松岡共 河恒 墓碣銘
松岡共 河恒 墓碣銘
 진양 하군河君 진락鎭洛이 그 6대조 송강松岡 휘 항恒 자字 자상子常 공의「행록行錄」을 나에게 보이며“이것은 지헌持憲 이병렬李秉烈이 지은 것입니다. 공은 임진왜란壬辰倭亂 전에 사셨는데 태어나고 세상을 떠난 날짜를 모릅니다. 오직 당시 공의 반듯했던 행적은 명망 있는 선비들의 믿을 만한 여러 글에 조금 보일 뿐입니다. 그래서 지헌 군이 순수한 것을 모아서 이 행록을 만든 것입니다. 바라건대, 선생께서 묘갈명을 지어서 새길 수 있게 된다면 이보다 큰 다행이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내가 이르기를“옛 기록을 보면 옛 사람들 중에 이와 같은 분이 매우 많은데 무엇을 근심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드디어 명銘을 지어 이르기를,
 “하씨는 고려시대 평장사平章事로부터 유명해 고관대작高官大爵이 계속 빛을 내어 진강군晉康君에 이르렀고, 조선에 이르러 거듭 이어졌네. 증조는 휘 우치禹治인데 변방에서 목사牧使를 지냈고 조부의 휘는 숙淑이고 부친은 휘 위보魏寶인데, 가정嘉靖 무오戊午 1558년에 사마시司馬試에 입격하고 바르고 순수하고 행실이 진실 되어 사양함을 즐기고 숨어서 살았네. 참의 이륜李綸의 따님께 장가들어 공을 낳으니 범인과 달랐네. 스승과 벗들, 점잖은 분들에게 정이 깊고 너그러우면서 엄격하였으며 학문도 갖추었네. 어머니 상에 여모살이 할 때  죽을 먹으며 상제를 끝내어 몸이 상하여 위태로웠으니, 효성이 세상에 알려졌네.
 강가에 집을 짓고‘송강정사松岡精舍’라고 이름 짓고 부귀富貴를 쫓지 않고 만족하며 삶을 다하도록 노닐면서 창주滄洲 ․ 죽헌竹軒과 함께 날마다 더불어 기뻐하였네. 일찍이 산사山寺에서 독서할 때 중이 유도儒道를 업신여기는 것을 보고 화내어 그의 책을 불을 질러 우리 유도를 높이니 남명선생南冥先生이 뛰어나다고 칭찬하였고 지조 높은 선비들이 더욱 우러러 보았는데, 도리어 천수天壽를 다하지 못하였으니, 하늘의 보답도 어긋남이 있네. 둘레 솔 속의 묘墓 는 진주 북쪽 유원杻院에 있네.
 배위配位 진양晉陽 정씨鄭氏는 참의 수견受堅의 따님이고, 아드님은 휘 인상仁尙인데, 이름과 행실을 잘 닦았네.
 아! 공의 사적事蹟이 끝내 분명하지 않음을 나무랄지라도, 내가 어찌 글을 꾸몄겠는가? 여러 뇌사誄辭에서 따왔다네.
                                                         장령 정종로 찬
墓碣銘
晉陽河君鎭洛以其六代祖松岡諱恒字子常公行錄示余曰此李持憲秉烈之所撰也公年代在龍蛇前生卒年月並未詳惟有當日行誼之散見於諸名勝信筆者若干而已故持憲君裒粹爲此錄願執事惠以一言使得顯刻于墓則幸孰大焉余曰觀於往牒古人之若是者甚多庸何傷哉遂爲之銘曰河氏於麗著自平章冠冕奕舃以逮晉康至于我朝亦復蟬聯曾祖諱禹治出牧于邊祖諱曰淑考曰魏寶其中司馬嘉靖戊午質粹行篤退甘隱處是娶于李參議綸女公生異凡深厚寬嚴師友諸賢學力又兼喪母廬墓啜粥終制毁瘠幾死孝聞當世卜築江上舍號松岡囂囂無慕終歲徜徉滄洲竹軒日相怡愉嘗寓蕭寺見僧卑儒怒火其書以尊吾道南冥奇之介士益慕顧不克年天報實舛壤樹有墓州北杻院配晉陽鄭贈參議女一男仁尙名行亦礪嗟公事蹟有難終晦我言豈誣衆誄是採
                                                           掌令 鄭宗魯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