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천재竹泉齋
13. 죽천재竹泉齋

죽천재
소재지; 진주시 대곡면 단목리 단목 733번지
 
   본 재실은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진평군 하위보河魏寶 공의 10남 단주공 하변河忭의 제향을 올리는 재실이다.
죽천재라 함은 대나무의 푸른 절개와 샘물의 기상에 비유한 것이다. 본 재실은 향원向源공께서 약간의 종중재물을 저축하여 중년에 사칸 집을 지어 죽천재라 명한 것은 그 뜻이 죽림竹林이 푸르고 푸른 절개와 샘이 시지 않고 흐른다는 뜻으로 선생의 높은 절개와 맑은 기상에 비유 하였다.
후일에 재실이 노후 되어 양자 간 아들 재정씨가 아버지의 뜻이 없어질까 두려워하여 자금을 출연하고 집터를 자기 집 가까이 죽림 밑에 정하여 새 재목과 새 기와로 사칸 집을 지었다. 위로는 선부조의 한스러운 마음을 위로하고 아래로는 후손들의 뒤를 열어주는 도리를 다한 그 정성이 아름답게 여겨진다.
 
죽천재 기
우리 고을 문물이 성함에 예나 지금이나 단목을 칭송한 것은 우리 하씨가 들어가 산 지 오백년이 되었고 큰 벼슬아치와 큰 선비가 많이 났기 때문이다. 자손들도 번성하여 집들이 즐비하게 연하였는데 타성 하나 사는 이 없고 또 각 파의 재실이 많이 빛나게 하여 동네 모양이 성함이 다른 문중보다 우월하였다.
 중저조中著祖의 휘 위보魏寶는 생원으로 자헌대부 이조판서와 진평군의 군호를 받았고 십일 남을 두었는데 두 아들은 일찍 죽고 세 아들은 무후하였다. 여섯 아들은 모두 후손이 있어 이 마을에 같이 살고 모두 문장과 덕행과 벼슬로 이름이 드러났다. 단주선생 휘 변忭은 선조 임진란에 열일곱의 나이로 일본에 납치되어 가 이십일 년을 억류당하였으나 그 본뜻을 굳게 지켜 돌아왔으니 그 곧고 굳센 절개는 가히 한나라 소무에 비유하여도 손색이 없다. 여기에 살고 있는 후손이 번성하지 못하고 대대로 청빈하게 살고 있으나 집을 엄하게 다스리는 것과 선조를 정성으로 받드는 것과 몸가짐을 돈독히 하는 것이 진실로 고가의 법도가 있었다.
 일찍 선생과 그 아들 생원공을 위하여 재실을 마련코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후손 향원씨가 고생으로 약간의 종중재물을 저축하여 중년에 사칸 헌집을 사서 죽천재라 명한 것은 생각건대 그 뜻이 대의 푸르고 푸른 절개와 샘이 쉬지 않고 흐른다는 뜻으로 선생의 높은 절개와 맑은 기상에 비유하였다. 집 지은 지 오래되어 가히 오래 유지할 수 없으므로 양자 간 아들 계정啓正씨가 아버님의 뜻이 없어질까 두려워하여 힘써 농사지어 절용하여 모은 지 수 십년에 뜻을 이루어 집터를 자기 집 근방 깨끗하고 좋은 죽림 하에 정하고 모두 새 재목과 새 기와로 사 간 집을 지었으니 그 규모의 치밀함과 제도의 화려함이 참으로 좋은 집이 되어 족히 백세라도 재계하고 잠자고 후손들의 글공부할 장소로 마땅하도다. 이에서 볼 때 다른 문중의 재실과 뒤떨어지지 않고 위로는 선부조의 한스러운 마음을 위로하고 아래로는 후손들의 뒤를 열어주는 도를 다하였은즉 그 정성이 어찌 아름답지 아니하랴 어느 날 그 문중 동생 계천啓千을 보내어 동근東根에게 기문을 청하거늘 내 이미 그 상량문을 지었은 즉 어찌 이 일을 사양할 수 있으랴? 가만히 생각건대 뜻이 있는 사람은 일을 마침내 이룬다 하더니 지금 계정啓正씨에게서 보았도다. 구차하게 녹녹히 돈을 모으려고 하는 마음이 없고 힘써 농사 지어 절용하여 날로 모으고 해로 모아 이에 큰일을 이루었으니 어찌 선조를 위하는 독실한 정성이 있지 아니하고 능히 그러하였으랴? 마땅히 이에 조석으로 거처하여 선조를 높이고 일가 화목하는 도리를 강구하고 재계하고 옷을 갈아입어 계시는 뜻한 정성을 이루었은즉 공적이 큰 조상의 영령이 매우 기뻐하고, 어찌 날마다 후손을 돕지 않겠는가! 대저 수호하는 일은 황주 죽루기문에 말하지 아니 하였던가 뒷사람이 나를 더불어 뜻을 같이하여 이어가며 수리한즉 이 누樓가 썩지 아니할 것이라
하였으니 계정啓正씨 같은 치밀한 효성으로 어찌 이어갈 어진 후손이 계속하여 남아 있지 아니하랴! 그러한즉 이 재실의 수壽가 가히 다함이 없을 것을 기약할 것이다. 이것으로써 기문을 하였노라.
                                                   성균관 전의 동근 근기
竹泉齋記
吾鄕文物之盛古今稱丹牧者吾河奠居五百有年而巨鄕鴻匠輩出子姓蕃衍棟宇櫛比一無他姓之居而又有各派之丙舍炳炳輝煌村樣之盛右於他門也中著祖諱魏寶生員贈資憲大夫吏曹判書晋平君生十一男而二男早夭三男無后六男有后同居是洞而皆以文行仕宦著丹洲先生諱忭穆陵丁酉年十七拉去日本滯留二十一年而固守素志以還其貞固之節可擬於漢之蘇中郞亦無欠也後孫之居於是者不甚蕃而世食淸貧制家之嚴奉先之誠持身之篤寔有古家典型也嘗欲爲先生曁子生員公之丙舍而未遑後孫向源氏喫苦積資中年購四間屋爲竹泉齋者抑其義竹之靑靑之節泉之混混之義比於先生之高節淸像也歲久屋老不可以久爲維支故出后允子啓正氏懼先志之湮没力農而眞積力久者數十年竟得志而相地于宅近塽塏竹林之下摠以新材新瓦重建四架屋其規模之緻密制度之宏麗甚傑閣而足爲百世齋宿肄業之所也於是乎不下於他門之齋舍而上慰先父祖齎恨之心下爲裔孫裕後之道則其誠豈不韙哉日送其門弟啓千問記於東根旣爲其上樑文 則惡可辭諸窃惟有志者事竟成矣今於啓正氏觀之也苟無有碌碌理財之心而力農節制
日積歲積乃成大事惡無有爲先之篤誠而能然乎哉當爰居朝暮講敦尊祖睦族之道齋明盛服以致如在之誠則烈祖之英靈悅豫洋洋而豈不曰余有後乎及夫守護之事則黃州竹樓記不云乎後之人與我同志嗣而葺之則庶斯樓之不朽也以若啓正氏之孝思綿綿安無有繼述之賢裔鱗出耶然則斯齋之壽可期無窮矣是爲記爾       
                         歲光復後初戊辰臘月下澣族後孫 成均館典儀東根謹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