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기卒記
졸기卒記
  ◉ 문충공 하륜 졸기
   1416년태종 16 11월 6일
하륜河崙은 진주晉州 사람인데, 순흥 부사順興府使 하윤린河允潾의 아들이었다. 지정至正을사년 과거에 합격하였는데, 좌주座主 이인복李仁復이 한 번 보고 기이하게 여기어 그 아우 이인미李仁美의 딸로 아내를 삼게 하였다. 신해년에 지영주知榮州가 되었는데, 안렴사按廉使 김주金湊가 그 치행治行을 제일로 올리니, 소환되어 고공좌랑考功佐郞에 제수되어 여러 벼슬을 거치어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에 이르렀다. 무진년에 최영崔瑩이 군사를 일으켜 요양遼陽을 침범하니, 하륜이 힘써 불가함을 말하였는데, 최영이 노하여 양주襄州에 추방하였다. 태조太祖가 즉위하자 계유년에 기용하여 경기 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가 되었다. 태조가 계룡산雞龍山에 도읍을 옮기고자 하여 이미 역사를 일으키니, 감히 간하는 자가 없는데, 하륜이 힘써 청하여 파하였다. 갑술년에 다시 첨서중추원사簽書中樞院事가 되었다. 병자년에 중국 고황제高皇帝가 우리의 표사表辭가 공근(恭謹)하지 못하다고 하여 우리나라에서 문장을 쓴 사람 정도전(鄭道傳)을 불러 입조入朝하게 하였다. 태조가 비밀히 보낼지 안 보낼지를 정신廷臣들에게 물으니, 모두 서로 돌아보고 쳐다보면서 반드시 보낼 것이 없다고 하였는데, 하륜이 홀로 보내는 것이 편하다고 말하니, 정도전이 원망하였다. 태조가 하륜을 보내어 경사京師에 가서 상주上奏하여 자세히 밝히니, 일이 과연 풀렸다. 그때에 정도전이 남은南誾과 꾀를 합하여 유얼幼孽을 끼고 여러 적자嫡子를 해하려 하여 화禍가 불측不測하게 되었으므로, 하윤이 일찍이 임금의 잠저潛邸에 나아가니, 임금이 사람을 물리치고 계책을 물었다. 하륜이 말하기를, “이것은 다른 계책이 없고 다만 마땅히 선수를 써서 이 무리를 쳐 없애는 것뿐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이 없었다. 하륜이 다시, “이것은 다만 아들이 아버지의 군사를 희롱하여 죽음을 구하는 것이니, 비록 상위上位께서 놀라더라도 필경 어찌하겠습니까?” 하였다. 무인년 8월에 변이 일어났는데, 그때에 하륜은 충청도 도관찰사忠淸道道觀察使로 있었다. 빨리 말을 달려 서울에 이르러 사람으로 하여금 선언宣言하고 군사를 끌고와 도와서 따르도록 하였다. 상왕上王이 위位를 잇자 하륜에게 정당 문학政堂文學을 제수하고 정사공定社功을 녹훈錄勳하여 1등으로 삼고, 작爵을 진산군晉山君으로 주었다. 경진년 5월에 판의흥삼군부사判義興三軍府事가 되고, 9월에 우정승右政丞이 되어 작을 승진하여 백伯으로 삼았다. 11월에 임금이 즉위하자 좌명공佐命功을 녹훈하여 1등으로 삼았다. 신사년 윤3월閏三月에 사면하였다가 임오년 10월에 다시 좌정승左政丞으로 제수되어 영락 황제永樂皇帝의 등극登極한 것을 들어가 하례하는데, 하륜이 명明나라에 이르러 예부禮部에 글을 올려 말하기를, “새 천자가 이미 천하와 더불어 다시 시작하였으니, 청컨대, 우리 왕의 작명爵命을 고쳐 주소서.” 하니, 황제가 아름답게 여기어 계미년 4월에 명나라 사신 고득高得 등과 함께 고명誥命·인장印章을 받들고 왔다. 임금이 더욱 중하게 여기어 특별히 전구田口를 주었다. 갑신년1404 6월에 가뭄으로 사면하기를 빌고, 1405년 정월에 다시 복직하였다가 정해년1407 7월에 또 가뭄으로 사퇴하기를 청하였다. 기축년1409 겨울에 이무李茂가 득죄하자 온 조정이 모두 목 베기를 청하였는데, 하륜이 홀로 영구營救 하니, 임금이 대답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가며 말하기를,“하륜이 ‘죽일 수 없다.’고 하니, 이것은 실로 그 마음에서 발한 것이다.”하였다. 을미년1415 여름에 이직李稷이 그 향리에 안치安置되었는데, 하루는 하륜이 예궐詣闕하니, 임금이 내전에서 인견하였다. 하륜이 말이 없이 웃으니, 임금이 그 까닭을 물었다. 하륜이 대답하기를, “이직의 죄가 외방外方에 내칠 죄입니까?”하니, 임금이 대답하지 않았다. 임진년 8월에 다시 좌정승이 되고 갑오년 4월에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가 되었다. 금년 봄에 이르러 나이 70으로 치사致仕하기를 비니, 임금이 오래도록 허락하지 않았는데, 하륜이 청하기를 더욱 간절히 하여 부원군府院君으로 집에 나갔다.
 하륜이 천성적인 자질이 중후하고 온화하고 말수가 적어 평생에 빠른 말과 급한 빛이 없었으나, 관복官服 차림으로 묘당廟堂에 이르러 의심을 결단하고 계책을 정함에는 조금도 헐뜯거나 칭송한다고 하여 그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 정승이 되어서는 되도록 대체大體를 살리고 아름다운 모책과 비밀의 의논을 계옥啓沃한 것이 대단히 많았으나, 물러 나와서는 일찍이 남에게 누설하지 않았다. 몸을 가지고 물건을 접하는 것을 한결같이 성심으로 하여 허위가 없었으며, 종족宗族에게 어질게 하고, 붕우朋友에게 신실信實하게 하였으며, 아래로 동복僮僕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은혜를 잊지 못하였다. 인재人材를 천거하기를 항상 불급不及한 듯이 하였으나, 조금만 착한 것이라도 반드시 취하고 그 작은 허물은 덮어 주었다. 집에 거居하여서는 사치하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고, 잔치하여 노는 것을 즐기지 않았다. 성질이 글 읽기를 좋아하여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유유悠悠하게 휘파람을 불고 시를 읊어서 자고 먹는 것도 잊었다. 음양陰陽·의술醫術·성경星經·지리地理까지도 모두 지극히 정통하였다. 후생을 권면勸勉하여 의리를 상확商確함에는 미미亹亹하게 권태를 잊었다. 국정國政을 맡은 이래로 오로지 문한文翰을 맡아 사대事大하는 사명辭命과 문사의 저술이 반드시 윤색潤色·인가印可를 거친 뒤에야 정하여졌다. 불씨佛氏와 노자老子를 배척하여 미리 유문遺文을 만들어 건사巾笥에 두고 자손을 가르치는 것이 섬실纖悉하고 주비周備하였다. 또 상사喪事와 장사葬事에는 한결같이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의하고 불사佛事를 하지 말라고 경계하였다. 하륜이 죽은 뒤에 그 글이 나오니, 그 집에서 그 말과 같이 하였다. 자호自號는 호정浩亭이요, 자字는 대림大臨이요, 시호는 문충文忠이었다. 아들은 하구河久와 서자庶子가 세 사람인데, 하장河長· 하연河延· 하영河永이었다. 하륜이 죽자 부인 이씨李氏가 애통하여 음식을 먹지 않아 거의 죽게 되었는데, 임금이 듣고 약주藥酒를 하사하고 전지하기를,“상제喪制는 마치지 않을 수 없으니, 비록 죽는 것을 돌아보지 않는다 하더라도 상제를 마치지 못하는 것을 어찌하겠는가? 부디 술을 마시고 슬픔을 절도 있게 하여 상제를 마치라.” 하였다. 이씨가 사람을 시켜 승정원承政院에 나와 상언하기를, “가옹家翁이 왕명을 받들어 외방에서 죽었으니, 원컨대, 시체를 서울 집에 들여와 빈소殯所하게 하소서.” 하니, 명하여 예조禮曹에 내리어 예전 제도를 상고하여 계문啓聞하게 하고, 이어서 전지하기를, “《예기禮記》 증자문편曾子問篇에 이러한 의논이 있었다.” 하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사명을 받들고 죽으면 대부大夫· 사士는 마땅히 집에 돌아와 염殮하고 초빈草殯하여야 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卒記
  1416년(太宗16 丙申) 11月 6日(癸巳)
。崙, 晋州人, 順興府使允麟之子也。中至正乙巳科, 座主李仁復一見奇之, 以其弟仁美之子妻之。辛亥, 知榮州, 按廉使金湊上其治行第一, 召拜考功佐郞。累官至簽書密直司事。戊辰春, 崔瑩興師犯遼陽, 崙力陳不可, 瑩怒, 放之襄州。及太祖卽位, 癸酉, 起爲京畿都觀察使。太祖欲遷都于雞龍山, 旣興役, 無敢諫者, 崙力請罷之。甲戌, 復簽書中樞院事。丙子, 高皇帝以表辭不謹, 徵我主文者鄭道傳入朝。太祖密訪廷臣遣否, 皆顧望以爲不必遣, 崙獨言遣之便, 道傳銜之。太祖遣崙如京師, 敷奏詳明, 事果得解。時, 道傳與南誾比謀, 挾幼孼以害諸嫡, 禍且不測。崙嘗詣上潛邸, 上屛人問計, 崙曰: “此無他策, 但當先事擊除此輩耳。”上默然。崙復曰: “此特子弄父兵以救死耳 雖上位動念, 畢竟若之何哉?” 及戊寅八月變作, 崙時爲忠淸道都觀察使, 疾驅至京, 使人宣言提兵助順。及上王嗣位, 拜崙政堂文學, 錄定社功爲一等, 賜爵晋山君。庚辰五月, 判義興三軍府事。九月, 拜右政丞, 進爵爲伯。十一月, 上卽祚, 錄佐命功爲一等。辛巳閏三月辭。壬午十月, 復拜左政丞, 入賀永樂皇帝登極。崙至朝廷,上書禮部以謂: “新天子旣與天下更始, 請改賜吾王爵命。” 帝嘉之。癸未四月, 偕朝使高得等, 奉誥命印章以來, 上益重之, 特賜田口。甲申六月, 以旱乞免, 乙酉正月, 復舊職。丁亥七月, 又以旱請避。己丑冬, 李茂得罪, 擧朝咸請誅之, 崙獨爲之營救, 上不答, 入內曰: “崙以爲不可殺, 是實其心之所發也” 乙未夏, 李稷安置其鄕。一日崙詣闕, 上引見于內殿, 崙無語而笑, 上問其故, 崙對曰: “李稷之罪, 其可放之於外耶?” 上不答。壬辰八月, 復左政丞, 甲午四月, 領議政府事, 及今春年七十, 乞致仕。上久未之許, 崙請益切, 以府院君就第。崙天資重厚, 雍容簡默, 平生無疾言遽色。至其端委廟堂, 決疑定策, 略不以毁譽動其心。爲相務存大體, 嘉謀密議, 啓沃弘多, 而退未嘗泄於人。處己接物, 一誠無僞, 仁於宗族, 信於朋友, 下至僮僕, 皆懷其惠。薦進人材, 常若不及, 片善必取而掩其小過。居家不喜奢麗, 不樂宴遊, 性好讀書, 手不釋卷, 悠然嘯詠, 至忘寢食。至於陰陽、醫術、星經、地理, 皆極其精。勸勉後生, 商確義理, 亹亹忘倦。當國以來, 專典文翰, 事大辭命、文士著述, 必經潤色印可而後乃定。排斥佛老, 預爲遺文, 藏之巾笥, 訓誨子孫, 纖悉周備。且戒以喪葬一依《朱子家禮》,毋作佛事。崙旣沒而書出其家,如其言。自號浩亭, 字大臨, 諡文忠。子久。庶出三人, 曰長, 曰延, 曰永。崙沒, 妻夫人李氏痛悼, 不飮食幾死, 上聞之, 賜藥酒, 傳旨曰:
“喪制不可不終。縱不顧死, 其於不終喪制何 須飮酒節哀以終制。”李氏使人詣承政院上言曰: “家翁承王命死於外, 願將屍體, 入京家殯之。”命下禮曹, 稽古制啓聞。仍傳旨曰:“《禮記》《曾子問》篇有此議。”禮曹啓:“奉使而死,大夫士當還家斂殯”從之。
  ◉ 양정공 하경복 졸기
 경상도 도절제사 하경복河敬復이 졸卒하였다. 경복의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임오년 무거武擧에 급제하여 사복 부정司僕副正을 거쳐 누차 천전하여 상호군上護軍에 이르고, 경인년에 다시 중시무거重試武擧에 합격 첨총제僉摠制에 초탁되었으며, 얼마 안 되어 경원진慶源鎭으로 나갔다. 신묘년에 다시 첨총제가 되었고, 임진년에 경성진鏡城鎭으로 나갔다가, 갑오년에 동지총제同知摠制로 승진, 이어 함길도 도절제사로 나갔다. 정미년에 의정부 참찬에 임명되고, 경술년에 판좌군도총제부사判左軍都摠制府事로 승진되었으며, 또 그대로 절제사節制使를 겸임하게 하였고, 임자년에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가 되었다. 북방을 진무하기를 무릇 15년간 하였는데, 은혜와 위엄을 아울러 행하여 사졸들이 즐겨 그의 쓰임을 받았고, 야인들도 두려워하고 또 사랑해 받들었는데, 진실로 의義가 아니면 비록 터럭끝만것 일지라도 결코 취하지 않아서, 야인들이 더욱 그 청백함에 탄복하였으며, 국가에서 그에 의중倚重하기를 마치 장성長城같이 하였다. 을묘년에 내직으로 들어와 의정부 찬성이 되었다가 곧 다시 판중추원사가 되고, 병진년에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더니 얼마 안되어 경상도 도절제사가 되었다. 졸卒할 때 나이가 62세였다. 사람들이 모두 애석해 하였고, 조정에서는 조시朝市를 정지하고 관에서 그 장사를 돌봐 주었으며, 시호를 양정襄靖이라 하니, 갑주甲胄에 노고가 있음을 양襄이라 하고, 덕으로 회유懷柔하여 대중을 편안하게 함을 정靖이라 이른다. 경복은 천성이 관후寬厚하고 용모와 의표가 아름다웠으며 사어射御에 능하였다. 그가 함길도에 있을 당시에 부인 정鄭씨가 그의 녹봉을 밑천으로 하여 저택을 세우니, 경복이 돌아와서 못마땅하게 여겨 말하기를, “나는 평생토록 초가집에 만족하고 있는 사람인데, 어찌하여 집을 이렇게 장대하게 세운단 말인가.” 하고, 곧 그 철거를 명하였는데, 그의 아들과 사위와 이웃들이 모두 헐지 말라고 간청한 뒤에야 비로소 중지한 바 있다. 이것으로써 대략 그의 마음 세움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아들 하나가 있으니, 이름은 한漢이었다.
卒記
○慶尙道都節制使河敬復卒。敬復,晋州人也。壬午,中武擧,歷司僕副正,累遷至
上護軍庚寅,中重試武擧,超授僉摠制,未幾出鎭慶源,辛卯,復爲僉摠制壬辰,出鎭鏡城,甲午,陞同知摠制,出爲咸吉道都節制使丁未,拜議政府參贊,庚戌,陞判左軍都摠制府事,又令仍兼節制。壬子,판중추원사진북방범십五年,恩威竝著,士卒樂爲之用,野人畏而愛之,苟非其義,雖一毫而不取,野人尤服其淸,國家倚以爲長城乙卯, 入爲議政府贊成,尋復判中樞院事。丙辰,罷歸田里,尋爲慶尙道都節制使,卒年六十二,人皆悼惜之。停朝市,官它葬事。諡襄靖,甲冑有勞襄,柔德安衆靖。敬復性寬厚,美容儀,工射御。其在咸吉道也,夫人鄭氏資其俸祿起第宅,公還,怫然曰:“吾平生甘心於草屋,何起第之壯耶?”卽命撤之。子壻與隣里共請勿毁,然後乃止,此其立心之大槪也。有一子,曰漢。
  ◉ 강장공 하한 졸기
 동지중추원사 하한河漢이 졸卒하니 부의賻儀와 전奠을 내려주었다. 시호諡號를 강剛莊이라 하였는데, 강의剛毅하고 과감果敢한 것이 강剛이요, 적을 이기고자하는 뜻이 장壯한 것이 장莊이다.
卒記
同知中樞院事河漢卒 賜賻奠, 諡剛莊 强毅果敢‘剛’, 勝敵志壯‘莊’
  ◉경절공 하숙보 졸기
 충청도 절도사節度使 하숙보河叔溥가 졸하였다. 본관은 진주晉州이니, 의정부 찬성사贊成事 하경복河敬復의 손자이다. 경태景泰 원년元年 1453년端宗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훈련녹사訓鍊錄事가 되었다가 1456년世祖2 중시重試에 급제하여, 여러 차례 전임轉任되어 길주 판관吉州判官이 되고, 1466년世祖12에는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급, 특별히 강계 부사江界府使에 임명되었다. 의주 절제사義州節制使, 평안·전라 등도의 절도사節度使, 형조·호조의 참판, 충청도 관찰사, 영안북도 절도사永安北道節度使 등을 지냈다. 1401년燕山君 7에 나이가 많아 퇴직하기를 아뢰니, 삼공三公 - 三政丞이 왕에게 만류하기를 권하였다. 왕은 본래 그 어짐을 들었기 때문에 손수 비답批答을 내려 포상하기를 ‘특별히 하숙보에게 한 품계를 올려, 청렴개결淸廉介潔의 기풍을 장려한다.’ 하고, 자헌대부 지중추부사 겸 오위도총부도총관資憲大夫知中樞府事兼五衛都摠府都摠管으로 임명하였다. 얼마 안 있어 충청도 절도사로 임명되었다. 졸한 뒤 시호諡號는 경절敬節이니, 일찍 일어나서 일을 공경하는 것夙興恭事이 경敬이요, 염치를 좋아하여 스스로 절제하는 것好廉自克이 절節이다. 성품이 청렴하고 근신謹愼하여 관직에 임해 치밀하였으며 함부로 은혜를 베풀지 않았다
敬節公河叔溥卒記
 1501년燕山 7 11月 3日
○丁丑/忠淸道節度使河叔溥卒。晋州人,議政府贊成事敬復之孫。中景泰癸酉武擧, 補訓錬錄事。中丙子重試,累轉吉州判官。成化丙戌加通政,特授江界,歷義州節制使,平安、全羅等道節度使, 刑、戶曹參判,忠淸道觀察使,永安北道節度使弘治辛酉引年告退,三公勸王留之,王亦素聞其賢,手批褒之曰:“特加叔溥一資,以勵廉介之風。”授資憲知中樞府事兼五衛都摠府都摠管,尋授忠淸道節度使。卒謚敬節,夙興恭事敬, 好廉自克節。性廉謹, 莅官縝密, 不妄施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