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정공 하경복 연보
양정공 하경복 연보
1377년高麗 禑王 3,1세
       진주 서면 이하리수곡면 사곡리에서 탄생하다.
1402년 太宗 2, 25세
       무과 초시에 급제하다.
1407년 太宗 7, 31세
       사복시부정司僕寺副正, 9월 25일 세자가 정조하례正朝賀禮를 위해 명나라에 갈때 사복관司僕官으로 수행하다.
1410년 太宗 10, 34세
       무과 중시에 합격하여 첨총제로 초수超授된 후 상호군에 오르다.
       5월 21일 길주도 조전助戰지병마사로 떠날 때 궁시弓矢를 하사받다.
       6월 1일 경원 병마사에 제수되다.
1411년 太宗 11, 35세
       1월 12일 호용시위사 절제사에 제수되다.
       3월 30일,“경원진을 파하니 병마사 하경복은 돌아오라”는 명을 받다.
1414년 太宗 14, 38세
       동지총제로 승진하여 함길도 도절제사에 제수되다.
1418년 太宗 18, 42세
       5월 9일 좌군동지총제로 승진하다.
       6월 24일 의용위장군절제사義勇衛掌軍節制使로 제수되다.
       8월 12일 삼군도진무에 제수되어, 8월 27일 우군총제로 승진하다.
1419년 世宗 1, 43세
       7월 4일 밭 20결을 하사받다.
1421년 世宗 3, 45세
       5월 4일 상왕과 왕이 종루에 거둥하여 관전하는 석전石戰에 참가하다.
      「척석군擲石軍 150여명과 방패군防牌軍 300여명이 어울려 싸우는데, 방패군의 총제 하경복, 상호군 이징석 등이 기사騎士를 거느리고 공격하였으나 번번이 패하였다. 경복이 돌에 맞아 다치자 상왕이 걱정하며 “경복의 무리가 크게 다         치지 않았는가?”하고 물으니, 경복이 억지로 일어나 누樓에 오르면서“크게 상하지는 않았습니다.”하였다.」
1422년 世宗 4, 46세
       윤12월 26일 함길도 병마도절제사로 제수되다. 이후 10년간 연임하다.
1423년 世宗 5, 47세
       12월 11일 우군도총제로 승진하다.
1424년 世宗 6, 48세
       9월 25일 전일前日에 여진 300여명이 경원부에 침입했을 때 장군이 기병을 이끌고 나가 물리친 후 노획한 전과를 상계하니 임금이 호군 강중경을 보내 내온內醞 210병과 말, 옷 등을 하사하였다.
       11월 2일,「임금이 이르기를“함길도 도절제사 하경복이 변방에서 근일에 승전한 공로가 있는데 그 어미가 멀리 진주에 있고 또 집이 가난하니 어미를 받들지 못하는 그 마음이 어떠하랴. 임금으로 신하를 부리는데 그들의 마음을 알         아야 할 것이다.”하고는 곧이어 그 어미에게 능‧견綾絹 각 1필과 쌀 30석을 내리다.」
       12월 19일 아우 지곤남군사知昆南郡事 경리(참의공)와 함께 임금에게 사은전謝恩箋을 올리다.
1425년 世宗 7, 49세
       1월 11일,「호조와 이조에 명해“함길도 도절제사 하경복의 가족이 서울에 있으니 다른 예에 의해 녹을 주라”하였다.」
       7월 11일 함길도 도절제사의 임기가 두 차례나 만료되어 이조에서 직무를 대신할 자를 찾기가 어렵다고 논의한 후 성달생을 후임으로 의논하였다. 뒤에  성달생이 평안도 도절제사로 천거되니 장군은 다시 유임되다.
1426년 世宗 8, 50세
       6월 8일 호군 홍사석이 어찰御札과 하사한 내구마內廐馬, 옷, 갓, 신 등을 함길도 도절제사 진중陣中으로 가져오다.
       7월 18일 임금이 모부인에게 쌀 30석을 내린데 대해 아우 참의공이 사은전謝恩箋을 올리다.
1427년 世宗 9, 51세
       3월 20일 경직京職 의정부 참찬을 겸하게 되어 자급資級이 높아지다.
       12월 20일 “만약 북변이 안정되면 귀향하여 모친을 뵈는 것이 좋겠다”는 전지를 받다.
1428년 世宗10, 52세
       1월 4일,「함길도 도절제사 의정부 참찬 하경복이 내현來現하니 임금이 인견引見하였다.」
       1월 7일,「“참찬 경복이 어머니를 뵙기 위해 진주로 돌아가니 경상감사에게 전지하여 그 어머니를 위로하는 잔치를 열도록 하고 미두米豆 30석을 내려라”라고 명하였다.」
       2월 3일,「임금이 예조에 전지를 내려“함길도 도절제사 하경복이 본 
       도本道로 돌아가니 전별餞別하라”한 후, 또 지신사 정흠지, 대언 김자 등에게  명하여“내선內膳을 싸가지고 가서 그를 위로하라”하였다.」
1430년 世宗12, 54세
       7월 3일 판좌군도총제부사로 승진하다.
       8월 2일 판좌군도총제부사에 승진된 것을 사은謝恩하는 전戔을 올리다.
       12월 30일 토표土豹를 잡은 공功으로 옷감 한 벌을 하사받다.
1431년 世宗 13, 55세
       7월 17일,「“하경복을 다시 함길도 도절제사로 삼고 새로 제수한 성달생의 길떠나는 것을 정지하라”고 명하였다.」
1432년 世宗 14, 56세
       3월 18일 내직으로 들어와 판중추원사(종1품)에 보직되다.
       9월 5일 모부인의 나이가 75세이니 귀향하여 어머니를 봉양하겠다고 상소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1433년 世宗 15, 57세
       7월 4일 진서陣書를 편찬하는데 총재로 참여하여 형판 정흠지, 대제학 정초,병조우참판 황보인 등과 함께『계축진설』을 편찬하여 바치다.
       12월 12일 함길도 도체찰사로 임명받고 참판 심도원과 함께 현지로 떠나다.
1434년 世宗 16, 58세
       4월 3일,「임금이 사정전思政殿에서 잔치를 열어 함길도 도체찰사의 노고를 위로 하였다.」
1435년 世宗 17, 59세
       2월 1일 의정부 좌찬성에 임명되어 의금부 제조를 겸하다.
       4월 18일,「임금이 무과 응시생들의 격구를 시험하고 사정전에 나아가 좌의정최윤덕, 찬성 하경복 등을 위해 잔치를 베풀고 위로하였다. 함길도 도제사 김종서가 참예參預하고 대군大君과 여려 군君들이 시연侍宴하였다. 최윤덕의 군관         상호군 최숙손 등 18 인과, 하경복의 군관 사정이사창 등 6인을 함께 불러서 먹였다.」
       9월 4일,「“함길도 도절제사 김종서의 어머니가 병중病中이니 불러서 어머니를 뵙게 하고 함길도 도순검사로 떠나는 하경복으로 하여금 그 사무를 겸하여 처리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9월 6일 함길도 도순검사都巡檢使로 길을 떠나니 야인을 방비하고 군기軍紀를 점검하기 위해서였다.
1436년世宗 18, 60세
       5월 9일 도순검사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 함길도 지방의 괴질로 죽은 사람 의 수數를 실제보다 많이 상계하였다는 사유로 파면되다.
       5월 24일,「사헌부에서“하경복을 엄한 형벌로 다스려야 합니다.”하고 상소하였으나 임금은 고향으로 내려가 모친을 봉양하라는 명을 내렸다.」
       12월 27일 경상우도 병마도절제사에 서용되다.
1437년 世宗 19, 61세
       8월 6일,「임금이 함길도 도절제사 김종서에게 전지하는 내용에 전前 도절제사 都節制使 하경복이 전일前日 임금에게 헌의獻議한 것을 인용하였다.」
1438년 世宗 20, 62세
       8월 17일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임지에서 별세하다.
       9월 8일 임금이 제문祭文을 내리다.
       10월 19일 임금의 특명으로 백석동 오향午向에 예장禮葬하다.
1456년 世祖, 2년
       3월 8일,「직제학 양성지가,“무성묘武成廟를 세워 신라 김유신, 고구려 을지문  덕, 고려조 유금필, 강감찬, 양 규, 윤 관, 조 충, 김취려, 김경손, 박 서,김방경, 안 우, 김득배, 이방실, 최 영, 정 지, 그리고 본조本朝의 최윤덕과 하경복         을 배향하게 하소서.”라고 상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