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장공 하한 연보
강장공 하한 연보
1427년 세종 9년
    호군(정4)의 직으로 세자가 명나라에 조현할 때 시종관에 뽑히다.
1433년 世宗 15년
    상호군정3으로 근무하다.
    2월 8일 임금이 경회루에 거둥하여 상호군 하 한, 홍사석 등 30명에게 대오를 갈      라서 과녁을 쏘도록 명하여, 하 한河漢의 제3대가 많이 맞추자 활 하나씩을 하사      하다.
    9월 호군 박 배 등을 거느리고 갑산을 수자리防戍하다.
1434년 世宗 16년
    5월 28일 회령진 첨절제사로 전임轉任되다. 
    세종은“회령진은 야인의 침노가 잦은 중요한 곳이라 장수의 자손 하한河漢 이 능      히 감당할 만하므로 대신과 의논하여 이 직을 제수 한다”하였다. 공公이 회령진      에 있을 때 야인들이 영북진을 지키는 장수를 해害하려 한다는 말이 떠돌았다.       이 때 우의정 최윤덕이“영북진 절제사 이징옥은 백안수소에 있고 첨절제사 하한      河漢은 회령에 있사온데 회령진은 야인이 침노하는 첫 길목이므로 하한河漢이 신      진인사로서 호용한 재주가 있더라도 직위가 높은 노련한 장수만 못하오니 이징옥      을 회령으로, 하한을 백안수소로 옮김이 마땅하다”고 주청하였으나, 도승지 안승      선은“야인들은 여우 같은 무리들이라 인의仁義로서 회유할 수 없사오니 하한河漢       에게 계속 회령진을 맡겨야 한다”고 주청하였다. 이 때 세종이 도승지 안승선의      말을 따르니, 조정에서“북방의 일로 근심하지 않고 성교聲敎가 삭막(朔漠-북쪽 황폐       한 땅)에 미치는 것은 공公의 父子양정공과 강장공 힘이다”라고 하였다.
    12월 2일 영북진 첨절제사로 전임轉任되다.
1435년 世宗 17년
    3월 27일 함길도 감사 김종서에게,“절제사 이징옥을 판회령도호부사로, 하 한河漢       을 영북진첨절제사로, 경卿을 함길도 도절제사로 옮겼다. 모든 방어에 관한 분포      배치 등은 신임 감사와 상의하여 하라”하고 전지하였다.
1436년 世宗 18년
    6월 23일 지종성군사知鐘城郡事에서 파면되다.
    실록에, 상호군 하한河漢이 지종성군사일 때 군관 갑사 양장수가 야인과 몰래 교      역한 것을 감사에게 알려 파직되게 하였다. 이에 분함을 참지 못한 양 장수는 하      한이 절제사일 때 소와 야인의 말을 바꾸었다고 사헌부에 고하였다. 이로 인해       대신들의 의견이 대립되니 왕은“장수와 졸병이 서로 고소하는 것을 추문推問할       수 없다. 다만 하한의 벼슬만을 파면하라.” 고 하였다.
1438년 世宗 20년
    4월 21일 함길도 경력종4품으로 轉任되다.
    4월 28일 왕이 영의정 황 희 등을 불러“경원수慶源守 이징옥이 모친상을 당하고      늙은 부친이 있어 군무에 전심하지 못할 것이다. 함길도도절제사 김종서는 병조      참판 김효성이 이징옥을 대신하여 경원을 지킬 만하다고 하나 김효성도 역시 늙      은 모친이 있다. 신설한 경원부는 북방의 거진巨鎭으로 자손 만대의 대계大計인       것인데 징옥과 효성이 영구히 맡지는 못할 것이다. 이제 경卿 등은 직위의 고하高       下에 구애받지 말고 후임자를 추천하라.”하였다. 황 희 등이 대호군 성 승(성달생의       아들, 성삼문의 父), 이종번, 박이령, 함길도경력 하한, 지사천현사 하경리, 여연절제      사 이종효 등 11명을 공동 추천하였더니, 왕은 즉시 김종서에게 전지하여 그 가      부可否를 묻게 했다.
     8월 17일 부친 양정공이 별세하여 장례일로 환향하다.
1442년 世宗  24년
     8월 6일 길주 목사로 제수되다.
1447년 世宗 29년
     7월 1일 내직에 들어와 중추원부사에 보직되다.
     12월 21일 조모 보성선씨께서 90세로 별세하여 장례일로 환향하다.
1449년 世宗 31년
     8월 2일 야선이 요동에서 사변을 일으키자,“……역마로 전前지중추원사 이징석      과 전前도절제사 이징옥을 양산에서 부르고, 하한河漢과 박이령을 기복起復시키라”      고 명하다.
     8월 6일 조모상복중祖母喪服中이었으나 기복출사起復出仕하여 황해도 도절제사겸       황주목사로 제수되다.
 1450년 世宗 32년
      윤1월 27일 판영변도호부사로 전임轉任되다.
     문종 즉위 후, 8월 7일 인순 부윤으로 전임되었다가 8월 11일 동지중추원사로       내직에 들어가다.
1451년 文宗 1년
     6월 20일 경상우도처치사에 임명되어 7월 5일 사조辭朝하니 임금이 인견引見 하       다.
1452년 文宗 2년
    단종 즉위 후 10월 1일 경상좌도도절제사로 임명되다.
1453년 端宗 1년
    7월 1일 중추원부사로 내직에 들어가다.
1454년 端宗 2년
    6월 27일 경상좌도도절제사에 제수되다.
1455년 世祖 1년
    윤 6월 11일 노산군이 세조에게 선위하다.
    11월 17일 경상도관찰사, 경상좌도절제사 하한河漢, 경상좌도처치사, 경상우도절      제사, 경상우도처치사, 전라도관찰사, 전라도도절제사, 전라도처치사, 충청도관찰      사, 충청도절제사, 충청도처치사, 황해도관찰사겸병마절제사, 강원도관찰사겸병마      절제사 등에게 유시諭示하고 잔치를 내리다.
    12월 27일 원종공신 2등에 녹훈되다.
1456년 世祖 2년
    중추원사에 보임되다. 
    7월 5일 정창손‧강맹경‧권남‧신숙주 등에게 품계를 내리고 하한河漢을 중추원사로      삼다.
1457년 世祖 3년
    4월 7일 경상좌도처치사에 임명되다.
1460년 世祖 6년
    9월 27일 종친, 위장衛將, 전도절제사 하 한河漢, 부장部將 등이 충순당에서 임금      을 모시고 활을 쏘았는데 하 한河漢을 진무鎭撫로 삼다.
    10월 1일 동지중추원사에 보임되다.
    11월 6일 임금이 사정전에 나아가 상참常參-대신과 정사를 논하는 일자리에서 정사를      논하다가 동지중추원사 하한河漢을 돌아보며 말하기를“내가 양녕 대군을 보면 사      냥이 생각나고, 김 구ㆍ김 말을 보면 서적이 생각나고, 하한河漢을 보면 정토征討       하는 일을 생각하니 나는 가可한 것도 없고 불가不可한 것도 없다.”라고 하다.
    12월 26일 公이 세상을 떠나니 나라에서 부물賻物과 제전祭奠을 내리고 시호를       강장剛莊이라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