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문賜祭文
사제문賜祭文
1. 문충공에게 내린 제문
  ● 태종 사제문太宗賜祭文
   1416년太宗 16 丙申 11月 6日
진산 부원군晉山府院君 하륜河崙이 정평定平에서 졸卒하였다. 부음訃音이 이르니, 임금이 심히 슬퍼하여 눈물을 흘리고 3일 동안 철조輟朝하고 7일 동안 소선(素膳) 하고 쌀·콩 각각 50석과 종이 2백권을 치부致賻하고 예조좌랑禮曹佐郞 정인지鄭麟趾를 보내어 사제賜祭하였는데, 그 글은 이러하였다.
“원로元老 대신은 임금의 고굉股肱이요, 나라의 주석柱石이다. 살아서는 휴척休戚을 함께 하고, 죽으면 은수恩數를 지극히 하는 것은 고금의 바뀌지 않는 전례典禮이다. 생각하면 경은 천지가 정기를 뭉치고 산악山嶽이 영靈을 내리받아, 고명 정대高明正大한 학문으로 발하여 화국華國의 웅문 雄文 이 되었고, 충신 중후忠信重厚한 자질로 미루어 경세經世의 큰 모유謀猷가 되었다. 일찍 이부二府에 오르고 네 번 상상上相)이 되었다. 잘 도모하고 능히 결단하여 계책에는 유책遺策이 없었고, 사직을 정하고 천명을 도운 것은 공훈功勳이 맹부盟府에 있다. 한결같은 덕으로 하늘을 감동시켜 우리 국가를 보호하고 다스렸는데, 근자에 고사故事를 가지고 나이 늙었다 하여 정사를 돌려보냈다. 그 아량을 아름답게 여기어 억지로 그 청에 따랐다.
거듭 생각건대, 삭북朔北은 기업基業을 시초한 땅이고 조종祖宗의 능침陵寢이 있으므로 사신을 보내어 돌아보아 살피려고 하는데, 실로 적합한 사람이 어려웠다. 경의 몸은 비록 쇠하였으나, 왕실王室에 마음을 다하여 먼 길에 근로하는 것을 꺼리지 않고 스스로 행하고자 하였다. 나도 또한 능침陵寢이 중하기 때문에 경卿의 한 번 가는 것을 번거롭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외에 나가서 전송한 것이 평생의 영결永訣이 될 줄을 어찌 뜻하였겠는가? 슬프다! 사생死生의 변變은 인도人道에 떳떳한 것이다. 경이 그 이치를 잘 아니 또 무엇을 한하겠는가! 다만 철인哲人의 죽음은 나라의 불행이다. 이제부터 이후로 대사大事에 임하고 대의大疑를 결단하여 성색聲色을 움직이지 않고, 국가를 반석의 편안한 데에 둘 사람을 내가 누구를 바라겠는가? 이것은 내가 몹시 애석하여 마지않는 것이다. 특별히 예관禮官을 보내어 영구靈柩 앞에 치제致祭하니, 영혼이 있으면 이 휼전恤典을 흠향하라.”
太宗賜祭文
○晋山府院君河崙卒于定平。訃至, 上悼甚流涕, 輟朝三日, 素膳七日, 致賻米豆各五十石、紙二百卷。遣禮曹佐郞鄭麟趾賜祭, 其文曰
元老大臣, 君之股肱, 國之柱石。生則同其休戚; 死則極其恩數, 斯古今不易之典禮也。惟卿天地儲精, 山嶽降靈。以高明正大之學, 發而爲華國之雄文; 以忠信重厚之質, 推而爲經世之大猷。早登二府, 四爲上相, 善謀能斷, 算無遺策。定社佐命, 勳在盟府; 一德格天, 保乂我家。近以故事, 引年致政, 嘉其雅量, 勉從其請。重惟朔北肇基之地, 祖宗陵寢在焉,遣使巡審, 實難其人。卿身雖衰, 乃心王室, 靡憚道
途之勤, 而欲自行, 予亦以陵寢之重, 不得不煩卿一往, 豈意出郊之餞, 遂爲平生之永訣也哉? 嗚呼! 死生之變, 人道之常。卿燭其理, 又何憾焉? 但以哲人之萎, 邦之
不幸。自今以往, 臨大事決大疑, 不動聲色, 而措國家於盤安者, 予誰望歟? 此予之
痛惜, 而不能自已者也。特遣禮官, 致祭柩前, 不亡者存, 欽此恤典
   ● 정조 사제문正祖賜祭文
   1799년己未(正祖 211月 17日 維歲次己未十一月十七日
국왕께서 근신 우부승지 조홍진을 보내어  영의정 진산부원군 문충공 하륜 묘소에 제사를 올리게 하였노라.
우리 왕가의 왕업이 처음 일어날 무렵 호준한 무리가 구름처럼 일어나, 선후를 따랐으니 정기가 매우 빛났네, 진양의 망족望族 으로서 대대로 빛나게 벼슬이 이어졌으니 산하가 아름다운 기운을 모으고 하늘이 훌륭한 보좌를 내렸네, 일월이 서로 바뀌는 즈음 천지가 정돈되지 않았을 때 경륜을 발휘하여 굉요宏夭1) 산의생散宜生2)과 덕을 같이하니 나라의 명이 새롭게 되었네, 술잔의 술 넓고 깊어 우리 희어를 도우니 물고기가 물에 있는 듯 이윤伊尹 여상呂尙과 백중의 형세였네 세 임금으로부터 철권을 받고 이십년이 넘게 황각에 있었으니 국정의 큰 계책을 따로 올려서 대경大經을 세우고 세목細目을 베풀었네, 천지가 이미 정돈되매 산악처럼 굳건하여 움직이지 않으니 이에 처음의 뜻을 따라 물러나매 임금의 행차가 임하여 궁궐의 술을 내렸네, 강한이 아득히 넓으매 보목이 향을 휼리니 궁전에 세금을 물리지 않으매 농사가 풍요한 결실을 이루었네 남토의 선비들 탄식하여 말하기를 향사대가 오래되었는데 우리 어른께서 이르러 이곳에서 노닐었다고 하네 방숙方叔과 소호召虎의 생각이 침묘寢廟를 참배함에 배로 더하는지라 정령에게 잔을 드리려 해읍海邑에 제관을 보내네
1)굉요宏夭 : 주 나라 문왕의 사우四友의 한사람으로, 문왕이 유리옥에 갇힌 것을 구해 주었으며, 훗날 무왕을 도와 주紂를 멸하였다.
2)산의생散宜生 : 문왕이 노인을 잘 봉양하다는 것을 듣고 굉요宏夭와 함께 귀의하여 문왕의 사우四友가 되었으며, 후에 무왕을 도와 주紂를 멸하였다.
正祖賜祭文『原文』
國王遣近侍臣右副承旨趙弘鎭
諭祭于故領議政晉山府院君文忠公河崙之墓我家龍興豪俊雲從先後䟽附正氣態態晉陽之望赫世簪組山河鍾英天降良輔日月之除草昩經綸閎宜同德周命維新潭潭杯酤扶我羲馭猶魚有水伯仲伊吕三朝鐵券二紀黃閣大猷時升立經陳目乾坤旣整山岳不運式循初服仙䠋宣醞江漢浩淼寶墨流香公田曠稅有稼穰穰南士曰咨鄕射堂古我老戾止於焉樓屨方召之思展寢則倍酹玆精爽伻倌于海
   ● 세종 사제문
   세종 3년1421-辛丑 1월 19일 壬午
상왕이 내신內臣 정원용鄭元龍을 보내어 진산 부원군晉山府院君 하륜河崙의 아내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 이씨에게 제사를 내렸으니, 그 제문의 대략은, “진산晉山이 이미 가서 통석痛惜의 정이 가시지 아니하였는데, 부인이 먼저 가니 조상하고 구휼하는 법전을 여기 내리나니, 정숙한 혼이라도 이 우대하는 글월을 알아주기 기대하노라.” 하였다
世宗賜祭文
 上王遣內臣鄭元龍, 賜祭于晉山府院君河崙妻辰韓國大夫人李氏◦ 敎略曰:晉山旣頹, 痛惜之情未己; 夫人又逝, 弔恤之典斯加◦ 尙期貞魂, 應此寵章◦
2. 양정공에게 내린 제문
 1438년世宗 20  9월 초 8일
 도절제사 하경복에게 제사를 내리니 그 글에 이르기를,
 「생각하건대 경은 풍채와 용모가 괴걸魁傑하고 장대하였으며 기도氣度와 국량度量-도량이 너그럽고 여유작작하였다. 어려서부터 손‧오(孫吳)의 병법을 배워서 그 재간이 위청衛靑‧곽거병霍去病을 능가하였도다. 태종의 지우知遇를 받아 높이 발탁되었고, 조정을 나가서는 한 지방을 전제專制하였고 또는 막빈幕賓-비장으로서 신기한 지모智謀를 운용하여 적도賊徒의 기세를 꺾고서 능히 그 침구侵寇를 방어하였으니 그 공로와 명예가 실로 혁혁하게 빛났던 터였도다. 부덕한 내가 유업을 이어받고 경의 장략將略이 있음을 가상하게 여겨 군부의 수뇌에 앉힌 뒤로부터 나의 주의注意가 더욱 돈독하여 이내 북방을 위임하고 그 모든 관할권을 맡겼던바 변지邊地에서 운주運籌한지 10년에 산융山戎-북쪽오랑캐이 숨을 죽이고 두려워하였도다.
 내 그 공적을 아름답게 여기고 그대를 황각黃閣-의정부에 오르게 하였더니 국가의 안위를 한 몸에 지고 그 능숙한 셈으로 책략을 세우기도 하였다. 지난번에는 다시 경을 번거롭게 하여 남쪽 땅을 진압하게 하였더니 왜구倭寇가 지식止息되어 경내가 평온해져 백성들로 하여금 안심하고 농사지어 먹고 살게 하였도다. 무릇 조정과 인민이 함께 저 산악처럼 의중倚重-의지하는 마당에 어찌 질병 하나로 하늘의 빼앗아 감이 이 같이 빠르단 말이요. 국가의 장성長城이 홀연히 무너지니 쓰라린 이 마음을 어찌 견디랴. 이에 예관을 보내어 나를 대신하여 한 잔을 전奠하노니 영령이여 앎이 있거든 와서 흠향하기 바라오.」하였다.
 註, 손ㆍ오孫吳-중국의 병법가인 손자와 오자.
 곽거병-한무제 때 흉노를 쳐서 서북변경을 확장한 장수로 위청의 생질
賜祭文
○賜祭于都節制使河敬復.其文曰:
惟卿風姿魁偉,氣量寬綽。早學孫吳,才超衛霍。遇知太宗,嶄然拔擢。出專方面,運謀蓮幕。折衝禦侮,功名煥赫。眇予承緖,多卿將略,位冠軍府,注意尤篤。仍委北方,授其管鑰。籌邊十載,山戎惕息。予嘉乃績,俾登黃閣。身佩安危,借筯畫策。頃又煩卿,而鎭南服。倭寇晏淸,民安耕鑿。凡今朝野,倚如山岳。云胡一疾, 天奪之速長城忽墮,曷勝傷衋? 今遣禮官,伻奠一酌。靈其有知,庶紆歆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