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수암
낙수암
落水菴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542호 2011. 9. 29
소재지: 진주시 수곡면 사곡리  사곡
 
아름드리 장송들이 우거진 속에 넓고 평평한 바위가 골 전체에 펼쳐져 있는데 그 위에 맑은 물이 넘쳐흘러 경치가 아름답기 그지없다. 바위의 꼭대기는 높고 끝은 낮아 흐르는 물이 급류를 이루고 층층이 작은 폭포가 되어 떨어지므로 이름 하여 낙수암落水巖이다. 반석 곳곳에 옛 선비들이 남긴 시구와 글귀들이 이끼 속에 새겨져 있는데 이곳은 송정 하수일 선생이 즐겨 찾아 노닐던 곳이다. 후손들이 계곡 서쪽 산허리에 재실을 세워 낙수암이라 하고 공을 기리고 있다. 낙수암은 4칸 8작 지붕의 재실과 옛 경절사, 그리고 함청헌이 있는 곳이다. 재실은 1566明宗21년 진주목사로 부임한 박승임이 설치한 진주 사재중 하나인 서재西齋-각봉재를 태와공 하필청(1701-1758)이 대각에서 옮겨와 학문정신과 제자를 가르치며 유유자적하게 지내던 곳이다. 1789년 예암 하우현공과 함청헌이 중건하였으며 1909년 사계 하영규공과  극재 하헌진공이 중수하였다. 낙수암의 전신인 진주서재는 진주 진주 서쪽지역 향민의 교육을 위해 지은 교육기간으로 온,ㄹ날 공립학교에 해당된다. 낙수암은 송정공이 벗들과 함께 말을 타고 찾아와 그 경치를 즐겼다는 것을 기문에 남기고 있다. 송정공의 7대손 함청헌 하이태공이 만년에 함청헌을 세우고 거처하면서 자제들을 모아 학문을 장려했다. 함청헌에는 둘째아들 경현이 지은 기문이 걸려있다. 낙수암 입구에는 1995년 송정공의 후손들이 세운 송정선생 사적비가 서있다. 문중의 현안사항은 낙수암 제향일에 제동족의 참여하에 회의에 올려 결정하여왔다. 일제의 강점에 항거한 1919년파리장서의거 때는 동 사안을 의론하기 위하여 심산 김창숙 선생이 사곡을 찾아왔을 때 의거에 참여 하였던 문중대표 하재화 하겸진 하봉수 하헌진등 유학자들이 여기에 모여서 결의 하였던 충국의기의 명소이기도 하다. 사곡마을 낙수암은 그 빼어난 경관과 함께 선조들의 유향이 진하게 어려 있는 유적지이다.
1) 낙수암 기落水菴記
진주 서쪽 방장산 아래 낙수암 이라는 산수가 아름다운 곳이 있다. 파남의 물줄기가 오리쯤 남으로 굽어 흐르다가. 골짜기에 이르러 수십 척의 절벽을 임해선 홀연히 급류되어 쏟아지니 마치 긴 무지개가 허공에 걸린 것 같고 반석이 이를 받치고 있기 때문에 이름한 것이다. 소경왕 십 오년에 우리 선자 송정선생이 종제 동정공과 오월 이공으로 더불어 이곳에 노닐었는데 당시에는 재실이 없었다. 그 후 수 년만에 선생의 오세손 태와공이 각봉 옛 재실을 낙수암 오른쪽 평탄한 곳으로 옮겨 왔으니 그 상량문에 이른바 낙수의 기슭에 자리 잡아 각봉의 재실을 중건하다. 라는 말이 이것이다.
 각봉재는 세상에 전하기를 박소고 승임이 진주 목사시에 창건한 네사재중의 하나로 정랑부군과 내복선생이 재장을 역임하였다 한다. 대저 이 낙수암은 선생이 오월의 은거처로 복지하였으나 이공이 재실을 짓지 않았다는 것은 이 지방 선비들이 모두 아는 바이며 풀밭으로 방치한 지 오래되었다. 이에 경치의 뛰어남을 말미암아 옛 모양을 복원하고 맑은 물 높은 산과 울창한 숲 기이한 바위로 우리 집안 대대로의 이름난 동산으로 삼으니 마치 장씨가 영벽에 살고 이씨가 평원을 지킨 것과 같다. 그 후 누차 흥폐를 겪어 규모가 한결같지 아니하고 이름도 따라서 변하였다. 각봉이 맨 처음 이름이었는데 역락재라 고쳤고 또 뒤에 역락을 고쳐 지금의 이름이 되었으며 옥류거사 이삼만이 편액을 써 문미(門楣)를 치장하였다. 우리 선왕고 함와공이 또 특별히 삼간집을 지어 계상에 우뚝히 안치하였으니 이 암자를 더욱 빛냄이요, 만년에 그곳에서 주역을 읽으며 함청헌이라 이름 하니 또한 옥류거사의 필체이다. 그 북쪽에 고려문하시랑공의 별사가 있는데 선군 묵와공이 처음 지었고 조카 선공감 재곤이 이어 수리하였으며 대종 후손 영규가 사사祀事를 주관하다.
재사가 오래되어 풍우를 가릴 수 없더니 지난 해 섣달 향사를 마치고 제종이 의논하여 말하기를 「이곳은 선조에게 향화를 드리는 곳일 뿐만 아니라 선배들의 아름다운 자취가 세상에 남아 있는 곳이다. 또 오래되어 언제 무너질지 알 수 없으므로 중수하지 않을 수 없다.」하였다. 이에 올 기유년 봄에 목수를 부르고 재목을 운반하여 그 낡은 것을 갈고 완전히 새롭게 하였다. 서쪽에 방 두 칸을 넣어 학생을 거처하게 하니 관선실이라 하고 중앙은 정당으로 그 북쪽을 나누어 제기를 보관하니 추원헌이다. 총 사간으로 그 역사를 주관한 이는 헌진. 영규이다. 가을에 낙성하고 나에게 부탁하여 기문을 지으라 하니 내 늙고 글재주 없기에 잠시 그 시종을 기록하여 뒷사람으로 하여금 상고하게 한다.
                                                  송정공 10세손 용운 기
落水菴記
晋康西方丈山下有號山水往處曰落水巖巴南之水南流屈折五里餘遇壑谷臨數十尺 忽驚湍倒澙若長虹之倚于空而盤石承之故名焉昭敬王十五年吾先子松亭先生與從弟東亭公及梧月李公遊當時未有齋也其後幾年先生之五世孫台窩公移覺峯舊齋于巖之右抱稍平廣地其樑文所謂爰卜落水之麓重建覺峯之齋是也覺峯世傳朴嘯臯承任牧吾州時所刱四齊之一而正郞府君曁來複先生爲齋長云夫斯巖者先生所爲卜梧月菟裘地也而李公不能有齋亦州西士子所共知者而廢置草沒之己久矣至是因地勝而復其舊制使淸流峻嶺茂林亂石爲吾家世守之名園如張之有靈璧李之守平泉其後屢經興替而規制不一名號亦隨而異焉覺峯其始也變稱爲亦樂齋又後改亦樂爲今名玉流居士李三晩
書之額以侈楣間至我先王考涵窩公又別起三架小屋兀然直跨溪上所以羽翼夫庵也晩而讀易其中名之曰涵淸軒亦玉流筆也其北有高麗門下侍郞公別祠先君黙窩公經始之姪子繕工監載崑嗣葺之大宗之後永奎實主祀事蓋義起也庵久而老不庇風雨去歲季冬
之月享事畢諸宗議曰是不惟先祠香火之所虔奉也前輩之懿蹟在是世且朝不慮夕矣不
可以不修廼於今年己酉春召工輦材去其毀而一新之西爲二房以處學者曰觀善室其中
爲正堂而區其北貯以祭器曰追遠軒總四架而五楹幹其事者憲鎭永奎也其秋落其成焉
屬龍運一言以記之余老矣無以文也請姑誦其始終俾後者有考焉可乎是爲記
                                                          十世孫 龍運 記
 
 구경절사
    
구舊 경절사敬節祠는 1804년에 진주시 수곡면 낙수암에 창건 되어 시조공 문하시랑동평장사 하공진河拱辰공의 위패位牌를 모시고 음 12월 15일 사림봉사 해오다가 1868년 원사 철폐령으로 행사를 일시 중지하고 자손 봉사해 왔다.
이후 1992년 진주성지내 충의당내 경절사로 위패를 이안하고 사당은 옛 형태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