松亭公 河受一 事蹟碑文
松亭公 河受一 事蹟碑文
 송정松亭 하선생은 조선 선조시대에 명덕名德을 향유한 진주의 유현儒賢이다. 대저 영우嶺右의 도학은 산해 선생에 이르러 그 개화기를 형성하였고, 절의의 전통적인 사풍士風 또한 이때부터 정립되었다. 그러므로 명문冥門에는 수많은  위인 석덕碩德이 쏟아져 나와 때마침 누란의 위기에 처한 방운邦運을 부립하였고, 백화가 난만한 성리학의 금자탑도 이 무렵에 최성最盛하였다. 각재선생은 산해문정山海門庭의 고족高足으로 그 의발衣鉢을 전수하였고, 선생은 다시 그 심학心學을 전수하여 필생토록 경의의 진전眞詮을 유감없이 선양하였으니, 선생은 곧 산해도학의 정맥正脈이요, 고문풍古文風을 영우嶺右에 진작시킨 선구자이다. 당시의 문풍文風이 상질尙質에 치우쳐 즐겨 쓰던 난삽難澁한 진언陳言이 도리어 사지詞旨를 해친다고 우려한 선생은 간결청아簡潔淸雅한 고문의 부흥에 심혈을 쏟아, 편마다 비단을 수놓고 구마다 꽃망울을 토하여, 마침내 시대의 문체를 혁신하고 후도에게 숙율문菽粟文을 유여遺與하였으니, 선생문집의 진귀함은 부지자와 더불어 거론하기 어렵다. 무릇 등림鄧林의 미재美材는 혹 당일에 칭송받지 못하여도 백세를 기다려 그 비상함을 천하에 과시하고, 곤강崑岡의 주옥은 혹 당시에 인정받지 못하여도 천추를 겪으면서 그 진가를 사해에 떨치며, 선생의 문장은 혹 시인時人이 주지하지 못하여도 사백년을 지나면서 그 파란波瀾은 암연暗然히 일장日章하여, 미재나 주옥처럼 광채를 발하니 그 고문풍을 부흥시켰다는 논리가 어찌 과장이라 하겠는가. 그러므로 선생 문풍은 날로 파급되어 후세를 풍미하였고 지명당 세응知命堂世應, 회봉 겸진晦峯謙鎭같은 후손이 층출層出하여 고문을 국중國中에 폈으니 이 또한 우연하다 하겠는가? 또한 선생의 낙수암落水菴은 낙수암落水巖에 위치하니 두류 영맥이 완연蜿蜒히 남주南走하여, 그 오십 리허에 국사봉이 흘립하고 다시 오리를 구비쳐 결국結局한 당처에 산협의 계수가 합류하여 비류낙하의 장관을 이룩하니, 이곳이 명승지 낙수암이다. 이 천간지비天慳地秘한 곳에 오세손 태와台窩 필청必淸은 각봉재覺峯齋를 이곳에 이건한 바 있고 정조正祖 십삼년 기유己酉에는 칠세손 함와涵窩 이태以泰의 주관으로 일재一齋를 창건하여 선조의 우모소를 조성하니, 물각유주物各有主라는 고어를 다시 한 번 상기하게 한다.
 역중에 산처하는 수천 운잉數千雲仍이 선생의 당정을 길이 보전하고자 광복光復 50년 갑술甲戌에 본 암을 정수하고, 다시 익년엔 선생 사적비를 마련하여, 그 학學과 업業을 무궁히 천양할 것을 논정하고, 주손冑孫 병태炳台가 그 문친門親 영복永福 석근錫根과 함께 와서 비문을 인찬寅巑에게 청하므로 문득 고루固陋함을 잊고 감히 행장을 상고詳攷하여 쓰기를 선생의 휘諱는 수일受一이요 자字는 태역太易이며 진주 인이다. 시조 고려 충절신 증문하시랑평장사 휘 공진始祖高麗忠節臣贈門下侍郞平章事諱拱辰은 거란과의 전쟁에 단신으로 적진에 나아가 삼촌단설三寸短舌로 대군을 척퇴시키고 고려혼을 발양하여 살신성인하였고, 후손이 대대로 현창하여 국중 저족이 되었으며, 문정공文貞公 휘諱 시원侍源은 선생의 구대조九代祖이고 이전二傳하여 휘諱 유游는 조선조의 한성판윤이며, 증조曾祖의 휘諱 형瀅은 황간黃澗 현감이고 조祖의 휘諱 희서希瑞는 성균 생원이니 명옹冥翁과는 도의교가 돈독했으며, 조비祖妣 백천조씨白川趙氏는 부사 상瑺의 여女로 부덕을 갖추어 여사내칙소학가례女史內則小學家禮를 독송하였고, 고考의 휘諱 면沔은 호조정랑이며, 비妣는 공인 함안 조씨恭人咸安趙氏 참봉 정견廷堅의 여女로 조선 명종明宗 팔년 계축癸丑 정월 이십이일에 진주 수곡의 정곡井谷 세제世第에서 선생을 낳으니, 총명이 탁월하고 진퇴에 절도 있어 조비祖妣의 사랑을 다몽多蒙하였고, 겨우 해어解語할 무렵 조모가 천자와 사기를 구전하자 그 청일지십聽一知十하는 재능에 좌우가 경탄하였다. 칠세에 대학 중용을 습득하였고, 다시 종숙 각재옹覺齋翁에게 사사하여 치지와 격물에 갈력하였으며, 당시는 거세가 과문을 숭상하였으나 선생은 홀로 시체時體를 불긍不肯하고 오직 고문에 정력을 쏟았다. 선조宣祖 십 삼년 경진庚辰에 외우外憂를 당하기 전에는 누월의 친환에 지성껏 시탕하고, 임종 시에는 단지주혈斷指注血을 행하였으며, 장후에는 여묘盧墓로 종상하였다. 이십 이년 기축己丑엔 생원시生員試에 급제하고 이년 뒤 신묘辛卯엔 문과에 등제하였으며, 임란에는 사직의 망극한 화난을 숙야로 우념한 끝에 동지와 함께 의병 사백을 모집하여 바야흐로 멸적의 기세가 충천하였으나, 불의에도 종숙 환성재喚醒齋공 락洛과 계제季弟 경휘鏡輝가 전사하고 또한 군량의 궤핍으로 말미암아 해산하여 웅지를 성취하지 못했으나, 그러나 그 비분강개悲憤慷慨한 우국단충憂國丹衷은 잠시도 억제할 수 없었다. 삼십년 정유丁酉에는 선산 인동지방에 유리流離하여 길야은 선생 묘吉冶隱先生墓에 참배하였고, 다시 매부 영천수榮川守 이유함李惟諴가에 체류하면서 안동의 도산서원을 참알하고 조월천趙月川과도 창수한 바 있다. 익년 무술에 창락찰방에 임하였다가 이년 후에 성균 전적典籍을 배하였고, 다시 영산현감縣監을 거쳐 삼십 팔년 을사乙巳에는 상주 제독提督을 제수 받았으며, 이년 후에 형조좌랑을 배수하였고, 사십 일년 무신戊申에는 이조정랑에 승진하였다가 경상도사에 임하였으며 치사 후 수년간을 우유자적優游自適하다가 광해군 사년 임자壬子 정월 십삼일에 연수 육십으로 몰세하여 수곡의 세성산 자좌원子坐原 선조 조先祖兆 하에 장葬하니 우금 삼백 팔십 삼년이다.
 배配 숙인 파평윤씨坡平尹氏는 진사 언례彦禮의 여로 일녀를 두니 조징송趙徵宋의 처妻요,  배配 숙인淑人 밀양손씨密陽孫氏는 참봉 천뢰天賚의 여로 삼남 삼여를 두니 남은 완琬 찬瓚 관瓘으로 관瓘은 출후하고 여서女婿는 이육李堉 정지鄭墀 조징기趙徵杞며, 완琬의 남은 자온自溫이요, 찬瓚의 삼남 오녀는 자징自澂 자호自灝, 자혼自渾 및 정세주鄭世柱 강준姜埈 이위李蘤 윤사정尹思正 송정두宋挺斗의 처妻며 관瓘의 이남 일녀는 자겸自濂, 자형自衡 및 노전盧洤의 처妻이고, 자온自溫의 자는 억檍이며 억檍의 자는 세희世熙니 효행으로 정문을 받들었고, 자는 윤청胤淸이며 자는 달중達中이고 여餘는 불록不錄한다.
 아아! 교악대천喬岳大川이 종영하고 육기하여 현인을 탄강함은 곧 하늘의 뜻이니, 장차 대용하기 위해서다. 그렇다, 선생의 재덕은 국사國師로 등용하여 일국의 문정文政을 감당할 만 했건만, 등과한 지 미구하여 미증유의 대란을 만나, 육칠십년의 형극생활荊棘生活을 겪는 동안 당쟁은 날로 심하고, 묘당은 장부藏否를 구분하지 못하여 선생으로 하여금 낭서郞署를 미면하게 하니, 따라서 흉장胸藏한 대지大志를 미전한 채 귀전부歸田賦을 읊으면서 임천에 은둔하여 종신하자 이 점을 세인이 지금토록 개탄한다. 하늘이 석학을 내림은 그 무슨 뜻이며, 그 수세를 불우不佑함은 또한 무슨 뜻인가! 비록 그러하나 선생은 충절의 묘예로 배태하여 도학의 가풍에 함유하였고, 산해의 심법을 전수받아 택심과 율신에 남주의 귀감이 되었으며, 덕망과 사장이 일세를 지배하였고, 그 사친에는 지체를 봉양함에 괴작이 없으며 이제二弟와의 우애는 옛 강굉姜肱과 필적할 만했고, 제향을 당해서는 성결誠潔을 다하여 기명器皿의 세척과 묘우廟宇의 청소를 궁행하였으며, 동정에 절제 있고 언소言笑에 법도 있어 궤도를 벗어남이 없었고, 교우에 부잡하고 접인에 수성輸誠하여 일찍이 애안崖岸을 불설不設하였으며, 명창정궤明窓靜几에 단좌하여 완서琓書와 저술로 일생의 업을 삼았다. 또 육처자와 목친족에 그 도를 다하였고, 정사의 시비와 재물의 득실에 간여하지 않았으며, 일문이 연장連墻하여 거하되 간언間言이 불입하였고, 오직 안분자수安分自守와 양졸구원養拙丘園을 좌명 삼았으니 그 문교文交의 습習과 예양의 풍은 옛 최산남崔山南과 유하동柳河東에 비견할 만하다. 그 문장은 용력함이 깊고 수공함이 멀어 반드시 의리에 근거하여, 전아하고 조창條暢 하였으며, 시 또한 청원淸遠하고 발속拔俗하여 인구에 회자된다. 이제 선생 생애의 개략을 종관하면 생존하여서는 유현으로 추앙받아 그 교화는 만인에게 미쳤고, 몰세하여선 대각서원에 봉안하여 해마다 향사 드리며 경앙하니, 실로 고금 희유의 복록이라 하겠다. 누가 첨모瞻慕하지 않겠는가. 또 천백 운잉이 경향에 번성하여 인물과 문한이 대대로 부절하니, 이로써 선생의 유방과 음덕은 백세에 이르도록 불멸할 것을 알 수 있다. 어찌 장하지 아니한가! 이곳을 찾는 행여行旅 여러분은 모름지기 이 비문을 정독하고 석면에 수광垂光하는 선생의 사적을 완미하면, 스스로의 성찰에 유익함은 물론이요, 나아가서는 세교世敎의 진작에 일조가 되리라 확신한다.
 광복 오십일년 을해 춘분절光復 五十一年 乙亥 春分節
                                   후학 삭녕 최인찬 근찬後學朔寧崔寅巑謹撰
                                   후학 진산 하용문 근제後學晋山河龍雯謹題
                                   후학 문소 김종길 근서後學聞韶金鍾吉謹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