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강서원기
운강서원기
 우리 하씨河氏는 진양에서 발상發祥했으니 고려高麗 현종조顯宗朝의 신신藎臣:충신 증 문하시랑동평장사贈門下侍郞同平章事 휘諱 공진拱辰이 시조始祖다. 멀리 천재千載를 지내면서 명류名流 거경巨卿이 사승史乘에 끊이지 않고 쓰여 졌으니 본향本鄕의 사곡士谷, 단목丹牧과 운문雲門에 살고 있는 일족一族이 가장 드러났고 모두 따로 병사丙舍와 사우祠宇를 세워 시조始祖 및 중간의 저조著祖: 드러난 선조를 위하여 해마다 한 번 제사를 행한 지가 이미 여러 해 되었으니 운문雲門의 소원사溯源祠와 율수聿修齋가 곧 그 중 하나다. 향성鄕省의 사림士林들이 언제나 서로 모여서 말하기를 「두 분 선생과 같은 충절忠節과 학덕學德으로는 사림士林의 조두俎豆가 마땅할 것인데 후손後孫에게만 맡겨 해마다 한 번 제사를 지내는 것은 우리 사림士林의 흠사欠事가 아니겠는가?」라고 하였고 지난 정묘년丁卯年 겨울에도 또 공론公論이 준발俊發하여 통문通文을 만들어 사림士林의 각 가정家庭에 보내었다. 이리하여 익년翌年 무진戊辰 2월 21일에 도회道會를 운문의 율수재聿修齋에서 크게 개최하니 제제다사濟濟多士가 여러 고을에서 모두 모이고 또 난만爛漫하게 상확商確하니 다른 말이 없이 귀일歸一되었다. 이렇기 때문에 유사有司를 정하고 위패位牌를 고쳐 써서 봉안고유奉安告由의 의전儀典을 위하여 다음날 아침에 처음으로 사림士林의 향례享禮를 행했으니 우리 선조의 정충 고절貞忠孤節을 백세百世 아래에서 위로慰勞한 것이다. 그리고 사재祠齋의 편액扁額을 고쳐야 하겠기에 여러 사람에게 물으니 말하기를 「시랑 선생侍郞先生은 살신성인殺身成仁을 하셨고 운수당 선생雲水堂先生은 혼조昏朝를 당하여 병이秉彛가 돈독하여 정강서원鼎岡書院에 모시었다. 또 마을 이름이 운문이니 사祠를 경인景仁이라 하고 원院을 운강雲岡이라 이르는 것도 또한 옳지 않겠는가?」라 하였다. 이에 모두가 옳다고 일렀는데 아직 그 전말顚末을 갖추어 기記를 만들어서 후손後孫들에게 보이도록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어느 날 운문의 족씨族氏 해조海照· 상무尙武· 상식相植 세 사람이 나를 찾아와서 기記를 물었다. 동근東根이 사람됨이 모자라고 문文이 졸拙하여 감히 감당하지 못하겠으나 선조先祖의 일인데 어찌 불문不文 때문으로 끝까지 외면外面하겠는가? 삼가 살피건대, 우리 선조 시랑 선생께서는 앞서 거란契丹이 입구入寇하매 조야朝野가 분찬奔竄: 도망하여 숨음 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임금도 몽진蒙塵하여 남하南下할 때 홀로 분연憤然히 난리亂離 속으로 몸을 던지셨다. 임금에게 달려가 몽진 도중途中에서 알현謁見하고 화약和約을 주청奏請하여 윤허允許를 얻었으나 갈 만한 사람이 없었기에 즉시 적진敵陣으로 들어가서 삼촌설三寸舌을 휘둘러 40만四十萬 군사軍士를 물리치고 마침내는 몸소 볼모가 되어 연경燕京: 현재 북경으로 끌려갔다. 이에 나라가 힘입어 편안하게 되고 백성이 힘입어 생生을 보전保全하게 되었다. 그러나 선생께서는 수년數年 동안 억류抑留되어 달래어도 듣지 않고 항절抗節하다가 순사殉死하여 만리 이역萬里異域에서 고혼孤魂이 되었으니 그 충절忠節을 무엇이라고 감탄하겠는가? 그 충절은 일월(日月)과 같이 빛났으니 비록 악무목문岳武穆文: 南宋의 忠臣 岳飛과 문산文山: 南宋의 名將 文天祥의 실室에 든다 한들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운수당 선생雲水堂先生은 일찍이 사마司馬의 양과兩科: 진사와 생원에 합격하고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예문藝文과 홍문弘文 양관兩館의 청요淸要: 요직를 역임하고 평안도平安道 순천順川에서 적수謫守타가 임소任所에서 졸卒하니 그 고표 청조高標淸操가 사림士林의 산두山斗: 높은 표본가 되었다. 이렇기 때문에 후인이 경행景行: 거룩함을 우러러봄하여 정강서원鼎岡書院 9현九賢의 반열班列에 모셨더니 방금邦禁: 나라의 금령으로 철향撤享되었다. 이러니 사림과 예손裔孫들의 품은 한恨이 어떠하겠는가?
 오호嗚呼! 세상이 주석疇昔과 달라서 고도古道· 고례古禮가 땅에 떨어져 남은 것이 없는 날에 많은 선비들이 운집雲集하여 이러한 대사大事를 거행하니 어찌 우리 사림士林의 성사盛事가 아니겠으며 또한 어찌 예손裔孫으로 감읍感泣할 일이 아니겠는가? 흐르는 눈물을 이기지 못하고 삼가 써서 기記를 삼는다.    
雲岡書院記
 吾河發祥晉陽以高麗顯宗朝藎臣贈門下侍郞同中書平章事諱拱辰爲鼻祖綿歷千載 名流巨卿史不絶書而本鄕居士谷丹牧雲門之族最著焉皆別建丙舍祠宇爲鼻祖曁中著祖行歲一祭者已有年則雲門之溯源祠聿修齋者卽一鄕者士林每相聚而言曰以若兩先生之忠節學德宜爲士林之俎豆也任諸後孫而爲歲一祭者亦非吾材之欠事耶 卽往丁卯冬又公論俊發制通廣布于士林各家翌年戊辰二月二十一日大開道會于雲門之聿修則濟濟多士數郡畢至爛熳商確則無異辭而歸一故定有司改題位牌而爲奉安告由儀明朝始行士林之享禮則庶可慰我祖貞忠孤節於百世之下也然而不可無改其祠齋之額故諗于象則曰侍郞先生之殺身成仁雲水堂先生之當昏朝秉彛之篤享鼎岡書院又其里名雲門則祠曰景仁院曰雲岡不亦可乎咸曰唯尙未具其顚末爲記以示來後故日雲門族氏海照尙武相植三人造余而問記東根人微文拙不敢當先祖之事惡可以不文終自外慕惟我祖侍郞先生先是契丹之入寇也朝野奔竄罔知所措王亦蒙塵南下先生獨憤然挺身於亂離之中追謁王于蒙塵途中奏請得和約之允而無人可往故卽入敵陣掉三寸舌却四十萬軍竟爲身質孥去燕京於是國賴而安民賴而生然先生則滯留數年喩而不聽抗節殉身爲萬里異域之孤魂則吁何其忠節哉其忠節炳如日月雖入於岳武穆文文山之室亦無愧矣雲水堂先生則早中司馬兩科而登第歷藝文弘文兩館之淸要謫守平安道順川而卒于任所其高標淸操爲士林之山斗故後人景行之享鼎岡書院九賢之列而因邦禁撤享則士材曁裔孫之齎恨顧何如哉嗚呼世異疇昔古道古禮墜地無餘之日多士雲集擧此大事豈不爲吾林之盛事也亦豈不爲裔孫感泣之事耶不勝抆淚而謹書爲記爾
                                歲民國己巳流火節後孫成均館典儀東根謹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