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절공 하숙보 연보
경절공 하숙보 연보
ㆍ1453(단종 원)년
   - 무과 초시에 합격하여 훈련원 녹사에 보임되었다.
      12월 5일「사용司勇 하숙보를 사복시에 출사하라.」고 병조에 전지하다.
ㆍ1456(세조 2)년
   - 무과 중시에 합격하여 가자加資되다.
ㆍ1460(세조 6)년
   - 길주판관으로 회령진절제사 임득정과 함께 야인의 굴혈을 수탐․공격하여 많은        노획물이 있었다.
   -  12월 26일 부친 강장공이 별세하여 고향으로 돌아오다.
ㆍ1466(세조 12)년
    - 통정대부로 가자加資되어 강계 부사에 보직되었다.
ㆍ1467(세조 13)년
   - 건주야인 토벌의 功으로 3등 공신에 책정되어 노비 6명을 하사 받다.
     강순 휘하의 비장으로 어유소, 남 이 등과 함께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후 때마       침 명나라가 건주야인 토벌을 위해 조선에 원군을 요청하였으므로 토벌군을 이       끌고 압록강을 건너 우미부(동가강 서쪽 흥경 근처)를 공격하여 건주 야인 본위 도       독 이만주와 그 아들을 죽이고 그 일대를 소탕하였다.
ㆍ1470(성종 원)년
   - 평안서도 절도사平安西道節度使로 제수되다.
     2월 22일 평안서도 절도사 하숙보가 하직 인사를 하니, 고령군高靈君 신숙주申叔        舟에게 명하여 의주義州 삼도三島를 기경起耕하는 사목事目을 만들어서 하숙보에게       주었다.
ㆍ1471년(성종 2)년
   -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전임轉任되다.
     7월 7일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하숙보河叔溥가 하직 인사를 하니, 임금이 인견引        見하고 이르기를, “경卿은 가서 군민軍民을 사랑하여 보호하고, 유렵遊獵을 좋아       하지 말고, 폐단되는 일을 하지 말며, 오로지 군사를 다스리는 데에 힘써서 변       방의 방비에 삼가도록 하라.” 하였다.
ㆍ1472(성종 3)년
   - 9월 26일 가선대부로 승진하여 평안도 병마절도사에 제수되다.
ㆍ1475(성종 6)년
   - 평안도 병마절도사에 연임되어 사은사 일행을 통원보까지 호송하다.
     1월 13일 평안도 절도사 하숙보河叔溥에게 유시하기를, “이번 사은사謝恩使 한명       회韓明澮 등의 호송군護送軍은 장실壯實한 군사軍士 4백 명을 뽑아 충차充差하고        경卿이 직접 통원보까지 호송하라.” 하였다.
    -가정대부(종2품, 상)로 승진하다.
     4월 11일 평안도 관찰사가 치계하기를, “사은사 행차를 호송하던 군사들이 압록       강에서 빠져죽었습니다. 절도사 하숙보, 호송장 신 주, 의주목사 반 희 등이 책       임이 있으니 추국하소서.” 하였지만 왕이 따르지 않았다.
    - 5월 12일 평안도절도사직에 잉임仍任되다.
     도승지가 서북도의 절도사 후임을 걱정하자 왕은 “숙보가 오랑캐의 실정을 잘        알고 있으니 금년에 그대로 유임시켜라” 하고, 공公에게 전지를 내려 “경卿은 올       가을에 사만仕滿하므로 체임시켜야 하겠으나, 경은 서쪽 변방에 오래 있었으므로       방수防戍에 관한 일을 잘 알아 내년 해빙解氷 때까지 잉임仍任하게 하였으니 비어       備禦에 관한 모든 일에 더욱 힘써라.” 라고 하였다.
ㆍ1476(성종 7)년
   - 8월 30일 전라도 병마절도사로 전임轉任되다.
   - 12월 5일 대사헌 윤계점이 “을미년 벽동싸움에서 만호 김 윤, 군수 윤맹지, 조       전 절제사 박양신 등이 패했을 때 포로로 잡혀간 사람과 약탈당한 가축을 평안       도 절도사였던 하숙보는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이 일은 숙보가 몰랐다       고 하나 대장으로서 백성을 지키지 못한 책임이 있으니 숙보를 가두어 국문하기       를 청합니다.” 하고 계하였더니 왕은 전교를 내려 꼭 가둘 필요가 있겠는가 하       였다.
ㆍ1477(성종 8)년
   - 을미년 ‘벽동싸움’에 대한 책임으로 중형을 받게 되었으나 정인지, 한명회 등의       변론으로 대사(大赦)되어 온성에 부처되고 2월 26일 양계에 충군되었다가 4월        25일 방면되어 진주로 낙향하다.
ㆍ1478(성종 9)년
   - 8월 20일 가선대부 형조 참판에 제수하다. 
ㆍ1479(성종 10)년
   - 10월 1일 경상도 관찰사에게 하서下書하여 “진주에 거주하는 하숙보에게 군장과       마필을 정돈하도록 하고 속히 역마를 주어 올려 보내라” 한 후, 10월 10일 병조       에 전지해서 “하숙보를 서용叙用하라” 고 하였다.
   - 10월 11일 가선대부 행 충청도 수군절도사에 제수되다.
ㆍ1483(성종 14)년
   - 2월 14일 가정대부 호조참판으로 이임移任되다.
   - 충청도관찰사로 제수되어 5월 21일 도사를 보내 빈전殯殿에 진향進香하다.
     10월 12일 “북방 양도兩道인 함경도와 평안도에 민호가 부족하니 도내 백성 중       에서 살림이 부실한 자를 골라 설득하여 북방으로 옮겨 살 수 있게 하라” 는 유       서를 받다.
ㆍ 1484(성종 15)년
   - 4월 20일 가정대부 한성부 좌윤에 제수되다.
   - 10월 4일 승정원에 “충청도 관찰사 하숙보에게 당표리唐表裏를 하사하라” 는 어       서御書를 내리다.
ㆍ1485(성종 16)년
   - 1월 27일 전주 부윤으로 전임轉任되다.
ㆍ1487(성종 18)년
   - 조정에 들어와서 수守지중추부사로 특진되다.
     사헌부장령이 “하숙보는 비록 좋은 사람이나 공로가 없어 지중추부사로 특진된       것은 부당하오니 고치기를 청합니다” 하고 계하였으나, 왕이 전교하기를 “은수        恩數가 어찌 일정한 규례에만 구애 받겠는가” 하였다.
ㆍ1488(성종 19)년
   - 1월 17일 영안도(함경도) 병마절도사에 제수되어 변경으로 나가다.
ㆍ1490(성종 21)년
   - 11월 10일 동지중추부사로 내직에 들어오다.
ㆍ1491(성종 22)년
   - 5월 7일 경상좌도 병마절도사로 제수되다.
ㆍ1494(성종 25)년
   - 4월 9일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표문表文을 받들고 명나라 북경京師에 가서        성절聖節(황제의 생일)을 하례하다.      
     백관百官들이 표문에 배례拜禮하기를 의식과 같이 하였다. 길을 떠날 때 임금이       이르기를 경卿의 일을 여러 재상들과 의논하니 모두가 “경은 본시 무인武人이나       학술이 있으므로 전대專對하는 일을 감당할 만하다.” 하니 경이 가서 힘쓰라고        하였다.
   - 9월 15일 성절사로 연경에서 돌아와 황제의 모습과 조회하는 상황 등을 보고하       고 가져온『집주무경칠서(7가지 병서)』및『진서陳書』를 바치다.
   - 11월 12일 가정대부 경상우도 수군절도사에 제수되다.
ㆍ1497(연산 3)년
   - 2월 16일 노병老病을 사유로 사직을 청하다.
     첨지중추부사 하숙보河叔溥가 늙고 병든 관계로 상장上狀하여 사직하니, 승정원        에 물었다. 승지들이 아뢰기를, “하숙보는 무인이지만 청렴 근신하여 역임하는       중에 명성이 있었습니다. 지금 비록 사면하기를 빌더라도 쇠모衰耗하게 까지는        되지 않았으니 말미와 약을 주어 스스로 조리 보양하게 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 10월 26일 사직하고 귀향하니 왕이 속히 돌아올 것을 명하다.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하숙보河叔溥가 사직하고 향리鄕里로 돌아갔는데, 왕은        그가 청렴하고 간결하다는 말을 듣고 어서御書를 내리기를, “경卿은 선조先祖의        구신舊臣으로 기력이 아직 쇠하지도 않았는데, 어찌 하여 일찍이 쉴 뜻을 가지는       가. 빨리 올라오라.” 하였다.
   - 12월 4일 향리로 돌아간 행사직 하숙보가 청간淸簡하고 염근廉謹함을 알고 어서        御書를 내려 아름다움을 표창한 뒤 명하여 불러들여 등급을 뛰어넘어 높은 품       직을 제수하였다.
ㆍ1498(연산 4)년
   - 2월 5일 동지중추부사 겸 5위도총부 부총관에 보직되다.
   - 5월 10일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자청하여 전임轉任되다.
ㆍ1501(연산 7)년
   - 1월 2일 지중추부사로 내직에 들어오다.
     1월 3일 하숙부河叔溥가 나이가 들어 사직하려 하였으나 재주와 행실이 있으므       로 승진시키다. 윤필상尹弼商·한치형韓致亨·성준成俊등 3정승과 이극균李克均 등이       “하숙보는 재주와 행실이 있으며 집안일을 잊고 나라일만 생각하고 몸을 바르게       가지며 또한 형제 사이가 남이 따르지 못할 점이 많은데, 이제 나이가 많아 벼       슬을 그만두려 하니 마땅히 허락하지 말고 관직을 승진시켜 포상하기를 청합니       다.” 하고 아뢰었더니, 임금이 하숙보의 청렴성을 장려하기 위해 포상을 내리고       일 계급 가자加資하여 자헌대부 지중추부사겸5위도총부도총관(정2품)으로 삼았다.
     자청自請하여 충청도병마절도사로 전임轉任되었다가, 2월 3일 임지에서 별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