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경휘
 
 
      하경휘(河鏡輝) 정려
 
 
河鏡輝 旌閭
소재지: 진주시 수곡면 대천리 대천
 
1562년(明宗 17) - 1592(宣祖 25
자字는 공확(公廓)이요, 호(號)는 매헌(梅軒)이니 생원 인서(麟瑞)의 손자이고 왕자사부(王子師傅 )환성재 낙(喚醒齋洛)의 아들이다.
  공公은 진주시 수곡면 정곡井谷: 지금의 효동에서 태어나 1589년에 생원시에 입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갔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외가가 있는 상주로 잠시 옮겨가 사는 동안 상주성(尙州城)이 왜적에게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상주목사 김해(金澥)가 환성재에게 도움을 요청해왔다. 의사(義士)를 모아 환성재(喚醒齋)는 장정壯丁 20여명을 거느리고 상주성으로 입성하였는데 경휘(鏡輝)도 아버지를 따라 동행하였다. 그러나 상주성 북문에 다다르자 갑자기 왜적을 만났다. 환성재 락洛께서 아들 경휘(鏡輝)를 보고 이곳은 내가 죽을 곳이다. 너는 속히 빠져나가 가족들을 보호 하여라 하면서 아들에게 피할 것을 당부하였다. 경휘(鏡輝)는 아버지가 죽음에 처해 있는데 저 홀로 살아서 어디를 가겠습니까? 하고 통곡을 했다. 이때 왜적이 아버지를 범犯하려 하자 경휘鏡輝는 양팔을 벌려 아버지의 몸을 감싸 막았다. 그러나 왜적의 칼이 부자를 향해 사정없이 날아들어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아버지를 안고 숨져있는 모습에서 진정한 효자의 면모를 볼 수 있었다. 왜적은 그 모습을 보고 탄복하면서 부자의 시신을 수습해 성문 밖에 묻어두고 목판에다 이곳은 효자의 시신이 안치된 곳이라는 표시를 해두었다. 부자의 죽음으로 부는 충을 다하였고 자는 효를 다한 역사가 이 고장에 있게 된 것이다. 이후 조정에서 경휘(鏡輝)에게 정려를 내렸고 삼강록에 전하게 했다. 정려는 상주성 북문밖에 있고 또 하나는 진주시 수곡면에 있다.
이 마을 수곡면 정곡(井谷)을 효자동이라고 하는 것도 또 진주시 수곡에 효자리가 있게 된 것도 모두 이 사실에 연유 한다. 영상(領相)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은 경휘(鏡輝)의 묘갈명(墓碣銘)에 이르기를 “아버지는 죽어서 충이요 아들은 죽어서 효이니 오직 충과 효는 영세토록 수교할 것이라”고 하였다. 저서로 매헌집(梅軒集)이 있다.

1. 정려기(旌閭記 - 水谷)

성균 생원 하경휘(河鏡輝)는 승지 하락(河洛)의 계자이다. 아버지를 모시고 상주에서 평상시 살 때에도 한결같이 고례(古禮)대로 정성을 다하였다. 1592년 왜적 이 상주에 침범하니 부자가 전란에 나가서 적을 만나자 먼저 아버지를 범하거늘 경휘(鏡輝)가 몸으로 아버지를 보호하고 두 팔을 벌려 백도를 막으면서 통곡하니 적은 두 분을 해쳤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하였으며 상세한 기록은 삼강록 효자전에 있다.

旌閭記

孝子梅軒河公鏡輝之旌閭 
成均生員河鏡輝乃承旨河洛繼子也奉父居尙州平居一邊古禮定省不廢萬歷壬辰倭
賊犯尙州遂父子赴亂猝遇賊賊先圮父鏡輝以身衛父子兩手拒白刀哭乞哀賊並害之事聞旌閭詳在三綱錄

2. 정문록(旌門錄 - 尙州)

성균관 생원 하경휘(河鏡揮)는 왕자사부(王子師傅) 증 좌승지(贈左承旨) 환성재(喚醒齋)의 계자(繼子)이다. 만력(萬曆) 임진년에 왜적이 상주에 침입하자 상주목사 김해(澥)가 사부공을 모시고 성을 지킬 계책을 의논하려 하였다. 미처 성에도 들어가기 전에 갑자기 적병을 만났다. 적병이 부친을 해치려 하자 경휘가 몸으로 부친을 보호하고 두 팔을 벌려 칼날을 막으면서 울부짖으며 부친을 살려줄 것을 애걸하였으나 적이 그들을 살해했다. 이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문(旌門)을 세우게 하였는데, 상세한 것은 삼강록(三綱錄)「효자전」에 상세히 실려 있다.

旌門錄

成均生員河鏡輝乃王子師傅贈左承旨喚醒齋洛繼子也萬歷壬辰倭賊入尙州州牧金澥邀師傅公議守城計未及入城猝遇賊先犯父鏡輝以身衛父張兩手拒白刄號哭乞哀賊害之事聞 旌閭詳在三綱錄孝子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