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천서당기道川書堂記
도천서당기道川書堂記
 
 하씨河氏가 진양에서 대성大姓이 된 지 오래이다. 조선 초에 벌열閥閱이 성盛하였는데 양정공襄靖公 세가世家를 최고最高로 일컬었다. 양정공은 태종 때 무과로 등용登用되었는데, 세종 때 벼슬이 경재卿宰에 이르렀다. 내직內職에서는 군국기무軍國機務를 담당하고, 외직으로 나가서는 북관北關의 자물쇠 구실을 하여 윤발綸綍이 답지하는 은총을 입었고, 공훈功勳은 이상彛常에 새겨졌으니 한 시대의 명망名望이 진실로 혁혁赫赫하였다.
 그 아우 참의공도 효성과 청렴淸廉으로 발탁되어 그 치적이 아홉 고을에 드러났다. 아들 강장공과 손자 경절공도 문종文宗, 세조世祖, 예종睿宗. 성종成宗을 내리 섬겼는데 역시 뛰어난 재기才氣와 청아淸雅한 절도로 여러 번 포장襃獎되었다. 삼대三代가 연이어 사서史書를 빛나게 하였으니 역대 조정에서 찾아보아도 많지 않으니 어찌 훌륭하지 않는가!
 양정공의 옛 살던 곳은 사곡士谷이었으나, 강장공 때에 비로소 월횡月橫으로 처음 이거했는데 사곡과 월횡은 모두 진주의 서쪽 지경地境이다. 이후 월횡을 세장世庄으로 하였으나 400여년이 지나면서 문운文運이 점차 쇠퇴해지자  각기 흩어져 이거移居함으로써 마침내 세거지를 지켜낼 수 없게 되니 후손들로서 항상 한탄恨歎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 그러다가 지난 을유년乙酉:1945가을에 후손들이 서로 의논하여 월횡 옛 마을에 집 하나를 구입購入하였다. 기둥과 지붕은 그대로 두고 고치고 꾸며서 추모追慕하는 곳으로 삼고 편액扁額을 도천서당道川書堂이라 걸었으니 그 집터가 도천道川가에 있기 때문이다.
 혹자或者는 세분이 모두 무략武略으로써 세상에 이름이 높이 드러났는데  서당書堂이라 하는 곳은 강학講學하는 장소이니, 그 명칭과 실상實相이 서로 걸맞지 않음이 있는 듯하다고 의아疑訝해 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다. 문무文武의 도道는 원래 다른 것이 아니다. 국가의 유사有事시에 적을 무찌르고 방어하는 자者는 평소 마음이 의리義理에 익숙하도록 연마鍊磨되어 그때에 형세를 다스리는 것이 심대深大하니 대체大體와 강령綱領에 힘쓴 것을 알 수 있다.
 더군다나 사람이 사람답게 되는 것은 무엇이 큰 것인가. 충효忠孝읠 따름이다. 학문을 강론하는 바는 이 충. 효의 도道를 밝히는 것이니 이 도를 배워 익히지 않고 다만 공적功績만 섬기면 그 근본이 변해진 것이다. 이것은 오히려 이후 세상이 날로 무너지고 어지러워지는 원인이 되어 나라를 위하는 자는 염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제 세분의 실기를 비교하여 상고하니, 맡은 일을 두루 거치면서 이룬 공적이 거듭하여 이러한 사실을 가리키고 있다. 요컨대 마음을 쓰고 일을 행한 것이 하나라도 충효를 근본으로 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평소에 익힌 바의 실상이 진실로 그대로 있었다. 어찌 무략武略만으로 얻은 명성이 그 실상을 덮어 가릴 수 있겠는가? 공의 후손된 자도 또한 마땅히 충효를 익히고 권장하는 것을 대대로 전하는 것을 규법으로 삼아야 한다.
 이 서당에 주선周旋하면서 그의 실기를 읽고 그 남기신 본보기를 생각하면서, 오직 하루아침에 가성家聲을 떨어뜨려서 조종祖宗에게 부끄러움을 끼치게 될까 염려한다면 서당이라는 실체가 대개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 사모하는 마음을 붙이는 곳으로서 무엇이 이보다 더하겠는가? 그러하지 않고 모수모구某水某邱에 집을 지어 선조의 이름을 표시하기만 한다면 작고 천박한 일이라 무엇을 숭상한다고 말할 것인가! 후손 만규가 나에게 기문울 청하기에 이와 같이 적고 따라서 힘쓰기를 권장한다.
            경인년1950중추 하한에 문소聞韶-安東古號 김황金榥 삼가 기문하다.
道川書堂記
河氏之爲大姓於晉陽遠矣其在韓初閥閱之盛最稱襄靖世家襄靖公由武擧登用太宗世宗朝致位卿宰內而機務軍國出而鎖鑰北關寵沓綸綍勳銘彛常固巳赫然一代望矣其弟參議公拔擢孝廉治著九邑而子剛莊公孫敬節公歷事文世睿成之際亦以雄材雅操亟被褒獎上下三世震耀史官之書求之國朝所末始多有何其偉哉襄靖公故居士谷自剛莊公始移月橫皆晉之西境也由是以往遂以月橫爲世莊歷四百年餘漸而陵替則各自離散轉徙而世莊者竟不得保有後孫常懷慨恨頃歲乙酉秋相與謀購一屋月橫舊里因其架設而改修飾之以爲寓慕之圖而扁曰道川書堂爲其地在道川之上也或疑三公皆以韜鈐名世而書堂者講學之所也其於名實宜若有不相稱者是不然文武之道元非二致國家有事而折衡禦侮者心其平素諳練於義理時勢者深所務之體要可知也況人之爲人孰大焉忠孝而巳矣學之所講講此道也此道不講而唯事功機變之是尙此後世之所以日趨於壤亂也爲國家者可不念哉今講試考三公實紀其歷任成績可累指悉也要其用心行事無一不本之忠孝則平日所講之實固自有在而豈韜鈐之所得專蔽哉爲公後承者亦宜以課忠責孝爲世世相傳規周旋是堂讀其實紀念其遺謨唯恐一朝墜失以爲祖宗羞則書堂之實庶幾在此而其爲寓慕也何以加諸不然而惟以某水某邱堂仞榱尺爲表識先舊之名抑末矣尙爰稱焉後孫萬圭請余紀爲之書此仍以勉之
                                          歲庚寅仲夏下澣聞詔金榥謹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