滄洲公 河憕 事蹟碑文
滄洲公 河憕 事蹟碑文
 무릇 현인군자賢人君子로 태어나, 살아서는 도덕을 베풀어 생민生民을 교화敎化하고 죽어서는 서원에서 향식享食하여 방명芳名을 천추에 선양宣揚하나니, 선조조宣祖朝 진사 창주滄洲 하선생河先生은 진주가 낳은 현인군자賢人君子가 아니겠는가,! 광복 계미년 경향京鄕의 선생 후손이 주사州士와 상의相議하기를 세쇠도미世衰道微한 오늘날 패륜悖倫과 사설邪說이 난무亂舞하는 계세季世에 즈음하여 선생의 지업과 덕학을 풍비豊碑에 새겨 윤상倫常을 들추는 한편, 후대로 하여금 길이 법法 삼게 함이 시급한 일이라 논정하고 후손 상욱尙郁, 오봉五鳳, 병선炳先이 나를 찾아와 그 문文을 청請하므로 문득 사양辭讓하지 못하고 삼가 쓰기를,
 선생의 휘諱는 증憕이요 자字는 자평子平이며 진양인晋陽人이다. 고려 좌사랑중左司郞中 증문하시랑동평장사贈門下侍郞同平章事 휘諱 공진拱辰이 시조始祖이고, 이로부터 벼슬과 문필文筆이 면면綿綿히 이어와 증조曾祖의 휘諱 우치禹治는 안주목사安州牧使이고, 조祖의 휘諱 숙淑은 승사랑承仕郞이니, 어관포선생 득강魚灌圃先生得江의 여女를 취娶하여 성균진사成均進士 증순충보조공신 자헌대부 이조판서 진평군贈純忠補祚功臣資憲大夫吏曹判書晋平君 휘諱 위보魏寶와 문과文科 사간司課 휘諱 진보晋寶 및 성균생원成均生員 휘諱 국보國寶를 두었고, 고考 진사공進士公은 사천 이씨泗川李氏 참의 륜參議綸의 여女와 진주강씨 우佑의 여를 취娶하여 구남九男을 두니 선생은 제 오자第五子로 명종 십팔년 계해에 내당內塘에서 태어났다. 나면서부터 영재가 풍발하여 팔세에 이미 경사經史를 통달하였고 구세 때 생비 이부인生妣李夫人 상喪을 당하여서는 애훼哀毁하고 집례執禮함이 성인을 지나쳐 주위가 경탄하였으며 계부季父가 무육無育하여 선생이 입후하니 모부인 강씨는 성재선생誠齋先生 휘諱 응태應台의 손孫이요 사직司直 휘諱 렬洌의 여女로 임난에 항적 순절하여 정려가 내려졌다.
 선생은 기질이 인후하고 특기特己에 독실篤實하여 접인接人에 화기가 넘쳤으며 천성이 효우하여 부모를 섬김에 정성定省의 절節과 지체志體의 양養을 다하였고 관혼상제冠婚喪祭는 반드시 가례를 준수하였으며 제질弟姪을 인궁因窮에서 구하여 공락共樂함은 물론 기아飢餓에서 신음하는 빈자에겐 창고를 열어 시혜施惠하였고 질姪 지상智尙이 십세 때 적賊에게 생포되니 심력을 쏟아 구출하였으며 제 변忭이 정유 난에 체포되자 선생은 이십년에 항恒한 혈성血誠으로 제 협悏과 부산을 삼왕래三往來하면서 마침내 생환하게 하니 어찌 일가의 경사에 그쳤겠는가. 그 애인하고 호의好義함이 이와 같았다.
 선조 이십 사년 신묘에 진사시에 합격한 후로는 미증유未曾有한 대란大亂을 겪느라 과거마저 단념하고 개연히 구도求道에 주심注心하여 선현의 심법체험心法體驗에 여념이 없었으니, 평거平居에 화려華麗한 의복을 입지 않았고 부허浮虛한 말을 구외口外에 불출不出하였으며 집신執身이 매우 엄하여 언제나 소학내편小學內篇을 실천하였고, 임하林下의 정궤靜几에서 고서를 남김없이 완미玩味하되 긴요한 점은 반드시 질의하고 강론하여 불지를 방과放過함이 없었으며 일찍이 후도後徒에게 이르기를 성현의 교훈을 심중에 새겨 숙습熟習하면 자연히 이치를 깨닫고 논論하였다. 평생에 남명선생 문하에서 친자親炙하지 못함을 한恨하더니 전란에 퇴락한 덕천서원 중건에 원장 이모촌李茅村 정瀞과 함께 진력하여 선조 이십 구년 병오에 낙성하고 중건기를 저작著作하였으며, 이어 선생이 원장을 맡아서는 남명학기를 한천록寒泉錄에 의하여 분류 간행하였고 또 관포집灌圃集이 전화戰禍에 탕실蕩失된 것을 초고草稿를 수집하여 판각하였고, 명륜明倫은 선계를 밝히는 데 있음을 역설하고 창보創譜하되 잘못된 세계를 변정辨正하였으며, 다시 진양지를 편저하여 지방사를 밝히니 그 존사尊師하고 계후啓後한 공과 저술하여 위도衛道한 업은 백세토록 수광垂光할 것이 자명自明하다.
 선생은 일찍이 한강 정선생을 신당新塘에서 뵙고 수일을 머물면서 남다른 장려獎勵를 입고 의리를 발굴한 후로는 자주 간찰로써 학문을 논하고 덕천서원사를 자문하였다. 만년엔 성부사 여신成浮査汝信, 한조은 몽삼韓釣隱夢參과 의교하여 강월江月에 음시吟詩하고 춘사春社에서 강의하며 노년을 느긋하게 즐기더니 홀연히 인조 이년 갑자 시월에 향년 육십 이세로 서거逝去하여 오곡리烏谷里 갑자원甲子原에 장葬하니 우금于今 삼백 팔십년이다. 배 진주 강씨는 현령 로縣令潞의 여로 선생과 동년에 생졸하였고 묘는 합폄合窆이며 무자無子하여 제 현감 휘諱 성惺의 자子 휘諱 달도達道를 후사後嗣로 삼았다.
 오호라 선생 같은 석덕으로 일찍이 득위得位하여 대현大顯하지 못함을 지금토록 개탄하는 이 많으나, 그러나 선생은 원래부터 선현을 본받아 수도하고 행도行道하며 전도를 사명삼아 사문斯文에 진공秦功함이 지대하다. 그러므로 숙종 이십 팔년에는 주사州士들이 임천서원을 창설하여 선생을 포함包含한 오현五賢을 봉향하니, 이는 고어古語에 이른바 향선생몰鄕先生沒에 서원을 설치하여 시축尸祝하고 창도倡道함을 표준삼은 것이다. 후록後祿 또한 창성昌盛하여 세인이 흠선欽羨하니 이는 왕양汪洋한 선생 유택流澤의 소치所致이다. 아름답지 아니한가! 명사銘飼 읊어 이르기를
 아아! 선생 도학道學 외외巍巍하여 영우嶺右의 샛별 이구尼丘 심법心法 유심擩深코자 그 지조志操 독실篤實했네, 영특함이 탁월하여 경서經書 백가百家 섭렵涉獵했고 송창松窓에서 도등挑燈하며 성리학 추구追究 생포된 제질弟姪 생명 혈성血誠 쏟아 구출했고 가난에서 신고呻苦하는 빈민貧民에 시혈施血했네. 환로宦路가 무슨 소용 초개같이 버리고 산자수명山紫水明 정한 곳에 많은 후도 가르쳤네. 선생 고풍비先生高風碑에 새겨 영모재永慕齋에 높이 거니 저 강파江波 더불어 천년토록 황황皇皇하리.
            檀紀四千三百三十六年(西紀二00三年)癸未夏至節 朔寧 崔寅巑  謹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