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횡마을
 
월횡 마을
 
 
 
하동군 옥종면 월횡리
 마을 뒤 월봉산(月峯山)을 정면에서 바라보면 영판 십야월(十夜月)같아 마을 이름이 월횡(月橫,月恒)일 것이라 한다. 청암의 오대산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회신․궁항․위태의 3개 골짝 물을 모아 경사진 협곡 10여리를 쏜살같이 달려오다가 도덕골의 효자도(孝子渡)에 이르면 이곳 지명에 놀라 기(氣)가 꺾인 듯 순하게 흐르기 시작하여 월봉산 아래에서 잔잔한 호수처럼 변한다. 석양 무렵 이 호수에 비친 월봉산영(月峯山影)을 보노라면 그야말로 산수가 잘 어우러진 명승(名勝)이요 명당(明堂)이다. 이조 중엽 하대관(謙齋의 曾孫)의 문집에 의하면, 월횡교 남쪽 산자락 일대 3000여 평에는 대수(大樹) 천여 그루가 우거져 경관이 매우 아름다웠는데 이곳에 대수정(大樹亭)이 있어 경절공 하숙보 장군․ 장령공 하계보․ 지평공 하 충․ 겸재공 하홍도 등 하씨(河氏)의 여려 명현(名賢)들이 즐겨 놀던 곳이라 하였다. 이후 이곳 월횡 출신 명현(名賢)들이 월촌(하달홍), 월고(조성가), 월주(하조헌), 월포(정광익), 월산(조성주) 등 ‘월(月)’자(字)를 넣은 호(號)를 많이 사용하였는데 이처럼 월횡인(月橫人)들은 “달 속에서 나서 달 속에서 살다 간다” 하였다. 동리 앞 도로변을 택거리(大巨里)라 하였는데 진주‧ 단성‧ 하동으로 가는 삼거리로 일제시대 까지는 이근처의 산물(産物)이 모여드는 교통의 중심지였다.
 세종 갑인년(세종16년,1434) 당시 6진 개척 대업(大業)이 시작되던 첫해에 김종서가 함길도관찰사로 파견되고, 함길도 도절제사로 10년(1422~1432)간이나 연임했던 양정공(襄靖公)께서 함길도 도체찰사로 파견되어 임지에서 북방개척 대업(大業)을 진두지휘하고 있을 때, 양정공의 독자(獨子)이신 강장공도 무장(武將)이 되어 야인 침노의 길목인 회령진의 첨절제사로 용맹을 떨치고 있었다. 이해 12월 영북진 절제사 이징옥이 회령진을 맡게 되어 강장공은 영북진 첨절제사로 전임(轉任)되게 되었다. 회령진을 무사히 방수한 공로로 전임(轉任) 직전 잠시 고향을 들릴 수 있는 기회를 얻었는데, 이때를 전후하여 거주지를 양정공의 탄생지인 사곡리(싹실)에서 덕천강을 건너 운곡의 월횡으로 이거(移居)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이거(移居)사유를 정확히는 알 수는 없으나, 이곳에서 멀지 않는 청암면 궁항리에 오대사(五臺寺)라는 유명한 큰 절(寺刹)이 있었는데 호정 하륜 선생이 소시(少時)에 이 절에서 숙식하며 학문을 닦아서 현달하게 되었다고 소문나 그후로 진주의 자제 수십 명이 이 절에 와서 독서하면서 당시 진주 향교를 능가하는 학문의 요람으로 이름나 있었고, 또한 이곳에서 가까운 두방의 우방산도 고려 현종 때 강감찬 장군과 함께 귀주대첩의 신화를 창조했던 강민첨 장군이 진주 개경향(開慶鄕)에서 탄생하였으나 20세에 터를 잡아 원당(願堂)을 짓고 43세에 등과할 때까지 23년간 학문과 무예를 닦은 곳으로도 유명하였는데, 무반가(武班家)로서 자손들은 무예 뿐 만 아니라 학문까지 겸할 수 있는 길지(吉地)를 물색하던 양정가(襄靖家)는 오대사(五臺寺)와 우방산이 가까운 월봉산 아래를 명당(明堂)으로 여겨 이거(移居)하였다고도 전하고 있다.
 이곳 월횡에서 강장공의 네 아드님들은 월봉산을 오르내리면서 무예를 연마하고 학문에 매진하엿는데, 장자(長子)와 중자(仲子)는 음직으로 각각 선교랑과 종사랑이 되었으며, 숙자(叔子) 경절공(휘叔溥)은 무과에 급제하여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올라 가통(家統)을 이었으며, 계자(季子) 장령공은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장령에 올랐고, 또한 양정공의 조카 지평공(참의공의 獨子, 諱.漴)도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
 강장공이 월횡을 정주지(定住地)로 택한 이래 경절공, 장령공, 지평공이 등과(登科)하게 되어 양정가(襄靖家)는 문‧무(文武)의 명문가(名門家)로 가격(家格)이 더욱 신장되었으나 16세기 초에 연산군의 난정(亂政)을 만나면서 양정가(襄靖家)는 중앙의 정치무대에서 멀어져 이곳 월횡에서 은둔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후 장령공의 세분 아드님 중 장자(諱,應)는 월횡에서 대(代)를 이었으나, 중자(仲子-諱,順)는 사천 고자실로, 계자(季子) 사정공(諱,恒)은 단성 중촌으로 이거(移居)하게 되어 월횡에서의 문세(門勢)는 점차 약화되었지만 양정가의 세거지가 사천과 산청 등지로 확대되었다.
 17세기 초 찰방공(諱,遵海)의 등과(登科)로 중흥의 기틀이 마련되면서, 19세기 중엽에는 월촌공(諱,達弘)이 학문이 높아 모한재(慕寒齊)에서 많은 후학(後學)을 지도하고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등 거유(巨儒)들과 교유하게 되어 양정가는 문한가(文翰家)로서 가격(家格)이 크게 신장되었다. 19세기 후반에는 이곡공(諱,仁壽)과 월주공(諱,祖憲)이 월촌공의 학문을 이었으며, 20세기 초에는 백촌(諱,鳳壽)선생이 학문과 문장으로 이름을 크게 떨치게 되면서 양정가를 더욱 빛나게 하였으나 이후 후손들이 다른 지역으로 이거(移居)하면서 월횡에서의 문세(門勢)는 점점 약화되었다.
 1780년경 함안조씨가 월횡에 입거(入居)하여 19세기 중엽에 월고 조성가 ․ 횡구 조성택 ․ 월산 조성주 3형제가 학문과 부(富)로 번성하였고, 1830년경에는 해주정씨 농포가문의 월포 정광익이 입월횡(入月橫)하여, 조씨와 정씨 두 가문이 월횡에서 번성하게 되었다. 이후로 진양 하씨 양정가(襄靖家)의 후손들은 차차 월횡을 떠나 인근(隣近)으로 이거(移居)하게 되면서 월횡에서의 양정가의 문세는 급격히 약화되었다.
 월횡이 양정가(襄靖家)의 450년 세장지(世莊地)였다는 것을 기리기 위해 20세기 중엽 후손들이 양정공의 사우(祠宇)를 이곳 월횡에 이건(移建)하여 경현사라 명하고 사우(祠宇)앞에 도천서당을 세웠다. 산업화 이후 양정가의 후손들은 거의 월횡을 떠나 현재는 안계(安溪)를 비롯한 인근(隣近)의 후손들이 도천서당을 관리하고 있으며, 지역 유림들과 후손들이 경현사에서 매년 음력 3월 20일 춘향을 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