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추정望楸亭
28. 망추정望楸亭

소재지 : 진주시 금곡면 검암리 운문
 
  정자亭子는 금곡면 검암리 운문마을 안쪽에 있다. 앞으로는 큰 연못이 있고 뒤로는 송림이 우거진 산이 있다. 대문을 지나 마당으로 들어서면 정면에는 운수당雲水堂, 영모재永慕齋라는 편액이 달린 건물이 보이고 그 왼쪽에 망추정望楸亭이 있다. 처음엔 승지공께서 어버이를 우봉곡에 장사지내고 그 아래에 우모寓慕하는 집으로 망추정을 지었고, 참판공께서 어머니를 장사지내고 읍추헌을 세웠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고 거리가 멀어 재실이 훼손되어 무너졌다. 그러다가 승지공承旨公 하천서河天瑞와 아들 참판공參判公 경호慶灝를 추모하는 재실齋室로 후손들이 1939년에 우봉牛峰 옛터에 다시 지은 것을 1990년대에 현 위치로 옮겼다.
 건물은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목조 팔작지붕의 기와집이고, 왼쪽으로 마루가 두 칸, 오른쪽에 방이 한 칸으로 추모재追慕齋라는 편액을 또 달았다.
건물 안에는 1940년 안동인安東人 송산松山 권재규權載奎가 지은 “추모재기追慕齋記”가 있다. 그리고 처마 밑에는 강동호姜東瑚가 쓴 ‘망추정望楸亭’이라는 해서체의 대자大字 편액이 걸려있다.      

 1) 망추정 기
 하씨河氏가 사는 진주 남쪽 운문에는 효도하고 우애하며 옛것을 숭상하는 이
가 많고, 세상에 초연하였다. 준호峻鎬, 해룡海龍 두 사람은 나와 가장 친했는데, 하루는 인곡산仁谷山 거처로 와서 청하기를, “우리 선조 승지공께서 일찍이 선고 별제공과 선비 파산이씨를 우봉곡牛峰谷에 장례하고 인하여 망추정을 지었고, 공의 아들 참판공 또한 공과 선비 전의이씨를 여기에 장례하고 읍추헌泣楸軒을 만들었다. 그 후 300년이 지나 망추정과 읍추헌이 황폐해져 전해지지 않는다.” 라고 하였다.
 무인년 1938년 겨울 여러 일족이 모여 의논하기를, “우리 선조는 충효가 있는데, 추모할 집하나 없으니 후손으로서 수치스럽다.” 라고 하고, 드디어 참판공 묘 아래에 땅을 골라 기묘년 1939년 봄에 일을 시작하여 여름에 준공하였다. 재실이 모두 삼 칸인데, 당堂이 두 칸, 방이 한 칸인데 추모재追慕齋로 편액을 붙이며 한 해 한 번씩 재명齋明하는 장소로 겸하고자 하였다. 제족諸族이 모두 “선생의 글로써 현판을 걸기를 원하니 사양하지 마십시오.” 하고 두 선조의 사적事蹟 문서를 보여주었다. 살펴보니, 승지공은 휘가 천서天瑞이시고, 참판공은 휘가 경호慶灝이셨다. 선조 때 임진왜란을 당하자, 승지공은 전생서 참봉으로서 분연奮然히 동지들에게 격문檄文을 보내고, 진주로 달려와서 관군官軍을 기다렸다. 초유사招諭使 학봉鶴峰 김공金公이 듣고 격려하며 그의 방책과 전략을 들었다.
 공이 무리들과 함께 정성을 다하여 혹은 위력을 떨쳐 세勢를 보이기도 하고, 혹은 수고로움을 무릅쓰고 적의 소굴을 무찌르기도 하며, 매번 나아가 이기고 돌아오니 학봉鶴峰은 반드시 그 공로를 공에게 돌렸다.
 참판공 역시 선전관 훈련부정으로 황해도와 평안도의 진지陣地에 가서 왕명王命을 받아 전력을 다하여 수차 전공戰功을 세웠으며, 임금이 의주로 몽진할 때는 왕명으로 선봉이 되어 좌충우돌하며 피난길을 편안하게 하였고, 통군정
統軍亭에 이르러서는 별초관別抄官으로 왕명을 받고 분전하여 적을 죽이니, 사방 50 리에는 적들이 감히 아군 진영을 엿보지 못했다.
 내가 가만히 생각해보건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는 우리나라의 위기가 극에 달했으나 끝내 요기妖氣를 깨끗이 소탕하고 다시 나라를 세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비록 서너 명의 장수將帥와 재상宰相의 공功이라고 하지만, 만약 충의지사가 미미한 관직을 염두에 두지 않고 곳곳에서 봉기하여 몸을 돌보지 않고 나라를 위하여 공公의 부자父子와 같이 행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어찌 그렇게 이룰 수 있었으랴? 충의로  나라를 보장하는 것이 성지城池와 창칼보다 나은 점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아, 위대하구나! 다만 생각건대, 충의에는 본말이 있으니, 효제孝悌하지 않고 서도 충의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지 않는다. 대체로 충의와 효제의 일은 달라 보이지만 도리는 같은 것이다. 이제 공公의 부자父子를 보니, 망추정과 읍추헌을 선영先塋 아래에 두고 함께 망추望楸와 읍추泣楸로 편액을 한 것으로 보아 가히 짐작할 수 있겠다.
 공公이 집에 있을 때 효제孝悌의 실상이 있었으니, 공의 후손들은 선조가 남긴 아름다운 일을 생각하여 효제의 도리를 더욱 독실하게 한다면, 비록 이 변화가 심한 세상이라도 그 몸을 지키고 그 가문을 보전할 수 있어 다른 길로 빠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 뒤에야 이 재실이 오래갈 것이고, 재명齋明할 때도 예禮를 극진히 하여야 재실 편액의 뜻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이 골짜기 안에 여러 대代 선조들의 묘가 많으나 일일이 들어 말할 수가 없다.
                    경진1940년 3월 하한下澣 안동安東 권재규權載奎 삼가 지음
望楸亭記
河氏之居晉南雲門者多孝友尙古不囿於世峻鎬海龍二君與不佞最相善一日造仁谷山居而請曰我先祖承旨公嘗葬其考妣別提公曁巴山李氏於牛峰谷因作望楸亭公子參判公又葬公曁妣全義李氏於此以泣楸爲軒厥後歲經三百亭與軒廢而無傳戊寅冬僉族相與謀曰以吾祖之有忠孝而迄無一舍之爲寓慕後孫恥也遂相地於參判公墓下 役於己卯春而粤夏告竣齋凡三間堂二室一扁之以追慕盖欲兼爲歲一齋明之所也諸
族咸願得吾子文以揭楣幸無辭因亦其兩祖事狀按承旨公諱天瑞參判公諱慶灝當宣廟壬燹承旨公以典牲署參奉慨然檄諭同志馳入晉州以待官軍招諭使鶴峰金公聞而獎之聽其方略公推誠與衆或張威示勢或乘勞搗穴每晉捷至鶴峰必推功于公參判公亦以宣傳官訓鍊副正赴兩西陣稟制效勞屢立戰功及上西遷被召爲前鋒左衝右突蹕路坦砥至統軍亭別抄官承命奮戮四方五十里賊不敢窺陣不佞竊以爲壬丁之燹我國之危極矣然終至掃滌妖氣 再造區宇此雖數三將相之功而若非忠義之士不以官微在
在蜂起忘身爲國如公父子之爲者烏能致然哉於以見忠義之爲保障於國有愈於城池干戈也 嗚呼偉矣第念忠義有本末 有不孝悌而能之者盖忠義與孝悌事雖異而道則一也今觀公父子置亭與軒於親塋之下而俱以望楸泣楸爲扁因可以想得公在家而有孝悌之實矣惟公之後孫其克思先祖遺徽而益篤孝悌之道則雖此滄桑之世而可以守其身保其家不至綸胥之歸矣然後斯齋也可以久而祭時之齋明亦克盡其禮庶不負齊扁之意也夫谷中多累世先墓不能一一於擧云
                                          歲庚辰三月下澣 安東權載奎謹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