨는 무궁하리라南川水盡 河不盡 라고 하였다. 천문, 지리의 학문에 정통하였고 처남인 해남 현감을 지낸 청백리 곽안방郭安邦과 정의가 특히 두터웠다.
 배위의 묘는 진주시 수곡면 효자리 효동 후산 중등에 있다. 서기 1997년 1월 30일에 경상남도 문화재 기념물 42호 조선조 팔각형 고분군으로 지정되었다.
8. 사과공파司果公派
  ◦ 하치천河値千
 자字는 중청仲淸이요, 한성 판윤을 지낸 유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군수를 지낸 지명之溟이고 아버지는 호군을 지낸 비備이다. 어려서부터 재기가 뛰어나고 문장이 일찍부터 드러났다. 젊어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정훈庭訓에 유염濡染하였고, 경의敬義의 참뜻을 갖고 마음에 이회理會할 때까지 많은 학자들과 학문을 논하였다. 벼슬은 별시위 사과司果를 지냈다
 모친은 공인恭人 현풍 곽씨로 삼남을 두었는데 공은 둘째이다. 어려서 자질이 남달라 자라서 학문을 좋아하여 형제들과 책상을 나란히 하여 매진해 예업藝業을 크게 이루었다. 세조조世祖朝에 사과별시위司果別侍衛로 등용이 되고 형과 아우 모두 과거에 올랐으니 당시 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는 명예가 있었다. 공은 이미 출사하여 벼슬길이 열려 있었으나 성품이 강직하여 권세가들을 따라 영합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때 생질인 상국 남곤南袞이 권력을 잡고 여러 번 공을 발탁해 중용하고자 했으나 공이 강력하게 거절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이어 벼슬을 그만두고 몸을 깨끗이 하고자 형과 동생을 따라 점필재 김종직 선생 문하에 들어갔는데 김선생이 외우畏友로서 허락하였다. 이보다 앞서 사직공은 단종이 세조에게 양위하자 그날로 벼슬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와 산속에서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다가 밀양의 대항산의 산수가 빼어나다는 것을 듣고 머물러 살 곳을 정하였다. 이로부터 자손들이 이곳에 우거를 했으나 공은 평상시 항상 고향을 잊지 못하고 말하기를 “진양 땅은 우리 관향으로 여러 대 조상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오래 떠나 있을 수 있겠는가”하고 마침내 가족을 이끌고 수곡 효동으로 돌아와 수년을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마을 뒤쪽 신좌辛坐의 언덕에 장례를 치렀으니 모부인 묘소 아래이다. 부인은 영인 전주 최씨로 공과 쌍분이며 두 아들을 두었다. 장남 풍은 안의현감이며 차남 개는 후릉참봉이다. 장손은 진사 종악으로 일찍이 남명선생 문하에 들어갔는데 남명 선생이 그 재주를 아껴 조카사위로 삼았다.
9. 어모공파禦侮公派
  ◦ 하 백河伯
 문과에 급제하고 한성 판윤을 지낸 유游의 현손이며 초계 군수를 지낸 지명之溟의 증손이고, 할아버지는 저著이며 서천瑞千의 아들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오위도총부 충무위 부사직을 지내고 어모장군에 올랐다. 군졸을 자애하고 위엄으로써 다스리고 적을 방어하여 간사한 적들이 준동하지 못하였고, 성품이 호쾌하고 담백하여 강한 뜻이 충만했으며, 과감하고 강직한 장수였다.
  공公은 사천시 사남면 병둔에서 부父 서천瑞千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재기才氣가 남달랐고 영채映彩가 발월發越하였을 뿐 아니라, 도道를 강구講究할 뜻을 가졌고 벗을 충심으로 사귀고 말은 믿음으로 하여 행동은 생각과 뜻이 고고하였다. 언론이 공손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자연히 경모敬慕하는 마음을 갖게 하였고, 동우와 함께 경의敬義의 설을 가슴에 새겨 학문적 포용력學問的包容力을 길렀다. 자신의 수양과 더불어 고을 학습學習을 교화하는 데 앞장서왔고, 근도近道한 자질을 타고나 부지런히 학문에 전념하였으며, 가정에서는 효우를 다하고 조정에 나아가서는 강직하게 간언하는 기풍이 있었다.
  일남一男을 두었는데 내금위건공장군內禁衛建功將軍을 지낸 구지龜止이다. 구지龜止는 삼남三男을 두었는데 응기應箕는 훈련원 참군訓練院參軍을 지냈고, 응규應奎는 별시위 어모장군別侍衛禦侮將軍이고, 삼남三男은 응회應會이다. 응기應箕는 이남 일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몽일夢日 몽설夢說이며 딸은 정승형鄭承亨에게 시집갔다. 응규應奎는 일남一男을 두었는데 조해朝海이고 응회應會는 이녀二女를 두었는데 최용회崔龍會에게 시집가고 차녀次女는 권대형權大衡에게 시집갔다.
10. 직강공파直講公派
 
  ◦ 하효상河孝祥
 증 순충익조공신 자헌대부 병조판서 행중정대부 전객령 치사 거원巨源의 증손이며, 한림학사 정용낭장 비순위 을숙乙淑의 손자이고, 정용산원 신호위 염濂의 아들이다.  시조 고려 충절신 좌사낭중 증贈 문하시랑동평장사 휘 공진拱辰의 11세손으로, 벼슬은 성균 직강直講을 지내셨다. 장자는 사정司正을 지낸 흔掀이고, 차자는 감찰을 지낸 맹곤孟昆이다. 시대가 멀고 유적을 살필 문적文籍이 없어 상세한 사적事蹟을 알지 못한다.
11. 생원공파生員公派
   ◦하우석河禹錫
 
 증 순충익조공신 자헌대부 병조판서 거원巨源의 6세손이며, 할아버지는 문과에 급제하고 통예문 통찬을 지낸 기용起龍이고, 창신교위 충무위 부사직을 지낸 유鮪의 아들이다. 시조 고려 충절신 좌사낭중 증贈 문하시랑동평장사 휘 공진拱辰의 14세손世孫으로, 생원과에 합격하였다.
 배위는 전의 이 씨로 참군을 지낸 맹명孟明의 여女이고, 2남 2녀를 두었는데 참봉을 지낸 혼渾과 연演이 아들이며 두 딸은 김한손金漢孫, 김해인 허 관許瓘에게 시집갔다. 상세한 사적事蹟은 문적이 없어 알지 못한다.
12. 송강공파松岡公派
 ◦하 항河恒 1546년 明宗 1 - 1580년 宣祖 13
 
 자字는 자상子常이요 호號는 송강松岡이니, 안주목사 우치禹治의 증손이고 조부의 휘는 숙淑이며, 생원生員으로 증贈 순충보조공신純忠補祚功臣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 진평군晉平君 위보魏寶의 아들이니, 시조 17세손이다. 유년부터 독학으로 학문을 닦아 깊고 높은 경지에 이르렀고, 언행이 일치하여 타의 모범이 되었다. 어릴 때부터 부모 섬기는 데 효성이 지극하여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모친상을 당하여 애통함을 이기지 못하고 3년 동안이나 여막에서 죽으로 연명하면서 시묘를 하여 효행孝行으로 주지州誌에 올랐다. 수우당 최영경崔永慶 외 많은 학자들과 도의교를 맺고 학문을 강론하였다. 강가에 집을 짓고‘송강정사松岡精舍’라고 이름 짓고 부귀富貴를 쫓지 않고 만족하며 삶을 다하도록 노닐면서 창주滄洲 ․ 죽헌竹軒과 함께 날마다 더불어 기뻐하였다. 일찍이 산사山寺에서 독서할 때 중이 유도儒道를 업신여기는 것을 보고 화를 내어 그의 책을 불살라 우리 유도를 높이니 남명선생南冥先生이 뛰어나다고 칭찬하였고 지조 높은 선비들이 더욱 우러러 보았다. 저서로는 아버지와 아들 부자의 행실을 기록한 교재록(喬梓錄이 있고, 실기(實記)가 있다.  장사랑 참봉 사옹원 봉사를 지내고 사후 진주 청계서원淸溪書院에 배향되었다.
 배위配位 진양晉陽 정씨鄭氏는 참의 수견受堅의 따님이요 수사水使 은부殷富의 증손이다. 아드님은 휘 인상仁尙인데, 호가 모송재慕松齋이며 광해 계축에 생원이 되고 행의行誼로 종사랑從士郞에 천거되었다. 묘소는 진주 북쪽 대곡면 단목리 북창 유원杻院에 있다.
13. 진사공파進士公派
   ◦ 하 각河恪 1555년 明宗 10 - 1596년 宣祖 29
 
 자字는 자익子益이다. 시조 고려 충절신 좌사낭중 증贈 문하시랑동평장사 휘 공진拱辰의 17세손으로, 증조曾祖 휘諱 우치禹治는 안주목사安州牧使요, 조祖의 휘諱는 숙淑이며 승사랑承仕郞이다. 고考의 휘諱는 위보魏寶니 진평군 증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晉平君贈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이고, 외조부外祖父는 참의參議로 사천 이씨泗川 李氏 휘諱 륜綸이며, 또 한분의 외조부外祖父는 진양강씨 참의參議 휘諱 우佑이다.
  공公은 명종明宗 10년 을묘乙卯 1555년 진주 단목에서 11남 중 삼자三子로 태어나니 유년幼年부터 영오穎悟하여 효제孝悌에 정성을 다하였고 성품性品 또한 온후溫厚하여 자성資性이 뛰어났으며, 뜻하는 바가 정의로워 시세를 근심하니 부조父祖의 기망期望 또한 비범非凡하였다. 선조12년 기묘己卯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合格하여 방명芳名이 진주 연계안蓮桂案에 소연昭然했건만 불의不意의 세란世亂으로 과거를 유보하고 초야에 장수藏修하여 후진을 양성養成하며 오로지 식덕植德에 여념餘念이 없더니, 마침 임란壬亂이 발發하자 안의 북상安義北上으로 피난하여 주야로 고향을 그리워하다가 그만 일질一疾을 얻어 요졸夭卒하니 선조宣祖 29년 병신丙申 1596년이다.
 공公은 의방교육義方敎育에 진성盡誠하였으니 그 적덕積德한 학문의 명성名聲은 백세百世토록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남男 시운始運은 자字 형보兄甫니, 대(臺)를 쌓아 고향 선영先塋을 향하여 망배望拜하며 친족親族을 이산離散하여 살아가는 안타까운 마음을 달래었다. 손孫은 문백文伯이며 증손曾孫은 태윤泰潤, 현손玄孫은 응천應千이다.
14. 참봉공파參奉公派
   ◦ 하 경河憬 1566년 明宗 21 - 1593년 宣祖 26
 
 자字는 경부敬夫요, 호號는 춘당春堂이다. 시조 고려 충절신 좌사낭중 증贈 문하시랑동평장사 휘 공진拱辰의 17세손으로, 증조曾祖 휘諱 우치禹治는 안주목사安州牧使요, 조祖의 휘諱는 숙淑이며 승사랑承仕郞이다. 고考의 휘諱는 위보魏寶니 진평군 증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晉平君贈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이고, 외조부外祖父는 참의參議로 사천 이씨泗川 李氏 휘諱 륜綸이며, 또 한분의 외조부外祖父는 진양강씨 참의參議 휘諱 우佑이다. 
 어려서는 제형諸兄을 따라 강학하였고, 가정의 착한 일에 젖어들어 어진 행동에 감화感化되었으며, 그 가운데서 비록 배우지 않으려고 하여도 배우지 않을 수 없었다. 성취成就한 학문과 재주는 의당宜當 그 뜻을 펼쳐서 이 나라 백성들에게 은택을 베풀어 줄 수 있었는데, 마침 임진壬辰. 정유년丁酉年의 대란大亂이 일어나서 흩어지고 부수어졌다. 자라서는 내암 정인홍에게 가르침을 청하고 제자가 되었다. 공은 천품이 뛰어나고 재기가 탁월하였을 뿐 아니라 순수하고 청렴하였다. 추천으로 사재감 참봉을 제수 받았으나 불취不就하고 뜻을 굳게 가지고 학문을 탐구하고 정진하여 진리를 터득하였다.
 고향인 진주시 대곡면 단목에서 오두막집을 지어 일생을 송시와 독서로 자적하면서 학문을 연마하고 후학 양성에 전념하여 윤리 습득에 심혈을 쏟았다. 공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