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세응
 
 
◦ 하세응(河世應) 
 
   三壯士의 사사(祠祀)를 청하는 소(疎)
엎드려 생각건대, 의(義)를 기리고 충(忠)을 표창할 때는 반드시 그 시종(始終0 경과(經過0의 절의를 살펴야 하고 묘당(廟堂)을 세워 향사를 드리는 것은 마땅히 위난(危難)을) 맞아 목숨을 버린 곳이라야 합니다.
그러므로 백이(伯夷)  숙제(叔齊)의 사당은 수양산에 세웠고 장순(張巡) 허원(許遠0의 묘(廟)당은 휴양성(睢陽城)에 세웠으니 어찌 채미가(採薇歌)와 음혈시(飮血詩)가 산에 은둔하던 날과 성(城)을  굳게 지키던 때에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렇다면 충현(忠賢)을  향사하는 일이 비단 그 태어난 마을에서뿐만 아니라 또한 반드시 목숨을 바친 곳에서도 행해진 것은 그 유래가 오래 되었습니다.
신臣등은 백세후에 태어나 백세(百歲) 충현(忠賢)의 유풍(遺風)을 듣고 감격한 사람들입니다. 옛 선조(宣祖) 임진란(壬辰亂)에 증 참판 문충공 김성일(贈參判文忠公金誠一)은 초유사(招諭使)로 진양에 도착하여 증 판서 충의공 조종도와 증 판서 충익공 곽재우(贈判書忠毅公趙宗道 贈判書忠翼公郭再祐)와 더불어 함께 진주 촉석루(矗石樓)에 올라 시를 읊기를 축석루 가운데 마주앉은 (三壯士) 술잔 잡고 웃으며 長江을 가리키네, 장강의 푸른 물결 도도히 흘러가니 물결 아니 마를진대 넋도 아니 죽으
리> 라고 하였습니다. 삼신의 도덕과 충절과 훈업(勳業)은 사서(史書)에 기록되어 이목(耳目)을 비추고 그 루(樓)에 올라 죽음을 맹서(盟誓)한 시구(詩句)는 인구人口에 금영(昑詠)되어 채미가(採薇歌)와 음혈시(飮血詩)로 더불어 동심(同心) 향응(響應)하니 진양은 삼신(三臣)에게 있어 그 어찌 백이(伯夷) 숙제(叔齊)의 수양산(首陽山)과 장순(張巡) 허원(許遠)의 유양성(唯陽城)이 아니겠습니까? 신(臣)등이 김성일의 향사를 도모 한지 몇 년이 되었으나 근년(近年)에 조정에서 사당(祠堂)을 거듭 건립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이 내려 졌으니 이로써 머뭇거리다 중지 하였습니다.
신(臣)등이 전고(前古)의 일을 두루 보건대, 충신열사로서 절의(節義)를 지킨 이에게는 군상(君上)이 포숭(褒崇)하거나 혹 사림이 존상(尊尙)하여 사묘(祠廟)를 건립함에 있어 그 신명(身命)을 버린 곳을 중히 여기지 않음이 없으니 이는 유독 수양산(首陽山)의 사당과 휴양성(睢陽城)의 묘당(廟堂)만이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대개 위란(危難)을 당하여 험이(險夷)를 피하지 않고 충절을 다하여 죽음 앞에서도 굴하지 않은 이들은 족히 백세 토록 충의를(勤)하고 만세 토록 두 마음 품는 이를 부끄럽게 할 것입니다. 臣 등은 이에 감히 천리를 달려와 이렇게 궐문(闕門)에서 부르짖는 청(請)을 드리니 엎드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삼신(三臣)의 사적(事蹟)은 국사(國史)에 드러나 있으므로 자세히 아뢸 필요가 없으니 청컨대 그 대개(大槩)를 아뢰겠습니다. 김성일(金誠一)은 선정신(先正臣) 문순공(文純公)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인입니다. 학문(學文) 연원(淵源)은 전수(傳受)받은 바가 있으니 이황(李滉)이 일찍이 성현(聖賢)의 상전(相傳) 심법(心法)을 두루 서술(敍述)하여 손수 병명(辨銘)을 지어 주었습니다.
평소(平素) 입조(立)朝 하여서는 충언(忠言) 직절(直節)로 일시인(一時人)들이 감복(感服)했고 정축년에는 종계(宗系)를 고치는 문제로 서장관(書狀官)을 주청(奏請)하여 명 나라에 들어가 무고(誣告)를 변명 개찬(改簒)하고 돌아왔으니 전후의 정문(呈文)이 그의 손에서 많이 나와 중화인(中華人)들이 칭송 하였습니다. 을축년에 일본의 사자(使者) 현소(玄蘇) 평의지(平義智)가 내방하여 통신(通信)을 요구하자 조정에서는 사신을 보내 답방(答訪)하게 하면서 성일(誠一)에게 부사(副使)의 임무를 맡겼습니다. 이에 지구(知舊)들이 위로하니 성일이 말하기를 <인군의 명은 수화(水火)라도 피하지 않는 것이 거늘 어찌 파도의 험함을 꺼려하겠는가?> 하였습니다. 경인년(庚寅年) 봄에 상사(上使) 황윤길(黃允吉) 서장관(書狀官) 허성(許筬)과 함께 일본에 도착하여 제도(諸島)를 돌아보고 관백(關伯)을 방문했는데 예(禮)로써 대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힘써 쟁변(爭辨)하여 조금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국서(國書)를 답함에 이르러 어사(語辭)가 매우 불순하였으므로 성일(誠一)이 의리를 들어 물리치고 편지를 보내어 현소(玄蘇)를 꾸짖으며 고칠 것을 청하니 현소(玄蘇)가 송구하게 여기면서 “<합하(閤下)가 방물(方物)을 수납(收)納했다 <합하방물령납(閤下方物領納)>”는 여섯 글자의 고침을 허락 하였습니다. 또 <대명(大明)에 입조(入朝)하겠다. 입조대명(入朝大明)는 말로 고칠 것을 권했지만 종내 허락하지 않는지라 성일(誠一)이 다시 편지를 써서  반드시 고치려고 하였으나 상사(上史)가 만류 하였습니다. 그러나 왜인(倭人)들이 심히 공경하고 두려워했으니 지금에 이르도록 정포은(鄭圃隱)과 더불어 나란히 칭송 하였습니다. 신유년 봄에 조정으로 돌아와 복명(復命)하고 임진년에 형조참의로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를 제수 하였습니다. 임지(臨地)로 떠나면서 충주에 이르럿을때 왜적(倭賊)이 육지(陸地)에 내려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밤낮으로 남쪽을 향해 달렸으나 병영을 삼천리 남겨놓고 적이 돌격해 왔습니다. 성일(誠一)이 포상에 앉아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날랜 병졸을 뽑아 적을 정격(正擊)하여 수인의 목을 베니 나머지 적들이 달아났습니다. 이에 드디어 군교(軍校) 이숭인(李崇仁)을 보내 장계壯啓와 수급(首級)을 올렸습니다. 처음 성일誠一이 일본에서 돌아오니 조야가 흉흉(洶洶)하여 조석을 보전하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성일(誠一)은 인심이 먼저 동요될까 염려하여 자못 진정시키는 글을 올렸는데 차자중(箚子中)에 말하기를 <금일에 두려워 할 것은 도이(島夷)가 아니라 인심에 있습니다.> 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 후 변방(邊方)의 급보가 이르니 주상이 전언(前言)을 추궁하여 잡아다 심문(審問) 할 것을 명했다가 숭인이 이르자 주상이 재상에게 말하기를 <김성일의 장계 가운데 죽음으로 나라에 보답하겠다는 말이 있는데 과연 그렇겠는가?> 하니 좌상 류성룡(柳成龍)이 아뢰기를 <성일은 충의가 돈독하여 이 말을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신은 일을 맡겼으면 합니다.> 라고 하자 이에 초유사(招諭使)를 제수 하였습니다. 성일이 직산(稷山) 에서 남하하여 함양(咸陽)에 이르니 열읍(列邑)이 모두 비고 백성들은 달아나 숨어버렸습니다. 이에 격문(檄文)을 붙여 도내 사민을 깨우치니 의병이 사방에서 일어났습니다. 김면(金沔)이 우현(牛峴)에서 적(賊)의 공격(攻擊)을 받자 성일(誠一)이 달려가 인업(鄰邑)의 병사를 모아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니 적(賊)들이 창원으로 퇴각 하였습니다. 이에 진해의 적(賊)으로 더불어 진주를 합공(合攻)함에 성일(誠一)이 단성에 이르러 사읍(四邑)의 의병을 발동시켜 응원하니 적(賊)은 패주(敗走)하였고 드디어 사천 진해 고성 등을 되찾았습니다. 또 곽재우(郭再祐)로 하여금 현풍 창녕 영산의 적을 물리치게 하였으니 낙동강( 左右)가 이로부터 교통 되었습니다. 가을에 좌도관찰사(左道觀察使)를 제수(除授)했다가 우도의 유생(儒生)들이 행재소(行在所)에 소(疎)를 올리자 다시 우도 관찰사(觀察使)를 제수 하였습니다. 창원의 적이 부산 김해의 적(賊)과 더불어 진주를 (合攻)하여 전일의 패북(敗北)을 보복하려 하자 성일(誠一)이 목사(牧使) 김시민(金時敏)을 설득하여 사수(死守)키를 권하고 제장(諸將)에게 명하여 방어하게 하니 적이 칠주야(七晝夜) 동안 포위하여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많은 사상자(死傷者)를 낸 채 물려 갔습니다. 이에 主上이 그 공적(功績)을 계사년 사원 성일(誠一)이 군무에 전념하고 진휼(賑恤)에 주력하면서 노고(勞苦)가 날마다 심해지더니 마침내 병을 얻어 진주에서 졸 하였습니다.
그 후 2개월 만에 진주성이 함락 되고 강우(江右) 적에게 전몰(全沒)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출사하여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몸이 먼저  죽은 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에 진양의 선비로서 분격하여 눈물을 흘리는 이들이 지금까지 끊이질 않으니 그 추모(追慕)의 정성(精誠)이 어찌 수양의 백이(伯夷) 숙제(叔齊)와 휴양(睢)陽의 장순(張巡) 허원(許遠) 보다 아래이겠습니까?  조종도(趙宗道)는 천재가 영오(穎悟) 비범(非凡)하였으니 일찍부터 선정신(先正臣) 남명(南溟) 조식(曺植)의 문하에서 성리학(性理學)을 들었고 효(우孝友)와 행실(行實)  일시에 드러났습니다. 공천으로 안기(安寄) 찰방을 제수 하였고 선정신(先正臣) 유성용(柳成龍) 김성일(金誠一)과 교우가 두터워 서로 왕래했습니다. 임진년 여름 경사(京師)에 이르러 왜변(倭變)의  소식을 듣고 남쪽으로 돌아와 창의하여 적(賊)을 토벌하였습니다. 초유사(招諭使) 김성일의 격문(檄文)을 보고 의병을 모아 진주에 도착하여 대가(大駕)가 파천(播遷)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서쪽을 우러러 통곡(慟哭)하면서 강물에 몸을 던져 죽으려 했으나 성일(誠一)과 재우(再祐)가 손을 잡고 만류했습니다. 주상이 용만(龍灣)에 계시면서 종도(宗道)의 창의(倡義) 공적(功積)을 듣고 단성현감을 제수 했으며 병신년에 함양군수가 되었습니다. 정유년에 왜적(倭賊)이 재침(再侵)하자 종도(宗道)가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에게 말하기를 제가 비록 노둔(魯鈍)하지만 삶을 탐내어 죽음을 아끼는 사람은 아닙니다. 원컨대 일군(一郡)의 민병을 맡아 죽음으로써 보답 하겠습니다 하니 원익(元翼이 그 말에 감동하여 허락하였으며 조정에서 황석(黃石) 산성(山城)을 지키라고 명 하였습니다. 드디어 안음(安陰) 현감(縣監) 곽준(郭䞭)과 더불어 병민을 거느리고 성루(城壘)를 수리하더니 얼마 후 임무가 교체되자 함양인(咸陽)人이 모두 말하기를 <이미 관직(官職)이 없으니 떠날 수 있습니다>  라고 하였으나 (宗道)가 말하기를 <몸을 나라에 허락했고 적(賊)이 이미 가까이 왔으니 의리상 떠날 수 없다>. 하고 드디어 성城에 들어갔습니다. 성(城)이 함락되던 날 남문으로 가서 곽준(郭䞭)을 보며 말하기를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할 뿐입니다> 하면서 드디어 의관(衣冠)을 차리고 준䞭과 더불어 서쪽을 향해 재배하고는 서로 적(賊)의 칼날을 받았으니 이는 참으로 살신성인(殺身成人)한 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곽재우는 관찰사 월(越)의 아들로서 남명 조식 문인입니다. 소시에 그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 들어가니 상인이 이상히 여겨 말하기를 반드시 대인이 되어 명성이 천하에 가득할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임진란에 장검을 짚고 먼저 일어나 나라에 보답하고 적(賊)을 토벌하겠다는 말을 가묘에 고하고는 가재(家財)를 털어 장사를 모집하고 낙동강을 건너 의령에 이르러 도망한 장사(將帥)와 흩어진 병졸을 모두 거두어 진지를 정했습니다. 적장(賊長) 안국사(安國)司가 큰소리치며 말하기를 <장차 전라도로 향하겠다고 하면서 곧바로  정진(鼎津)에 도달하였으나 재우(再祐)가 요해처(要害處)에 진을 쳐 궁수(弓手)를 매복시키고 또 산곡(山谷)에 의병(疑兵)을 설치해 놓으니 적(賊)이 건너지 못하고 물러갔습니다. 일신에 홍의(紅衣)를 걸치고 스스로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 하더니 하루는 강변의(賊)을 공격함에 몸을 날려 먼저 오르자 적(賊의) 포화(砲火)가 일제히 불을 뿜었으나 종내 해 치지 못했습니다. 거듭되는 싸움에서 승리하여 적(賊)을 참살(斬殺)함이 매우 많았지만 수급(首級)을 베어 올리지 않았으니 그 뜻이 적을 죽임에 힘쓸 뿐 공을 구함에 있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순찰사(巡察使) 김수(金晬)가 근왕병(勤王兵)이라 칭하다가 용인(龍仁)에 이르러 달아나자 재우(再祐)가 죄장(罪狀)을 열거하여 격문(檄文)을 돌리고 행재소(行在所)에 소(疎)를 올리니 수(晬) 또한 계를 올려 그를 멋대로 날뛴다고 지목했습니다. 다행이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해명에 힘입어 主上이 이를  칭찬하자 재우가 더욱 감격하여 병사를 격려하고 누차 적을 패배시켰으니 적들은 재우가 보기만 하여도 도망을 쳤습니다. 강우(江右)와 호남(湖南)이 이에 힘입어 온전하였으니 이것이 나라를 회복할 기틀이 되었습니다. 정유년에 왜적이 다시 침략하니 재우가 방어사(防禦使)로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수비 하였습니다 입성(入城)한지 얼마 되지 않아 적의 유기병(游騎兵)이 성을 침공했으나 태연하게 담소하면서 단지 굳게 지키라고만 하였습니다. 일주야(一晝夜)를 지나 적은 더 싸우지 않고 후퇴하더니 강을 건너 서행하여 황석산성(黃石山城)을 도살(屠殺)하고 남원을 함락시킴에 열진(列鎭)이 모두 무너졌습니다. 얼마 후 모친상으로 자리를 떠나니 군민들이 창연(悵然)히 낙심하였으나 그러나 외로운 성에서 강력한 도적에 대항하여 수읍(數邑)의 백성 생명을 보전한 것은 재우(再祐)의 충용(忠勇)과 지략(智略)이 아니면 누가 능히 감당하겠습니까? 정유년에 소를 올려 영창대군의 원통함을 구 했으니 이 또한 (大節)의 표상이 아니겠습니까?
이 삼신(三臣)은 혹은 군사를 돌보다 죽었고 혹은 보국으로 살신했으며 혹은 불멸의 공을 세웠습니다. 그 사업이 비록 동일하지는 않지만 한결같이 지성으로 나라에 보답하려는 마음에서 나왔으니( 殷)나라 미자 기자 비간(比干)에 비추어 보더라도 부끄러움이 없을 것입니다. 조정에서는 이미 작위를 수여하고 시호를 하사했으며 또 많은 선비들의 청을 좇아 조종도 곽재우는 사당을 세워 향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진주에 정충사(旌忠祠)를 세워 김시민이하 수십인(數十人)에게 두루 제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김성일은 몸이 죽은 자리에 지금까지 사당을 세워 향사를 지내는 일이 없으니 이것이 신등이 개연히 탄식하는 까닭입니다. 김성일은 안동에서 태어나 진주에서 죽었으니 참으로 사당을 거듭 세운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또한 성일이 비록 적에게 죽지는 않았으나 나라를 위해 온갖 고생을 하다가 군무로 죽었으니 충절이 어찌 칼날을 받은 사람보다 아래이겠습니까? 가령 성일(誠一)이 먼저 죽지 않았다면 진주성은 반드시 함락되지 않았을 것이니 더욱 백세의 영웅들로 하여금 눈물을 자아내게 합니다. 臣 등이 김성일을 위하여 사당 건립을 청한 곳은 대개 충현이 목숨을 바쳐 한을 남긴 곳입니다. 아울러 조종도와 곽재우 양신(兩臣)을 함께 제사지내기를 청한 것은 또한 삼장사의 혼은 죽지 않았다는 말 때문입니다. 이 말로 인하여 그 마음을 상상하건대 지금까지 늠름히 불사(不仕)의 귀(貴)박(薄)이 서로 더불어 일묘(一廟)에서 노닐며 (長江)이 다하지 않는 것 같이 명성이 이어 질 것이니 어찌 당일의 시어(詩語)에 허락하지 않겠습니까? 엎드려 원하건대 전하께서 이일을 받아들여 특별히 허락을 내리신다면 가히 충신의 유한(遺恨)을 위로하고 후세의 지사를 격동케 할 것이며 또 백이숙제와 장순 허원에게 제사지내는 옛 뜻을 얻을 것입니다. 臣 등은 천일(天日)을 우러러 볼 길이 없어 지극히 간절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삼가 어리석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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