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충공 하륜 묘갈명文忠公河崙墓碣銘
문충공 하륜 묘갈명文忠公河崙墓碣銘
 하씨의 선조는 진양에서 나서 한 고을의 망족이 되었다. 좌사낭중左司郞中 휘諱 공진拱辰이 고려에 벼슬하여 현종顯宗 때에 오랑캐와 강화하여 적병을 물리치는 공을 세워 한 시대의 명신이 되었다, 그 뒤에 휘 탁회卓回께서 고종高宗 때 벼슬하여 사문박사四門博士가 되었고, 박사로부터 4대代가 과거에 합격하여 세상에 명성이 드러났으며, 경사가 겹치고 선행을 쌓아서 공에 이르러 가문이 더욱 번성하였다.
 공의 휘는 륜崙이요, 자는 대림大臨이다. 증조의 휘는 식湜이니, 박사의 5세손五世孫으로 벼슬이 징사랑徵仕郞 선관서승膳官署丞이었는데,  순충보조공신 보국숭록대부 판사평부사 진강군 純忠補祚功臣輔國崇錄大夫判司評府事晉康君에 증직되었고, 조부의 휘는 시원恃源이니 식목녹사式目錄事로서 순충적덕병의보조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우정승 판병조사 진강부원군純忠積德秉義補祚功臣大匡輔國崇錄大夫議政府右政丞判兵曹事晉康府院君에 증직되었으며, 고考 휘諱 윤린允潾은 봉익대부 순흥부사奉翊大夫順興府事였는데 충근익대신덕수의협찬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 진양부원군忠勤翊戴愼德守義協贊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府事晉陽府院君에 증직되었고, 비妣 강씨는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에 추증되었으니, 검교예빈경檢校禮賓卿으로 숭록대부 의정부 찬성사 판호조사崇錄大夫議政府贊成事判戶曹事에 증직된 휘 승유承裕의 따님이다. 모두 공이 귀하게 됨으로써 증직을 받은 것이다.
 1347년 지정至正 정해 고려 충목왕 3년 봄에 강씨가 길한 꿈을 꾸고 태기가 있더니 그해 12월 기축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우뚝하여 보통 아이들과 같지 아니하였다. 10세에 입학하여 배우면 곧 외웠고, 14세인 1360년경자년에 국자감시國子監試에 합격하였는데, 행촌杏村 이암李嵒이 그 시관試官이었다. 19세인 1365년공민왕14년에 과거에 합격하였으니 이문충공李文忠公 초은樵隱 인복仁復과 이문정공李文靖公 목은牧隱 색穡이 그 좌주座主였다. 문충공이 한번 보고는 곧 큰 그릇으로 여겨서 그 아우 예의판서 인미仁美의 딸로 아내를 삼게 하였다. 그 당시 두 분이 유학儒學의 종주宗主가 되어서 학사와 대부가 다 그 문하에서 나왔다. 공이 사우師友들과 기거起居하며 강론하고 연마하여 학문이 날로 진취되었다. 1367년恭愍王16년에 춘추관에 뽑혀 검열檢閱을 거쳐 공봉供奉이 되었고, 1368년에 감찰규정에 임명되었다. 1369년에 검수사檢收司의 토지 측량하는 것을 감독하다가 신돈辛旽의 문객으로 부사副司가 된 자를 탄핵하여서 신돈에게 미움을 받아 파면되었다가, 1371년에 신돈이 주살된 후에 불려가 지영주사知榮州事가 되었는데, 안렴사按廉使 김주金湊가 공의 치행治行이 제일이라고 아뢰었다. 1372년恭愍王21년에 불려 올라가 고공좌랑考工佐郞이 되었고, 1373년恭愍王22년에 판도좌랑版圖佐郞으로 교주강릉도交州江陵道를 찰방察訪하였으며, 1374년에 제능서영諸陵署令에 제수되었고, 1375년禑王元年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전리사정랑典理司正郞을 거쳐서 1376년에는 전교부령 지제교典校副令知制敎에 승진되었고, 전의 부령典儀副令에 옮겼다가 1377년에 전법총랑 보문각직제학典法摠郞寶文閣直提學으로 옮겨 전과 같이 지제교를 맡았으니, 이로부터 다른 관직을 제수해도 다 관직館職-예문관, 춘추관, 집현전에서 수찬, 편집, 교정 등을 맡던 벼슬을 겸임하였다. 또 그 해에 판도 총랑으로 교주도 안렴사가 되었고, 1378년에는 전리 총랑으로 전보되었으며, 1379년에는 전교령 성균관 대사성典校令成均館大司成에 승진되었다. 1380년禑王6년 9월에는 부친상을 당하였고, 그 이듬해에 다시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에 기용되었으나, 상喪을 마칠 것을 청하여 허락받았다. 1382년에 상이 끝나서 우부대언右副代言에 제수되었고, 1383년에 우대언에 옮겼다가, 곧 전리판서가 되었으며, 1384년에 밀직사密直司에 들어가서 제학提學이 되었고, 1385년에 첨서사사簽書司事로 승진하였다. 가을에 명나라 태조가 국자전부國子典簿 주탁周倬 등을 보내왔는데, 공이 서북면에서 영접하였고, 그가 돌아갈 때에 공이 사은謝恩의 표문表文를 받들고 함께 가니 주탁 등이 예를 다하여 존경하였다. 1387년에 동지사사同知司事에 오르고, 1388년 봄에 무신武臣 최영崔瑩이 군사를 일으켜서 요동을 치려하므로 공이 힘껏 불가함을 말하니 최영이 노하여 양주襄州로 내쫓았는데, 여름에 최영이 실패함으로써 공이 돌아오게 되었고, 1389년 봄에 다시 동지사사가 되었다. 가을에 영흥군 왕환永興君王環이라는 자가 일본에서 돌아왔는데, 공이 인척관계로 전부터 왕환의 얼굴을 알았으므로 그가 왕환이 아니라고 말하다가 광주로 유배되었다. 1390년 봄에 옮겨서 울주蔚州로 유배되고, 여름에 윤이尹彛, 이초李初의 옥사가 일어나, 여러 귀양 갔던 사람을 청주로 모아 대질하였는데, 이때공은 방면되어 진주로 돌아갔다. 1391년 여름에 불려서 전라도 도관찰사가 되었다가, 임신년 여름에 교대해서 돌아왔다.
 우리 태조께서 천명을 받으신 후 1393년太祖2년 가을에 다시 공을 불러서 경기좌도의 관찰사로 기용하니, 공이 처음으로 민호民戶의 개간한 땅이 많고 적은 것으로 부역을 정하였다. 부유한 자는 비록 싫어하였지만 고을 사람들은 그 공평함에 감복하였으므로 여러 도道가 다 본받아 드디어 법으로 정해졌다. 그때에 태조께서 수도를 계룡산으로 옮기려고 이미 역사役事를 시작하였는데, 공이 중지할 것을 힘써 간하니 따랐다. 1394년 3월에 다시 첨서중추원사가 되었고, 이듬해 4월에는 중추원사로 옮겼다. 7월에 어머니의 상사喪事를 당하였는데, 다음해 4월에 예문춘추관 학사에 기용하니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명나라 고황제가 표문表文의 말이 근신謹愼하지 못하다 하여 글을 맡았던 정도전을 입조入朝하게 하고, 또 우우牛牛 등 관원을 보내서 독촉하였는데 공이 관반사館伴使를 맡았었다. 태조께서 은밀히 조정 신하들에게 정도전을 보내야 할지 여부를 물으시니 다 관망하면서 반드시 보낼 것 없다 하는데, 공은 홀로 말하기를 보내는 것이 옳다고 하였으므로 정도전이 크게 앙심을 품었다. 7월에 태조께서 이지李至를 보내서 아뢰려고 하였더니 명明 사신이 말하기를, 오직 하관반河館伴 만이 사명을 완수할 수 있으리라고 청하니 함께 가게 하였다. 공이 명나라 조정에 이르러 상세하게 아뢰고 사리를 분명하게 하였더니 과연 해결되었다. 1397년太祖6년 정월에 정도전이 군사를 동원하여 국경 밖까지 출병하려고 의논할 때 공을 꺼려서 계림부윤으로 내보냈다. 그해 봄에 왜倭의 추장 두어 사람이 무리를 거느리고 경상도에 이르러 항복하기를 청하였다. 4월에 공이 관찰사 절제사 등 여러 사람과 처리할 바를 의논하는데, 의논된 방책을 주관한 자가 실수하여 왜의 추장이 도망해 갔으므로, 6월에 공公 등을 체포하여 순군옥巡軍獄에 가두고 심문하여 7월에 수원부水原府에 안치했다가 10월에 석방하였다. 1398년 7월에 충청도 도관찰사에 제수되었고, 9월에 상왕定宗이 왕위를 계승하심에 공을 불러서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제수하였고, 10월에 정사공定社功을 책정하는데 공을 뽑아서 제일로 정하고 진산군晉山君의 작위를 내렸다. 명나라에 들어가 건문황제建文皇帝가 등극한 것을 하례하였고, 1399년 12월에는 참찬문하부사가 되었으며, 1400년 4월 찬성사에 승진되고, 5월에는 판의흥삼군부사 겸 판상서원사判義興三軍府事兼判尙瑞院事가 되었다. 9월에 문하우정승 판병조사門下右政丞判兵曹事에 임명되고, 작위를 올려서 진산백晉山伯이 되었다. 11월에 금상今上께서 즉위하셨고, 1401년태종1년 정월에 좌명공座命功을 책정하는데 공이 또 1등이 되었다. 윤 3월에 병으로 인하여 사퇴하였으나 영삼사사領三司事에 임명하고, 4월에 지공거知貢擧를 맡아서 지금 지신사知申事로 있는 조말생趙末生 등 33인을 뽑았다. 7월에 관제를 고쳤는데, 그로 인해서 영사평부사 겸 판호조사領司平府事兼判戶曹事가 되어서, 처음으로 국내에서 통용할 수 있는 저화楮貨-지폐를 제조할 것을 청하여 국가의 재정을 넉넉하게 하였다. 1402년 6월에 근천정覲天廷, 수명명受明命 등 악장 두 편을 지어 올리니, 왕이 교서를 내려서 격려하고 표창하였다. 10월에 의정부좌정승 판이조사議政府左政丞判吏曹事에 임명되었고, 명나라에 가서 금상황제의 등극을 하례하였는데 지의정부사 이첨李詹이 부사副使로 함께 갔다. 공이 명나라 조정에 이르러서 이첨과 함께 예부禮部에 글을 올려, “새 천자가 등극하여 천하가 더불어 새롭게 되었으니, 우리 임금의 작명爵命도 고쳐 주시기를 청합니다.” 하니 황제가 가상하게 여겼다. 1403년太宗3년 4월 명나라 사신 도지휘사 고득都指揮使高得 등과 같이 고명誥命과 인장印章을 받들고 왔으므로 임금이 더욱 중하게 여기시어 상으로 주신 것이 매우 후하였다. 1404년 6월에 가뭄으로 자원하여 사임하였고, 이듬해 정월에 복직되어 좌정승에 세자사世子師를 더하였다. 1406년에 공이 각 종파의 사사寺社 주지가 많은 토지와 노비를 점유하고 재물을 모아 여색을 탐하며 재물을 노략질하고 민중을 미혹하게 한다 하여 건의해 아뢰기를, 각 도 주군州郡에 요량하여 한 두 절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다 혁파하여 그 토지와 노비는 모두 다 공용에 속하게 하시라고 하니 임금이 허락해 따랐고, 식자들이 잘했다고 일컬었다. 1407년 4월에 문사들 중시重試에 공을 독권讀券으로 삼으니 지금 예문관 제학 변계량卞季良 등 10인을 뽑았다. 7월에 또 가뭄으로 직위에서 파하기를 청하였고, 1408년 2월에 영의정부사가 되었으며, 1411년 3월에 지공거를 맡아서 지금 평양판관인 권극중權克中 등 33인을 뽑았고, 1412년 8월에 다시 좌정승이 되었으니, 공은 이에 이르러서 네 번째 나라의 정사를 맡은 것이다. 1414년 4월에 나라에서 옛날 주나라의 관제를 모방하여 정부의 서무를 나누어서 6조에 귀속시키고 공을 영의정부사로 삼았다. 1415년 10월에 또 좌의정에 임명되었고, 1416년太宗16년 봄에 공의 나이 70인지라 고사故事를 들어 치사致仕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오랫동안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공이 자꾸 고하니 임금이 특별히 공을 우대하여 조회하지 말라 하시다가 4월에 이르러서야 허락하시고,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으로 사저私邸에 나아갔지만, 나라에 큰일이 있으면 반드시 자문하시었다. 그해 10월에 임금이 함길도에 사신을 보내어 선대의 능침을 순시하려 하니 공이 스스로 갈 것을 청하였으므로, 임금이 그 연로함을 민망히 여기고 그 뜻을 가상히 여겨서 친히 교외에 납시어 전별餞別하였다.
 공이 일을 끝내고 돌아오려 하는데 병이 나니, 임금이 듣고서 급히 내의內醫를 보내어 병을 치료하게 하고, 내주內廚를 시켜서 음식을 조리하게 하며, 관원을 시켜 문병하고 위로하는 것이 길에 이어졌더니, 11월 초 6일 계사에 정평관아에서 돌아가셨다. 관아에서 보낸 부음이 도달하니 임금이 매우 슬퍼하시어 눈물을 흘리시고 조회를 3일 동안 정지하고, 소찬으로 7일을 지내시었다. 예관禮官을 보내어 교서를 가지고 가서 제사 지내게 하시고, 또 호상유사護喪有司를 임명하여 서울로 돌아와 서울 집에 빈소를 차리게 하였으며, 임금과 세자가 친림하여 조상弔喪하고, 전奠을 들였으며, 시호를 문충文忠이라 내려 주시고, 관에서 장사葬事 돌보는 것을 보통보다 더하게 하였으니. 공이 돌아가신 뒤의 영예는 유감이 없다고 말할 만하다. 이듬해 1417년 3월 11일 정유에 사자嗣子 도총제都總制공이 영구를 모시고 돌아가 진주 오방동梧坊洞 북쪽 산언덕 선영先塋의 동쪽에 장사 하였으니 생전의 유언에 따른 것이다.
 공은 천성이 중후하며 식견이 밝고 도량이 넓으며, 온화하고 과묵하였다. 평생에 급한 말과 황망한 빛이 없었고, 조복朝服 입고 묘당廟堂에 앉아 의심나는 것을 결단하고, 정책을 결정할 때에는 그 기상이 의젓하였고, 욕하거나 칭찬한다고 해서 조금도 그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으며, 정승이 되어서는 대체大體에 힘쓰고 세세하게 살피는 것을 일삼지 아니하였다. 좋은 계획과 비밀한 의논으로 임금을 보좌한 것이 크고 많지만, 물러 나와서는 일찍이 사람들에게 누설하지 않았고, 남과 교제함에 한결같은 정성으로 거짓이 없었으며, 일가친척에게는 인자하고 붕우에게는 미더웠으며, 아래로 노복에 이르기까지 다 그 은혜를 생각하였다. 인재를 천거함에 항상 모자람이 있어도 조금만 잘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뽑고, 그 작은 허물은 덮어 주었다. 집에서의 일상은 재산을 불리려 하지 않았고, 사치하고 화려한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였으며, 잔치하고 노는 것을 즐겨하지 아니하였다. 성품이 글 읽기를 좋아하여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한가롭게 시를 읊조리어 자고 먹는 것도 잊을 지경이었다. 경經, 사史, 자子, 집集에 통달하였으며, 음양陰陽, 의술醫術, 천문天文, 지리地理에까지 다 매우 정밀하였고, 예악과 제도도 다 상세하게 정하였다. 후생들을 권면하여서 의리를 확립하는 데 되풀이하여 게을리 하지 않았다. 국정을 담당하면서부터 오로지 문한文翰을 맡아서 중국에 보내는 문서나 문사들의 저술은 반드시 공이 윤색하고 인정해야 결정되었고, 일찍이 교지를 받들어 태조실록 15권을 편수하여 올렸다. 스스로 호를 호정浩亭이라 하고 문집 20권이 있다. 미리 유언하는 글을 지어서 문서함 속에 간직하였는데 자손을 훈계한 것이 섬세하게 구비되어 있고, 또 경계하기를 상사喪事와 장사葬事는 모두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르고 불사佛事를 하지 말라 하였다. 공이 죽은 뒤에 그 글이 나오니, 집에서 그 말과 같이 하였다.
 부인 이씨는 진한국대부인에 봉작되었는데, 한 아들을 낳았으니 구久이며, 중군도총제中軍都總制요, 딸이 두 사람인데, 맏이는 한성부윤 홍섭洪涉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경상좌도도절제사慶尙左道都節制事 이승간李承幹에게 시집갔다. 손자가 한 사람인데 복생福生으로 어리다. 외손이 5명인데 모두다 절제사의 아들이다. 공전恭全은 전 공정고부사前供正庫副使요, 신전愼全은 사재직장司宰直長이고, 성전 誠全, 순전順全, 항전恒全이다. 서자庶子가 세 사람인데 장長과 연延은 어리고, 영永은 의흥시위사 대호군義興侍衛司大護軍이요, 서녀庶女도 세 사람인데, 맏이는 곡산부사 김질金秩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중군사직中軍司直 장희걸張希傑에게 시집가고, 그 다음은 어리다.
 명銘하여 이르노라. 진주의 산 푸릇푸릇, 진주의 물 출렁출렁. 아름답다, 지령地靈이여! 우리 호정 나게 하셨구나. 선생의 타고나신 천품, 옥같이 윤택하고도 깔끔하도다.  쇄락한 가슴 속에는, 밝은 달 시원한 바람이라. 저 하늘이 우리 동방 사랑하여 우리 임금 돕게 했네. 말하면 듣고 계획하면 따르시니, 천년에 한 번 만날 지기知己일세. 내세워서 정승 삼으니, 백관의 어른이라. 공公이 묘당에 있으니, 환과鰥寡에도 은택일세. 이단은 배격하고 도학은 제창하니, 공은 지금 당나라의 창려昌黎-한유韓愈같고, 양대 임금 옹립하여 해와 같이 모셨으니, 공은 지금 송나라의 치규稚圭일세. 기미 먼저 밝게 알고 계획하여 빠짐없으니, 그 누가 같을쏘냐, 장막 안의 자방(子房)이요, 충의로운 정성이 백일을 꿰뚫었으니, 그 누가 같겠는가, 시종始終으로 분양汾陽-당나라 충신인  곽자의郭子儀일세. 업적도 광대하고 덕망도 높으시니 마땅히 나라의 원로일세. 70에서 끝났으니 누구라서 수壽했다 할까? 고굉지신股肱之臣 쓰러지니 원수元首께서 슬퍼하시고, 현철한 이 돌아가니 행로인行路人도 눈물짓는다. 슬프구나, 선생께서 이제는 돌아가셨으니, 종정鍾鼎에 이름 남기고 고향으로 혼령 갔네. 울총鬱葱할싸, 저 선영에 길이길이 장례하니 돌 깎고 말 새겨서 오래오래 보게 하리라.
                                                                 윤회 찬
河崙墓碣銘
河氏之先出於晉州爲一鄕望族自左司郞中諱拱辰仕高麗樹功顯王朝和戎却敵爲一代名臣其後有諱卓回仕高王朝爲四門博士由博士而下四世登科世有聞人毓慶積善至於公而門益大公諱崙字大臨曾祖諱湜博士五世孫徵仕郞膳官署丞贈純忠補祚功臣輔國崇錄大夫判司平府事晉康君祖諱恃源式目錄事贈純忠積德秉義補祚功臣 大匡輔國崇錄大夫議政府右政丞判兵曹事晉康府院君考諱允潾奉翊大夫順興府使 贈忠勤翊戴愼德守義協贊功臣大匡輔國崇錄大夫領議政府事晉陽府院君妣姜氏贈辰韓國大夫人檢校禮賓卿贈崇祿大夫議政府贊成事判戶曹事諱承裕之女皆以公貴得贈 至正丁亥春姜氏得吉夢有娠以其年十二月己丑生公公自幼嶷然不類群兒十歲就學 旣授輒成誦年十四中庚子國子監試杏村李文貞其試官也十九中乙巳科樵隱李文忠公牧隱李文靖公其座主也一見器之卽以其弟禮儀判書仁美之女妻之于時二公宗主斯文學士大夫咸出其門公周旋師友之間講論切磋學文日進丁未選入春秋館爲檢閱爲供奉洪武元年戊申試監察糾正己酉監檢收司量田劾辛旽門客之爲副使者忤旽罷辛亥旽誅起知榮州按廉使金湊上其治行第一壬子召拜考功佐郞癸丑以版圖佐郞察訪交州江陵道甲寅除諸陵署令乙卯歷司憲持平典理正郞丙辰進典校副令知製敎改典儀副令丁巳遷典法摠郞寶文閣直提學依前知製敎自此除職皆帶館職又以板圖摠郞按廉交州道戊午轉典理摠郞己未陞典校令成均大司成庚申九月丁外憂辛酉起復判典校寺事乞終喪許之壬戌服闋授右副代言癸亥移右代言尋判書典理甲子入密直爲提學乙丑進簽書秋太祖高皇帝遣國子典簿周倬等來公迎接于西北面其還也公奉謝表偕行倬等甚禮重之丁卯改同知戊辰春武臣崔瑩欲興師犯遼陽公力陳不可瑩怒放之襄州夏瑩敗公得還巳春復拜同知秋有稱永興君王環者來自日本公以姻戚素知環貌言其非眞見放于光州庚午春移放于蔚州夏尹彛李初之獄作會諸流人于淸州置對公得免歸晉州辛未夏起爲全羅道都觀察使壬申夏代還我太祖旣受命癸酉秋再起公觀察京畿左道公始以民戶墾田多小定賦役豪强雖惡之而人服其均諸道皆效之遂爲定制時太祖欲遷都鷄龍山旣興役公力諫從之甲戌三月復簽書中樞院事乙亥四月遷中樞使七月丁內憂丙子四月起復藝文春秋館學士辭不就高皇帝以表辭不謹徵我主文者鄭道傳入朝且遣牛牛等官督之公爲館伴太祖密訪廷臣以遣否皆顧望以爲不必遣公獨言遣之便道傳大啣七月太祖欲遣李至奏使臣謂惟河館伴可以將命請與之俱公至朝廷敷奏詳明事果得解丁丑正月鄭道傳議擧兵出彊忌公出爲鷄林府尹其春倭酋數人率衆至慶尙道請降四月公與觀察節制諸公議所以處置者主議者失策倭酋逸去六月逮公等于巡軍置對七月安置水原府十月得自便戊寅七月拜忠淸道都觀察使九月上王嗣位召拜政堂文學十月錄定社功策公爲一賜爵晉山君入賀建文皇帝登極己卯十二月叅贊門下府事庚辰四月陞贊成事五月判義興三軍府事兼判尙瑞司事九月拜門下右政丞判兵曹事進爵爲伯十一月今上卽祚辛巳正月錄佐命功公又在一等閏三月以病辭拜領三司事四月知貢擧取今知申事趙末生等三十三人七月改官制因領司平府事兼判戶曹事始請造境內通行楮貨以贍國用壬午六月獻覲天庭受明命樂章一篇賜敎獎諭十月拜議政府左政丞判吏曹事入賀今上皇帝登極知議政府事李詹爲之介公至朝廷與李公上書禮部以爲新天子旣與天下更始矣請改賜吾王爵命帝嘉之永樂元年癸未四月偕朝使都指揮使高得等奉誥命印章以來上益重之賜賚甚厚甲申六月以旱乞免乙酉正月復左政丞加世子師丙戌公以各宗寺社住持多点土田奴婢殖貨冒色蠹財惑衆建白於各道州郡量置一二寺餘皆革去其土田奴婢悉屬於公上從之識者稱快丁亥四月重試文士命公讀券取今藝文館提學卞季良等十人七月又以旱請避位戊子二月領議政府事辛卯三月知貢擧取今平壤判官權克中等三十三人壬辰八月復左政丞公至是四秉國白矣甲午四月國家倣周官分政府庶務歸諸六曹以公領議政府事乙未十月又拜左議政丙申春公年七十矣以故事乞致仕上久未之許公數以告上特優公不朝至四月乃許以晉山府院君就第國有大事必以咨焉其年十月上欲遣使咸吉道巡視先王陵寢公請自行上愍其老而嘉其志親出郊餞之公旣卒事將還疾作上聞之亟遣內醫治疾內廚調膳中官問慰絡繹於道十一月初六日癸巳卒于定平公廨訃至上悼甚哭之流涕輟朝三日素膳七日遣禮官賚敎致祭且命有司護喪還都殯于京第上及世子親臨弔奠賜諡曰文忠官它葬事有加公之哀榮可謂無憾也已矣明年丁酉三月十一日丁酉嗣子都摠制公奉柩歸祔晉州梧房洞坎山之岡先塋之東遵治命也公天資重厚識明而量弘雍容簡黙平生無疾言遽色至其端委廟堂決疑定策其氣毅然略不以毁譽動其心爲相務存大體不事苛察嘉謀密議啓沃弘多而退未嘗泄於人處己接物一誠無僞仁於宗族信於朋友下至僮僕皆懷基惠薦進人才常若不及片善必取而掩其小過居家不治生産不喜奢麗不樂宴遊性好讀書手不釋卷悠然嘯咏至忘寢食經史子集無不通究至於陰陽醫藥星經地理皆極其精禮樂制慶皆所詳定勸勉後生商確義理亹亹忘倦當國以來專典文翰事大辭命文士著述必經公潤色印可而後乃定嘗奉旨修太祖實錄一十五卷上之自號浩亭有文集二十卷預爲遺文藏之巾笥訓誨子孫纖悉周備且誡以喪葬一依朱子家禮無作佛事公旣歿而書出其家如其言夫人李氏今封辰韓國大夫人生一男曰久中軍都摠制女二人長適漢城府尹洪涉次適慶尙左道都節制使李承幹孫男一人福生幼外孫五人皆其節制子也恭全前供正庫副使愼全司宰直長誠全安全恒全庶男三人曰長曰延皆幼曰永義興侍衛司大護軍庶女三人長適谷山府使金秩次適中軍司直張希傑次幼銘曰
晉山蒼蒼晉水泱泱猗歟地靈生我浩亭先生之質玉潤而栗灑落胸中霽月光風天眷東方俾輔我王言聽計從千載一逢爰立作相百僚是長公在廟社澤被鰥寡觝排異端唱鳴道學公於是時唐之昌黎定策兩朝親扶日轂公於是時宋之稚圭明炳幾先籌無遺策誰其似之帷幄子房忠義精誠上貫白日誰其似之終始汾陽業荼廣德崇宜國黃耈七旬而終孰云其壽股肱之虧元首傷悲哲人之委行路涕洟嗚呼先生今也則亡名留鼎彛神返故鄕有鬱先塋其永于藏鑱石銘辭用示攸長
                                                             尹淮 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