喚醒齋公 河洛 神道碑文
喚醒齋公 河洛 神道碑文
 
 환성재喚醒齋 하선생河先生이 세상을 떠난 지가 사백 년이 되었지만 묘도墓道에 여태 신도비神道碑가 없으니 아! 어찌하여 이리 지연되었을까?
 조선조朝鮮朝는 당화黨禍 이래로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아 의리가 침체되고 선악善惡이 뒤섞여 나라가 이내 망했기에 뜻있는 선비들은 더욱 선생先生을 사모하여 잊지 못했다. 후손들의 비석 세우는 역사가 이런 시기에 이루어진 것은 이 또한 어두운 세상에 한 등불이 되기를 기다렸던가? 종손宗孫 재문載文이 나에게  글을 구함은 내가 화양부자華陽夫子 후손後孫 문충공文忠公의 손자孫子이기 때문이나, 말학末學인 나를 돌아보건대 이 일을 감당할 수 없다. 그러나 존경하고 감모感慕하는 마음이 있으니 어찌 사양하겠는가!  가만히 생각건대 음양陰陽과 소장消長이 서로 이기고 지는 일은 참으로 천도에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성인이 양을 북돋우고 음을 억제한 대의는 대개 세상을 근심하는 지극한 심정에서 나왔다. 그렇기 때문에 음陰이 양陽을 해치는 때를 당해서는 반드시 인물이 나타나 은밀히 도우고 다스려 소인이 날뜀을 막고 후일의 회복을 위한 터전을 마련한다. 그의 말은 비록 일시적으로 꺾일지라도 마침내 백세百世토록 펼쳐지리니 천지天地가 이를 힘입어 침체하지 않게 한다. 이 같은 사람은 비록 곤궁하여 아랫자리에 있어도 그의 삶은 참으로 성쇠의 운명을 좌우하고 그 말은 호연浩然히 원기元氣와 함께 흐르니 선생 같은 분이 어찌 그 사람이 아니겠는가?
 先生은 탁월한 품성과 강직한 기개로 일찍부터 남명선생南冥先生 문하門下에서 수학受學하였고 또 율곡栗谷 우계牛溪 두 선생과 도의교道義交를 맺었다. 선조 계미년宣祖 癸未年 간에 당론黨論이 괴이하게 퍼져 율곡栗谷 우계牛溪 두 현인賢人이 뭇 소인小人들의 참소를 입었고 삼사三司가 아울러 일어났다. 감히 이에 음양 소장의 기미는 조금도 보이지 않고 온 조정이 숨을 죽여 입을 열지 못하니 정녕 위태롭고 급박한 시기였다. 선생은 당시 미관微官이었으나 홀로 글을 올려 선악善惡을 극언했으니 구중九重 궁궐宮闕이 놀랐고 일시 사람들이 두려워하였다. 비록 누차 제지를 당해 그 말이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일선一線의 양기陽氣가 이를 힘입어 끊어지지 아니하고 시간이 갈수록 더욱 창창彰彰해졌으니 그 양陽을 북돋우고 음陰을 억누른 공로功勞가 어찌 적겠는가?
 선생先生의 휘諱는 락洛이요 자字는 도원道源이며 진양인晋陽人이니 고려 시랑高麗侍郞 공진拱辰이 보첩譜牒에 오른 시조始祖이다. 그 후 대대로 현귀顯貴한 이가 많았으며 조선조 한성판윤漢城判尹 유游가 선생先生의 육대조이다. 증조曾祖 응천應千은 진사進士요, 조祖 형瀅은 현감縣監이다. 고考 휘諱 인서麟瑞는 호號가 풍월헌豊月軒으로 생원과 진사에 합격하였고 비妣는 풍양 조씨豊壤 趙氏 대장군大將軍 협協의 여이다. 선생은 중종 경인中宗 庚寅년 진주 수곡에서 태어났고, 두 아우가 있었으니 각재覺齋 항沆과 영생永生이다. 선생은 각재공과 더불어 한 방에서 공부하여 학업을 일찍 성취했으니 당시 사람들이 난형난제難兄難弟라 하였다. 일찍이 사마시司馬試에 장원壯元하였고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왕자사부王子師傅를 지냈다. 효우가 독실하여 부모를 섬길 때는 봉양과 장사에 예를 다했고 형제간의 우애는 화기로움이 봄바람 같더니 각재공이 먼저 세상을 떠나자 외로움에 젖어 살 의욕을 잃은 것 같았다.
 중세中歲에 상주로 옮겨가 살았는데, 서애 류 문충공이 마침 이 고을로 부임하여 맨 먼저 선생을 방문하고 경예經禮를 강론하며 정의가 매우 두터웠다. 임기를 마치고 돌아가자 고을 사람들을 위하여 거사비문去思碑文을 지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상주목사尙州牧使 김해金澥가 향병을 모아 군무의 의론을 청하니 선생이 분연히 말하기를, “한번 죽음으로 나라에 보답하는 것이 나의 뜻이다.” 하고는 활을 메고 말에 올라 아들 경휘와 함께 수십 인을 거느리고 주성州城으로 달려갔다. 적병이 갑자기 들이닥치자 선생은 중과부적임을 느끼고 아들을 급히 불러 말하기를, “이곳은 내가 죽을 곳이니 너는 돌아가 집안을 보전하라.” 하였다.
 경휘가 울면서 “부친이 이미 죽음을 작정했으니 자식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하고 드디어 동시에 목숨을 잃었다.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자 부자가 아울러 충효로써 정표를 입었고 뒤에 선생은 승정원 좌승지로 추증되었다. 처음 상주에 장사하였다가 뒤에 수곡 선영 아래 임좌원으로 이장移葬하였다. 선생은 후사가 없어 종질을 취하여 양자로 삼았으니 곧 송정 수일受一과 수긍재守肯齋  천일天一의 막내아우이다. 경휘鏡輝는 생원生員이요 손남孫男 선璿은 주부主簿로 문행이 있다. 이하는 기록치 않는다.
 아! 선생은 일찍 어진 사우師友를 따랐으니 그 학문이 바르고, 집안에선 효우를 다했으니 그 행실이 돈독하며, 난을 당해 목숨을 바쳤으니 그 충성이 지극하다. 세상엔 학행과 절의로 칭송되는 이가 많지만 그 윤상倫常은 선생의 지극함을 따르지 못한다. 오직 선악의 분별을 밝혀 무리에 휩쓸리지 아니하고 음양이 소장하는 기점起點에서 정론을 부지扶持하는 일은, 올바른 식견이 남보다 뛰어나고 성인이 역易을 만든 뜻을 체득한 이가 아니라면 어찌 가능하겠는가? 이는 곧 굳건하여 쓰러지지 아니하고 무리에 미혹되지 않는 것이라 할 수 있으니 선생의 위대한 점은 여기에 있다. 아! 계미년 상소의 주장을 당시에 받아 들였다면 당화를 미연에 방지하여 임진란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며, 후세라도 적용했다면 또한 어찌 금일 같은 암울함이 있겠는가? 그러나 점점 사라지고 또 표장表章의 전례典例마저 받지 못했으니 어찌 개탄치 않겠는가? 비록 그러하나 이른바 성쇠에 유관하고 원기와 동류하는 이는 처음부터 시대의 명암으로 인해 가감이 있을 수 없으니, 뒷날 지덕자知德者들은 바라건대 상고할 것이다. 이에 명하기를,
 예부터 사람 평가는 그 무리로 하였으니, 군자는 바르고 소인은 추하다. 그 무리 판이함은 흑백이 나뉘듯, 그러기에 성인이 북돋우고 억제했다. 국운이 기울어 당쟁이 퍼지니, 흰 것을 검다하고 음이 이에 양을 해쳤다. 바른 식견 없으니 그 누가 명변明辯할까? 칠흑 같은 밤 외로운 등불 환성재선생喚聖齋先生계셨다. 그 주장 꺾였으나 그 의리 찬란하니, 천정天定을 기다려 그 공로 드러났다. 주저하는 저 소인들 땀 흘리며 두려워하니, 묘도墓道에 크게 새겨 후세에 고한다.
                                  계묘년 2월 하순 후학 은진 송재성 근찬
神道碑文
喚醒齋河先生之歿今將四百年矣而墓道尙闕顯刻之碑鳴呼何其晩也國朝自黨禍以來君子小人之分明而駸駸然至於義理晦塞薫猶雜進國隨而亡則有識之士益思先生而不忘矣後孫伐石之役乃在此時其亦有待於爲昏衢一燭耶鬯孫載文求余以辭以余爲華陽夫子後文忠公孫也顧余末學有不敢當而高景曠感者在亦何能辭竊惟陰陽消長之相勝負固天道之不能無者而聖人示之以扶抑之義者蓋出於憂世之至意也故當陰之剶陽也必有人焉爲之黙運陰扶以防贏豕之蹢躅而基異日之來復則其言雖屈於一時而終伸於百世天地有所賴而不至晦塞苦人者踓窮而在下其生也實關盛衰之運而氣言浩然與元氣同流苦先生豈非其人耶先生以卓犖之資稟剛毅方直之其早受學於南冥先生之門又與栗谷牛溪兩先生爲道義交當穆陵癸未間黨論乖張栗牛兩賢爲群壬詆誣至於三司幷起則消長之幾間不容髮而滿庭噤黙無敢明言則正所謂殆哉岌岌矣先生時以閒僚獨上章極言淑慝之分以至九重動色一時聳然踓雖累被沮抑其言終不用而一線之陽賴以不墬愈久愈彰則其扶抑之功豈少也哉先生諱洛字道源晋陽河氏以麗朝侍郞拱辰爲登譜祖自後歷世多貴顯八國朝漢城判尹游爲先生六世祖曾祖應千進士祖瀅縣監考麟瑞號風月軒俱中生進妣豊襄趙氏大將協女先生以中宗庚寅生于晋之水谷里第先生有二弟曰覺齋沆曰永生先生與覺齋公一室征邁學業夙就一時稱難爲兄弟嘗魁司馬兩試用剡薦爲王子師傅篤於孝友事親生死克盡禮塤箎湛翕有春津風及覺齋公先歿踽凉不自勝苦無生意中歲移寓尙州西崖柳文忠公適莅守是州首訪先生講論經禮契誼甚厚及遞歸爲州人述去思碑文及壬辰亂作州牧金澥招集鄕兵請議軍務先生奮然曰一死報國是吾志也卽操弓上馬與其系子鏡輝率衆數十人馳入州城賊兵奄至先生度衆寡不能敵急呼其子曰此吾死所汝其歸保家屬也鏡輝泣曰父巳死辦子尙何歸遂同時死之事聞父子幷以忠孝蒙旌後又贈先生承政院左承旨初葬尙州後遷水谷先兆下坐壬原先生無嗣取從姪子之卽松亭受一守肯齋天一季弟鏡輝生員孫男璿主簿有文行以下不盡錄鳴呼先生早從賢師友其學正矣居家孝友其行篤矣臨亂殉身其忠至矣然世之以學行節義稱者尙多其倫則是未足爲先生之至者惟其明淑慝之分而不亂於群扶正論於消長之際者非卓識正見出於人而深有得於聖人人作易之義者能然乎哉是則殆可謂建不悖俟不感而先生之大者在是矣鳴呼使癸未疏之言用於當世可以消黨禍於未然而必無壬辰亂用於後世則亦豈有今日之晦塞矣而沈淪歿世又未得節惠表章之典寧不慨哉雖然其所謂關盛衰與元氣同流者初不以顯晦有加損也後有知德者尙有以考之也乃爲之銘曰 惟古觀人必以其類以陽則正以陰則醜其類旣異苦分白黑是以聖人嚴於扶抑邦運偏陂黨議乖張指白爲黑陰乃剶陽不有正見孰辨而明長夜孤燈曰有喚醒其言雖屈其義孔顯俟天之定其功乃見彼媕阿者能不泚顙大刻于阡以告茫茫
                                      時癸卯大壯之下浣後學恩津宋在晟謹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