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장각 감실기御製致祭文刻板龕室記
선장각 감실기御製致祭文刻板龕室記
 
  임금님이 지으신 제문을 판에 새겨서 감실龕室에 봉안하며 목판에 글을 새기는 것은 오래 전하려함이요, 실내에 감실龕室을 설치하는 것은 장서藏書하기 위한 것이다.  기미己未 1799년 동짓날에 우리 정종正宗대왕께서, 옛 선정신先正臣이 사직社稷을 안정시킨 큰 공적의 성대함을 추미追美하셨다. 이에 한 움큼의 좋은 향(香)과 열 줄의 보묵寶墨으로 우승지 조홍진趙弘鎭에게 명하여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 문충공文忠公의 묘에 유제諭祭케 하셨다.
  제문祭文에서 "진양의 명망 있는 집안晉陽之望"이라고 하신 것은 고관高官들이 대를 이어온 집안이라는 뜻을 넓히신 것이요, "하늘에서 훌륭한 재상을 내리셨다天降良輔"라 하신 것은 충성스럽고 선량한 분이 태어난 것이 우연이 아님을 말씀하신 것이다. 임금과 신하가 잘 배합되었음을 부럽게 여겨서 "이윤과 여상에 뒤지지 않네伯仲伊呂"라고 하셨고,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에 공훈이 많았음을 추념하시어 "우리 왕실의 정사政事를 돕고扶我羲馭"라 하셨다. "온 세상이 정돈되어乾坤旣整, 산악처럼 흔들림 없었네山岳不運"라고 하신 것은, 천지만물이 제 자리를 잡고 길러지는 하나의 큰 사업을 가져왔음을 극도로 칭찬하신 것이다. 그리고 세금을 면제한 은전恩典과 능침陵寢을 살피는 감동을 손수 지으신 문장에 엄연히 담으셨다.
  제사를 드리는 날, 겨울 해는 밝고 따스하며 향 연기는 하늘로 올랐다. 풍악을 한 사람이 연주하고 축문祝文을 읽으면서 세 번 탄식하였다. 사백년 동안 청산을 지키던 백양白楊이, 하루아침에 내린 어필御筆에 마음이 확 트이는 은혜를 입었고, 온 산기슭을 두르고 있는 소나무, 삼나무, 전나무, 잣나무도 이슬과 비를 맞고 생기를 띠었다. 이것은 '큰 공훈과 업적이 찬미를 받아 왔지만, 백세가 지난 뒤에 명군名君을 만나 다시 되살아나는 성대함과 어찌 다르겠는가?'라고 생각해 보았다. 
  비록 당唐 태종太宗은 위정공魏鄭公의 묘 앞에 다시 비석을 세웠고 당 숙종肅宗은 장승상張丞相에게 곡강曲江에서 제사를 내렸으니, 옛날에도 반드시 전적으로 아름다웠던 것만은 아닌가 한다.
  어찌 훌륭하지 않은가? 아름답지 않은가? 제례祭禮가 끝나자, 방후손旁後孫들과 모였던 모든 분들이 모두 함께 탄식하면서, "이러한 예禮)는 시골에서는 보기 어려운 감격스러운 의식이다. 임금님께서 손수 지으신 글을 진실로 마땅히 집을 지어서 봉안하여 오래토록 전하여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에 송宋나라 사람들이 임금이 지은 문장이나 글씨를 신규각宸奎閣 등에서 길이 보전하고자 했던 법을 본받아서, 빗돌에 새기고 선장각璿章閣을 아름답고 화려하게 지으려고 의논하였으나, 되돌아보니 재실齋室이 작고 재력(財力)이 적어 그 규모를 넓고 크게 할 수 없었다. 다시 이것을 의논하니, "크게 지으려 하다가 지을 수 없는 것보다는 작게 짓더라도 지을 수 있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집에 봉안하여 오래 전하고자 하는 도리는 진실로 집의 크고 작음에 달려있지 않고, 보전하고자 하는 뜻은 같으니, 어찌 보전하고자 하는 도리를 다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기미1799년을 보내고, 7년 뒤인 병인1806년 한봄에, 목재와 판목을 모으고 목수를 불러 재사를 짓는데, 저것을 톱질하고 이것을 칼질하여, 설계대로 서까래와 처마 그리고 들보와 도리를 만들고, 지붕을 이고 엮었다. 앞문과 뒷벽을 설계에 따라 도리와 서까래, 문설주와 말뚝, 문지방, 문과 창문을 내었다. 모두 나무를 깎아서 칠을 했고 덮개도 나무를 깎아서 만들었다. 조밀하게 기와를 이고 바깥의 삼면은 붉은색, 흰색, 누른색, 녹색을 바르고 크고 화려한 집의 치장을 본받으니, 멀리서 보면 꿩이 날아오르고 새가 빨리 나는 듯 하고, 눈부시게 봉황을 그린 듯 교룡蛟龍을 수놓은 듯하였다. 특히 단단하고 치밀하게 지었으니 오래 갈만 하리라. 
  나무를 깎아 한 장의 판자를 문양으로 장식하고 어축御祝 열 줄을 새기고 글자를 검은 색과 흰 색을 칠하였다. 붉은 물을 들인 비단에 싸서 감실龕室의 첫 자리에 높이 받들고, 원본原本인 백마지白麻紙로 된 서첩書帖은 작은 함에 넣어 봉하고 함께 받들어, 본재本齋의 정실正室 동쪽 벽의 가장 높은 위치에 밝게 걸었다.  
 아! 문충공의 세상에 다시없을 공훈功勳은 처음부터 성대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나 더욱 이 일로 성대하게 되었고, 우리 국가에서 포상하는 은전恩典은 끝이 없었으나 더욱 이 일로 공훈의 성대함을 다하게 되었으며, 임금님 은총의 아름답고 임금님 은총의 아름다움이 이렇게 지극하여 진귀한 보배를 보전하게 되었으니 지금 이 감실을 만든 것이 비록 매우 아름답고 광대하지는 못하지만 앞으로 길이 전하고 사제문을 높이는 지극한 뜻이 있게 될 것이다.      
  뒷날 이 재사에 올라와서 감실을 우러러 보는 사람이면 누군들 " 위대하구나, 임금님의 은전恩典이여! "라 말하지 않겠는가? 공은 400년 종사宗社에 공훈을 끼쳐 그 훈업은 열 줄의 보묵에 뚜렷하게 실려 있고, 고운 비단 위에서 구슬 같은 글씨와 옥 같은 문장의 끝에서 남은 빛을 비추니 천백 세 뒤에도 우러러 볼 것이니, 어찌 보필한 것이 적다고 하겠는가? 또한 방 후손들이 길이 말하며 감히 잊지 못하게 하는 바탕이 될 따름이다.
  당시 보잘것없는 나는 재사의 유사有司 중의 한 사람으로서, 사곡士谷 종인宗人)하석중河錫中도 또한 그런 책임을 지고 있었다. 옆에서 일을 거든 자는 재승齋僧 도서道瑞였다. 낙성하는 날, 모든 분들이 '글이 없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보잘 것 없는 나는 감히 함부로 글을 짓지 않는 자이나 일삼아서 우선 그간 일을 적어서 그 전말을 개괄한다. 
   병인丙寅 1806년 3월 상한上澣에 하진락河鎭洛) 기문記文을 짓다.
위의 것은 선고先考 겸와공謙窩公께서 금상今上 순조純祖 6년 병인년에 지으셨다. 19년이 지난 뒤인 을유乙酉 1825년 늦봄에 불초자 대범大範이 이 때 재실을 중수重修하는 책임을 지고 있었으므로 감실龕室에 다시 모시는 날에 공경히 글씨를 써서 조각하는 사람에게 맡겨서 길이 전하고자 하였다.
御製致祭文刻板龕室記
板以刻壽傳之也室以龕尊閣之也粤在歲己未日南至惟我正宗大王追美古先正臣定社元勳之盛乃以一握天香十行寶墨命右承旨臣趙弘鎭諭祭于晉山府院君文忠公之墓有若曰 晉陽之望推其簪組世家之所由以也有若曰天降良輔言其忠良降生之不偶然也艶昔日際會之盛 而有曰伯仲伊呂念宗社勳烈之豐而有曰扶我羲馭至若乾坤旣整山岳不運 所以極道來位育奠造之一大事業而曠田之典展寢之感儼然灌注於玉音寶墨之間將事之日冬旭揚和香煙惹空樂奏一倡祝聲三噫四百年白楊靑山獲一朝宸奎洞徹之惠而環全麓松杉檜栢衣被而露氣色是奚特功烈之如被其美而曠百世風雲再造之盛又可想矣雖魏鄭公墓前重碣張丞相曲江致酹恐不必專美於古昔豈不偉乎休哉禮旣訖旁裔及會中諸賢咸與咨嗟而言曰此禮 誠遐土所罕見之感儀 而御製文固當閣而尊之以壽其傳也於是慕宋人御書飛白宸奎等閣永傳之規 謀所以鋟石奐輪之道而顧齋力蕩劣未有能廣大其制又爲之謀曰與其欲其大而未能曷若小之而能焉且尊閣壽傳之道固不繫於大小而其所以傳之者一也盍盡其所以傳之道也越己未後七年丙寅之仲春者乃鳩材板召匠搆之鋸彼刀彼體上棟下宁之制葺斯編斯依前門後壁之規欀桷椳杙閾闑戶牖皆削木而塗之覆亦以刻木焉 鑿鑿然蓋瓦狀外三面塗以朱粉黃綠 模倣奐輪之飾而望之若翟飛而鳥厲燦然如繪鳳而繡螭特取其堅緻可久木斲一板粧采以成之 刻御祝十行墨粉其字朱其紗崇奉于龕室中第一位原本白麻紙帖則緘小櫃附奉之昭揭于本齋廳事上東壁最高位嗚乎文忠公不世之勳初非不盛而尤以是爲盛我國家褒美之典靡有不極而尤以是爲極勳烈之盛而致如此睿想之美而至有此寶藏之傳則今此龕室之制作 雖未及宏麗廣大而殆將有壽傳尊閣之至義也後之登是齋而仰是龕者孰不曰大哉王恩旨哉公勳四百年宗社勳業歷歷備載於十行寶墨而細氈上珠毫玉藻之末照餘光庶幾仰覩於千百世之下矣夫豈曰小補之云抑亦使旁後雲仍庶可爲永言不敢忘之資耳時不佞忝在齋有司之列而士谷宗人錫中甫亦其責也供直者齋之僧道瑞也落之日咸曰不可以無文不佞非敢冒作者事而姑書其事以槪其顚末云爾
歲丙寅 三月上澣河鎭洛 記
右先考謙窩公撰成於當宁六年丙寅而越十九年乙酉暮春之月不肖子大範時在齋室重修之任龕室還安之日泣血敬書付于剞劂氏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