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각서원
대각서원
大覺書院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345호
소재지: 진주시 수곡면 사곡리 대각
 
각봉 산기슭에 현자가 숨어 노닐만한 그윽한 골짜기가 대숲과 솔숲으로 둘러져 바람소리 맑은 곳에 서원이 자리 잡고 있다. 진주 지역에서 학문에 뜻을 둔 선비들이 점점 추향할 바를 알게 된 것은 대개 각재覺齋가 선도했기 때문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10년만에 문인과 제자들이 선생을 추모하여 향사를 드리기 위해 일신재 터에 각재서원을 짓고 선생의 위패를 봉안한 것이 1600년의 일이다. 이때 서원 상량문, 사우 봉안서는 송정 하수일河受一이 짓고 봉안문은 사호 오장思湖吳長이 지었다. 이외에 하윤河潤 정대순鄭大淳 조경윤曺慶潤 손탄孫坦 유이영柳伊榮 등의 문인들이 주축이 되어 서원을 짓고 위패를 봉안한 일을 주도하였다. 그 뒤 131년이 지난 영조 13년 1737에 여섯 선생을 추봉하기 위하여 서원을 중건하였다. 이때 봉안된 육현六賢은 무송 손천우撫松孫天佑 백암 김대명白巖金大鳴 영무성재 하응도寧無成齋河應圖 모촌 이정茅村李瀞 조계 유종지朝溪柳宗智 송정 하수일松亭河受一선생이다. 대각서원에 봉안된 7현 선생은 같은 시대 같은 지역에 살면서 문장과 덕업으로 지역사회에 선비정신을 일깨웠던 분들이다.
1813년 후학들이 임진란으로 소실된 7현의 문적을 정리하여 대각 서원 일기를 편찬하였고 그 뒤 1826년에 다시 서원을 중창하였으며 1871년에 서원이 철폐되었으나 광복 후에 지역 유림들과 후손들이 서원을 다시 일으켜 2004년 봄에 경상남도 문화재 제344호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 대각서원은 약 반세기 동안 이 지역 정신문화의 정화를 꽃 피우는 근원으로 작용해 온 것은 실로 이 지역의 자랑일 뿐 아니라 우리 유림의 영광이다.
1) 중수기重修記
서원書院을 지은 때는 만력 경술년萬歷 庚戌年.1610으로 우리 각재선생覺齋先生을 향사享祀하기 위해서이다. 백년이 지난 정사년丁巳年에 여섯 선생을 뒤이어 봉안하니 방이 협소하고 위패位牌가 비좁아 그 규모를 조금 넓혔다. 그 후 백여년百餘年이 지난 지금 들보는 좀먹어 기울어지고 기둥은 썩어 부러졌다. 이에 부노父老 들이 개탄하며 가군家君에게 촉탁하여 대책을 세우게 하니 드디어 약간의 재물을 내어 해마다 이자利子를 모았다. 하루는 가군家君이 한숨 쉬며 탄식하여 말하기를, 만일 경비가 충분히 마련되기를 기다리다간 존엄尊嚴한 자리를 수호하는 도리에 결함이 생길 뿐만 아니라 수명壽命이란 기약이 없어 심력心力을 같이 하던 군자들도 왕왕 세상을 떠날 것이다. 그러므로 충분함을 기다리다 혹 후회를 남기기보다는 지금 이를 도모하여 몸소 수고로움을 감내하고 성대한 의용儀容을 직접보아 부노父老들의 추모하는 정성에 답하는 것이 났다고 하였다.
이에 병술년丙戌 중추中秋 위패位牌를 강당講堂의 동재東齋로 옮기고 계추季秋에 비로소 착수하여 중동仲冬 22일 초석礎石을 세우고 4일 후 계묘일癸卯日에 상량上樑하였다. 다음해 계춘季春 공사를 마치니 위로는 묘당廟堂으로부터 아래로 신문 주주酒廚 새문塞門 전청典廳에 이르기까지 동시에 새로워졌다. 대개 들보와 기둥과 서까래는 옛 것을 버림이 십十에 팔구八九로 그 공사를 돌아보건대 새로 짓는 것 못지않았다. 이에 참으로 이른바 꿩이 날을 뜻한 처마와 새가 솟을 뜻한 마룻대, 竹田 같은 터전에 송림松林 같은 풍채, 시원한 정원에 정연한 담장이였다. 정녕 임사任使가 적합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어찌 이리 완공이 신속하고 그 아름다움을 모두 갖출 수 있었겠는가!
유장柳丈 점坫과 아누 응현膺賢이 그 업무를 담당하고 성모成某 이모李某 조모曺某가 그 역사役事를 맡았으며 하모河某가 그 비용을 조달하였으니 드디어 맹하孟夏 중정일孟夏仲丁日에 봉안체奉安禮를 행하고 잔치를 열어 락성落成하였다.
아! 우리 각재선생은 조예造詣가 순정純正하여 이미 상등지위上等地位에 올랐다. 남명자는 설중환매雪中寒梅라 칭찬하였고 수우옹守愚翁은 사상백로沙上白鷺라 찬탄하였으니 지금 미루어 상상컨대 그 기상이 눈앞에 보이는 듯하다. 무송선생撫松先生은 인사人事를 배워 천명天命을 달통達通함과, 백암선생白巖先生의 문장과 행실, 영무성선생寧無成先生의 고매 순수함과, 모촌선생茅村先生의 의기 떨쳐 난亂을 바로잡음과, 조계선생朝溪先生의 왕도王道를 귀히 여기고 패도覇道를 천하게 여김과, 송정선생松亭先生의 정심精深한 학문에 이르러는 마땅히 백세토록 향사하며 후학의 존모尊慕가 오래될수록 더욱 깊어 스스로 그만두지 못함을 오늘의 역사役事로 보건대 더욱 징험 할 수 있다.
오늘 이후로 무릇 우리 동지들은 그 시詩를 읊고 글을 읽으면서 사숙私淑하여 스스로를 새롭게 하는 도리로 삼고 또 원우院宇를 수리하는 일은 반드시 금일 수군자數君子로써 기약한다면 어찌 선인先人의 뜻과 사업을 계승하는 아름다움이 아니겠는가! 시문記文을 지을 소임은 나같이 글 못하는 이가 감당할 일이 아니지만 돌아보건대 이 역사役事의 전말顚末을 상세히 아는 이는 나만 같은 이가 없기에 갖추어 기록한다.

重修記
院之設在萬歷庚戌爲俎豆我覺齋先生也越百年丁巳追躋六先生而室狹位窄稍廣其
制距今百有餘載樑蠹而頹棟朽而橈於是鄕父老慨然屬我家君經劃之遂辨出若干物遂歲取嬴一日家君喟然歎曰如或俟其贍不惟尊嚴之地有欠衛護之道疑要壽無期同
心同力之君子往往零落則與其待贍而或致有悔曷若及令圖之躬執其勞目覩盛儀而以答鄕父老慕賢之誠意哉玆於丙戌仲秋移奉位版於講堂之東齋以季秋經始之仲冬
之二十有二日竪礎越四日癸卯抛樑翌年季春工役告訖上自廟宇下至神門酒廚塞門
典廳同時俱新盖樑棟榱桷之去其舊者十居八九顧其爲工不下新創信所謂翬飛鳥革竹苞松茂而噲噲之庭井井之垣者矣苟任司之非其人則鳥可成之速而盡其美哉柳丈坫卯君膺賢實摠其務成某李某曺某董其役河某調其用遂以孟夏之仲丁行奉安禮而設讌以落之鳴呼若我覺齋造詣純正己到了上面地頭而南冥子雪中寒梅之稱守愚翁
沙上白鷺之贊至今追想如見其氣像至於撫松先生之下學上達白巖先生之文章行誼寧無成先生之淸高純粹茅村先生之奮義料亂潮溪先生之貴王賤覇松亭先生之學問精深俱宜廟食百世而後學之尊慕愈久愈深不能自己者觀於今日之役益可驗矣自今以往凡我同志者誦其詩讀其書以爲私淑自新之道而其於院宇修葺之事亦必以今日數君子自期焉則亦豈非繼志述事之至懿乎至若記事之責非不文所可承當而顧詳其顚末於此事者或莫如景賢故爲備錄焉
                                                           後學河景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