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호재金湖齋
32. 금호재金湖齋

금호재金湖齋
소재지 : 경상남도 진주시 금산면 용아리 용심
 
   금산에서 문산 가는 길로 금호琴湖 못을 둘러 못이 끝나는 지점에서 왼쪽으로 들어가면 용심마을인데, 동네 가운데 높이 솟은 재실이 나온다. 금호재金湖齋이다. 이 재실은 운수당공 후손들이 그 선대 통덕랑 금호공金湖公 휘 명정命禎 이하 3대를 우모寓慕하고 재숙齋宿하는 곳으로 삼기 위해 종장宗丈 도주道柱의 지도 아래 종손 만규 이하 전 종원이 갹출醵出하여 세운 집이다.
 
1) 금호재기
   진주의 하 씨는 그 선대가 고려 현종 때 증문하시랑동중서평장사 휘 공진拱辰이신데, 이후 명망 있는 사람들과 벼슬 높은 사람들이 배출되어 나라의 망족望族이 되었다. 후손 운수당雲水堂 휘 윤潤은 일찍 생원과 진사에 입격入格하고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과 홍문관의 청요직淸要職을 거쳤고, 학덕이 사림의 태두泰斗가 되어 정강서원 아홉 현사賢士의 반열에 올라 배향되셨다.
 10세손 통덕랑 금호공金湖公 휘 명정命禎께서 아들 통덕랑 휘 일溢, 손자 휘 석천錫千과 함께 운문 세장지에서 대여촌 용심으로 이거移居하셨으니, 대체로 이곳에 문행文行이 뛰어난 선비가 많고 석인碩人들께서 지나다니는 곳이기 때문이다. 후손들이 어질고 조심성이 있으며, 언행이 예의바르고 근면·검소하여 대가大家의 풍도와 가범家範과 신의信義을 잃지 않았다. 아름다운 지초芝草와 맛좋은 샘물은 근원이 있음을 알아 항상 중조中祖세 분을 위해 재실 하나를 짓고자 하여 계속 힘썼으나 겨를을 갖지 못하여 항상 어진 보살핌 아래에 울고 싶었다.
 지나간 갑술년에 일족이 한 곳에 모여 말하기를, 우리 하씨가 이곳에 거주한 지 수백 년이 지났는데, 아직 재실 한 채 없으니 그것이 옳은가? 하니, 모두가 기꺼이 응답하여 즉석에서 약간의 자금을 갹출醵出하였다. 거주지 용심龍潯 양달에 상의하여 터를 잡고 약간의 금전으로 땅을 조금 사서 정지整地하고 초석礎石을 놓았고, 목공과 재목을 구하여 을해년 봄에 일을 시작하여 정축년 가을에 마쳤으니 삼년이 걸렸다. 재실은 사칸 집으로 가운데 마루를 두어 제사를 받들고 좌우에 방을 마련하였으니 검소하면서도 넉넉하여 알맞다. 문루門樓 세 칸을 이어 지었으니 우모寓慕하고 재숙齋宿하는 곳으로 충분하다.
 후손 만규, 도주, 병규, 영원, 병준 군이 그 기문記文을 나에게 청하니 감당할 수 없어 사양했으나 들어주지 않아 말하기를, ‘여러분들 선조를 염려하지 말고 선조의 덕德을 발양發揚하라. 하씨 여러분들이 선조의 의행懿行과 청덕淸德을 잊지 않고 여러분 삶에 부끄러움이 없다면 선조의 뜻을 잇는 도리를 다했다고 할 수 있으니, 어찌 서로 힘쓰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것을 기記로 삼을 따름이다.
                      1997년 정축 동지절 성균관전의 창산 성환덕 삼가 씀
金湖齋記
晉康之河氏其先高麗顯宗朝贈門下侍郞同中書平章事諱拱辰自後名流巨卿軰出爲國望族後孫雲水堂諱潤早中生進文科登第歷藝弘文兩館淸要學德爲士林之山斗故聯享鼎岡書院九賢之列十世孫諱命禎通德郞金湖公與其子通德郞諱溢孫諱錫千自雲門之庄移于代如村之龍潯盖地多文行之士正宜碩人過軸之所也後孫淳謹雅飭勤儉爲生不失大家之風範信知靈芝醴泉有根源也常欲爲其中祖三公肯構一齋也力綿未遑常欲泣於仁覆之下往年甲戌一族會于一處而言曰吾河居于此地者已數百年所而尙無一舍其
可乎皆樂爲之應卽席遽出若干資相地于所居龍潯之陽若干金買收若干坪整地列礎募工鳩材着手而役始於乙亥春迄于丁丑秋閱三年月日也齋凡五楹四架而中爲廳爲祭室左右爲室儉奢適中門樓三間隨而成足爲寓慕齋宿之所也後孫萬奎道柱炳奎榮元炳準君請其記文顧余不敢當辭不獲曰無念爾祖聿修厥德河氏諸彦不忘先祖之懿行淸德無忝爾所生則可以爲能盡繼述之道矣盍相與勉旃是爲記耳
                                      丁丑冬至節成均館典儀昌山成煥德謹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