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양하씨 시조(晉陽河氏 始祖)
하공진공 영정(河拱辰公 影幀 )
경절사 봉안(擎節祠 奉安)
시조 증문하시랑평장사 하공진공(始祖 贈門下侍郞平章事 河拱辰公)
진양 하 씨의 시조는 고려 현종조의 충절신으로 문하시랑평장사에 추증된 하공진(河拱辰) 공이다
공(公)은 진주(晉州) 출신으로 고려 성종 13년(서기994년)에 압강도구당사(鴨江渡句當使)에 임명되었다. 거란의 1차 침입(993년) 후 거란과의 교역이 빈번해지고, 압록강 유역에서 쫓겨난 여진족의 준동을 감시할 목적으로 압록강 나루를 관리하는 책임자로서 처음 이승건(李承乾)을 보냈다가 곧 공(公)으로 교대한 것이다. 이후 공(公)은 중랑장(中郞將)으로 승진하고 왕의 신임을 받아, 목종(穆宗) 12년(1009년)에는 왕이 병이 들자 친종장군 유방(庾方), 중랑장 탁사정(卓思政), 중랑장 유종(柳宗) 등과 함께 근전문(近殿門)을 지키게 되었다. 이때, 목종의 모후(母后)인 헌애왕후(세칭 천추태후)가 정부(情夫) 김치양(金致陽)과의 사이에서 낳은 사생아를 왕위에 앉히려고 하였는데, 이 음모를 눈치 챈 목종은 이성(異姓)이 왕위를 계승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서경(평양)에 있던 서북면도순검사 강조(康兆)를 급히 불러 입위(入衛)케 하였다. 강조(康兆)가 개경의 영추문(迎秋門)에 이르자 공(公)은 탁사정과 함께 강조에게 협력하여 김치양 일당을 제거하는데 성공하게 되었고, 마침내 강조는 목종마저 폐위시키고 대량원군 순(詢)을 왕위에 세우니 이가 곧 고려 8대 임금 현종(顯宗)이다.
현종은 유년시절에도 온갖 간난(艱難)을 겪었지만 즉위하자마자 위기를 맞았다. 즉, 강조(康兆)의 죄를 물어 거란 왕 성종이 현종(顯宗) 1년(1010년) 10월에 40만 대군으로 침공한 것이다. 앞서 공(公)이 동서양계(東西兩界)에 근무할 때 여진(女眞)부락으로 진군(進軍)했다가 패한 적이 있는데, 이를 분하게 여긴 유종(柳宗)이 귀순 차 화주관(和州館)에 온 여진인 95명을 모두 죽인 일이 있었다. 이에 절치부심(切齒腐心)하던 여진족이 강조(康兆)가 목종을 폐한 사실을 거란 왕에게 고변(告變)하니, 거란 왕이 그 진상(眞相)을 밝힐 것을 요구하여 강조(康兆)를 거란으로 입조(入朝)토록 요구하였다. 고려 조정은 좌사낭중(左司郎中)으로 있던 공(公)과 화주방어사(和州防禦使)로 있던 유종(柳宗)에게 그 책임을 물어 원도(遠島)로 유배 보내고 강조의 입조(入朝)를 미루니, 거란 왕이 강조(康兆)의 죄를 묻는다는 구실로 침공한 것이다. 현종(顯宗)은 강조(康兆)를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로 삼아 통주(평북 선천)에서 막도록 했지만, 강조(康兆)는 패하여 포로로 잡혔다가 처형되었다. 이에 현종(顯宗)은 강감찬의 주장에 따라 남쪽으로 몽진(蒙塵)을 결심하고, 공(公)과 유종(柳宗)의 관작을 회복시켜 돌아오게 한 후 12월 27일 지채문 장군과 측근 신하 몇 명과 함께 개경을 떠났다. 현종이 창화현(昌化縣-揚州)에 이르렀을 때 그곳 향리(鄕吏)가 난동(亂動)을 부려 임금을 수행(隨行)하던 사람들은 거의 도망쳐 버렸고, 지채문(智蔡文)과 임금의 측근 몇 사람만 남게 되었다. 원도(遠島)에서 풀려난 공(公)은 20여명의 장정을 거느리고 북상(北上)하던 도중에 거란군에 패해 남하 중이던 중군 판관 고영기를 설득하여 함께 임금의 행영을 찾아오고 있었는데, 창화현에 이르러 지채문을 만나게 되어 함께 향리(鄕吏)의 난동(亂動)을 진압하게 되었다. 난동(亂動)이 수습되니 현종(顯宗)은 공(公)과 유종(柳宗)을 불러 그동안의 노고를 위로하였다.
12월 30일 공(公)이 전란의 수습책으로 “거란은 본디 강조(康兆)를 토벌하는 것으로 명분을 삼았는데, 이제 강조(康兆)가 죽었으니 사신을 보내 화의(和議)를 청한다면 그들은 필시 군병을 돌릴 것입니다” 하고 건의하였다. 임금이 점(占)을 쳐 길괘(吉卦)를 얻었으므로 공(公)과 고영기(高英起)로 하여금 표장(表狀)을 받들고 거란 군영으로 가게 한 후, 화의(和議)의 진척 여부도 모른 채 나주(羅州)를 향해 몽진(蒙塵)을 재촉하였다.
한편 공(公)은 거란의 동정을 살피고자 먼저 낭장(郞將) 장민(張旻)과 별장(別將) 정열(丁悅)을 거란 군영(軍營)에 보내어, “우리 국왕이 친림(親臨)하여 뵙기를 원했으나 다만 대국의 병위(兵威)를 두려워하였고, 또 내란이 있어 강남(江南)으로 멀리 피하면서 배신(陪臣) 하공진(河拱辰) 등을 보내 청화(請和)하려 하였으나 하공진도 또한 두려워서 감히 오지 못하니 우리들이 표장(表狀)을 전하러 왔습니다”라고 거짓으로 고하게 하였다. 그러나 장민 일행이 거란 군영에 이르기도 전에 거란군의 선봉이 이미 창화현에 들어 닥쳐 포진(布陣)하였기 때문에 공(公)이 직접 표장(表狀)을 받들고 거란 군영으로 들어갔다. 거란 병(兵)이 묻기를, “너의 국왕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하니 공(公)이 대답하기를, “강남으로 몽진하시어 지금 어디 계시는지 소재를 알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다시 “강남은 얼마나 먼고”하고 물으니, “강남은 너무 멀어서 몇 만 리가 되는지 알 수 없다”고 하는 등 임기응변(臨機應辯)으로 설득력(說得力)있게 대답하니 그제야 고려왕을 추격하던 거란 군(軍)이 돌아섰다.
이틀 뒤(1011년 1월 1일) 거란군이 개경에 들이닥쳐 대묘(大廟)와 궁궐은 물론 민가까지 불태우니, 1월 3일 공(公)은 더 큰 참화를 막기 위해 고영기와 함께 거란 본영으로 가서 거란왕 성종을 만나 고려 국왕의 친조를 약정하면서 거란왕에게 회군을 청하였다. 거란왕이 이를 허락하고 공(公)과 고영기 등을 볼모로 하여 더 이상 고려왕을 추격하지 않고 머물더니 1월 11일 부터 철수하기 시작하였는데, 공(公)이 철군 교섭에 착수한 지 십여 일만에 거둔 성과였다.
한편 나주(羅州)에 파천(播遷)해 있던 고려왕 현종(顯宗)은 통사(통역관) 사인(舍人) 송균언(宋均彦)과 별장 정열(丁悅)이 가져온 공(公)의 주장(奏狀)을 보고 거란 군이 이미 퇴각을 시작했다는 것을 알게 되어 크게 기뻐하더니 정열(丁悅)을 친종낭장(親從郎將)으로 삼았다. 거란군이 퇴각을 시작했다는 것을 알게 된 현종(顯宗) 일행은 곧 나주를 떠나 공주와 청주를 거쳐 그 다음 달인 2월 23일에 개경에 돌아오게 되었다.
거란왕 성종(聖宗)은 공(公)과 고영기를 인질로 삼아 귀국하는 과정에서 흥화진 진장 양규 등의 공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으나 귀국 후에는 공과 고영기를 예우(禮遇)하고 관대(款待)하게 대하였다. 그러나 두 분은 은밀히 짜고 겉으로는 충성을 보여 거란왕의 환심을 사고 속으로는 환국(還國)의 방도만을 생각하여, 거짓으로 “고려가 이미 망했으니 군병을 이끌고 가서 살피고 오겠다”고 하니 거란왕은 그 말을 믿고 허락하였다. 그러나 곧 고려 국왕(高麗國王)이 환도(還都)한 사실을 알게 되어 공(公)은 연경(燕京,북경)에, 고영기는 중경(中京,심양)에 각각 분리 안치되었다.
공(公)과 고영기(高英起)에 대한 거란 성종(聖宗)의 회유공작(懷柔工作)은 그치지 않았다. 두 분에게 양가(良家)의 처녀를 아내로 삼게 하고 3일에 소연(小宴)을 열고, 5일에 대연(大宴)을 베풀어 주었다. 그러나 공(公)은 여전히 환국(還國)을 꾀하여 준마(駿馬)를 많이 사서 귀국길에 배치하여 탈출을 도모하다가 결국 발각되어 거란 성종의 친국(親鞫)을 받게 되었다. 공(公)은 사실대로 말하고 “나는 고려의 신하로서 감히 두마음이 있을 수 없다(아시고려인我是高麗人, 불감유이심不敢有二心)” 라고 하며 언사(言辭)를 거칠고 불손(不遜)하게 하여 거란 왕을 크게 격분시키니 드디어 심간(心肝)을 씹히는 장렬한 죽음을 당하였다. 현종 2년(辛亥) 12월의 일이었다.
공은 탁월한 지혜로 거란 군을 철수시켜 임금과 백성을 구하였고, 적국에서는 회유를 거부해 불사이군(不事二君)의 굳은 절개로 고려인의 기백을 보여주었다.
공의 죽음은 곧 위국충절(爲國忠節)의 상징이 되어 후일 국난기(國難期)에 민족정신을 고취(鼓吹)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아울러 진주를 충절(忠節)의 고장이라 일컫는 효시(嚆矢)가 되었다.
⍟ 추모와 봉사.
• 1012년(현종 3년), 공(公)의 죽음을 전해들은 국왕은 공(公)의 공적을 기리고 아들 칙충에게 녹자(祿資)를 더하였다.
• 1022년(현종 13)년, 강민첨이 죽으니 “강민첨과 하공진의 공로가 모두 특이한데도 포상(褒賞)이 후하지 못하였으니 각기 그 아들에게 벼슬을 더하라”는 교서를 내렸다.
• 1052년(문종 6년)
3월, 국왕이 “좌사낭중 하공진은 경술년(1010년) 거란군의 침입 시에 적과 마주하여 신변의 위험을 생각지 않고 삼촌설(三寸舌)로서 능히 대병(大兵)을 물리쳤으니 그의 형용(形容)을 그려 기린각(麒麟閣)에 붙이고 그 공훈을 기록하라”고 특명을 내렸으며, 동시에 공(公)의 아들 칙충(則忠)을 5품직에 특진시키는 조치를 취하였다. 그 후 종묘사직(宗廟社稷)을 호위(護衛)한 공(公)의 공적(功績)을 추념하여 공(公)에게는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추증(追贈)하고 또 공의 아들 칙충(則忠)을 불러 상서(尙書) 공부시랑(工部侍郞)을 증직하였다.
• 1096년(숙종 원년) 12월, 국왕이 신봉루에 나아가 “현종 때의 공신 하공진과 장군 송국화, 그리고 경술년(1010년)에 거란에 가서 억류당한 사신(使臣)과 부사(副使)에게는 그들의 자손 1명에게 첫 벼슬을 줄 것을 허락한다”고 하였다.
• 1110년(예종 5년) 9월, 국왕이 재추고관(宰樞高官)들과 더불어 천수전(天授殿)에서 잔치를 하더니 새벽이 되자 파하면서 국왕이 친히 시(詩)를 짓고 유신(儒臣)들에게 화답하여 시를 지어 올리게 한 후 그 성적에 따라 선물을 하사하였다. 이 날 동원된 우인(優人,藝人)들이 놀이를 하는 중에 선대(先代)의 공신 하공진을 칭송하는 놀이를 하니 국왕이 하공진의 공(功)을 추념한 다음 그 현손(玄孫)인 내시위위주부(內侍衛尉注簿) 하준(河濬)을 합문지후(閤門祗侯)로 임명하고 아울러 그 자리에서 시(詩) 한절을 지어 하사하였다.
예종이 공(公)의 현손 준(濬)에게 친히 지어 내린 시(詩)의 내용은 전하지 않으나, 태조 때의 무장 김락(金樂)과 신숭겸(申崇謙)을 애도하여『도이장가』를 지은 예종의 솜씨에서 나온 것으로 미루어 그 시의 내용과 수준을 짐작해 볼뿐인데, 아마도 공(公)의 공적(功績)을 기리면서 공(公)의 자손들도 조상처럼 유능한 인재가 되라고 당부하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예종이 시를 짓고 우인(광대)이 연극놀이로 공(公)을 칭송한 것은 공(公)이 적지에서 죽임을 당한지 100년이 되는 해에 있었던 일이었기에 참으로 의미 있는 일로 해석할 수 있다.
고려사회의 가장 밑바닥 계층에 속했던 우인(광대)에 의해 공(公)의 업적이 칭송되고 그 행적이 연극놀이의 내용이 되었던 것으로 보아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도 그 이야기가 영웅담으로 널리 전해져 오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風前燈火)처럼 위태로웠을 때 자기 한 목숨을 돌보지 않고 나라와 백성을 구한 공(公)의 무사다운 면모가 고려 왕실과 백성들의 의식속에 ‘영웅의 삶’을 마쳤던 인물로 각인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공(公)의 영웅적인 삶과 절의는 조선시대에 와서도 본받아야 할 일로 높이 받들어져『고려사』․『고려사절요』․『동국여지승람』․『동국통감』․『고려명현록』등에 공(公)의 행적을 기록하게 되었다.
• 1298년(충선왕 즉위년), 국왕이 즉위하고 나서, 거란병을 퇴각시킨 서희(徐熙) 하공진(河拱辰) 노전(盧戩) 양규(楊規) 등의 친․외 후손 중 각각 1명에게 첫 벼슬을 허락한다고 교서를 내렸다.
• 1308년(충선왕 복위년), 국왕이 “성종 대(代)의 서희(徐熙)와 현종 대(代)의 공신 하공진(河拱辰)․노전(盧戩)․양규(楊規) 등의 친․외 현손의 현손도 한집 한명의 예에 의해 첫 벼슬을 허락한다” 하였다.
• 조선 시대에 진주성 내에 공진당(拱辰堂)을 세웠다. 공진당(拱辰堂)은 1603년 진주성내에 경상우병영이 설치되면서 병영내에 위치하게 되었는데 조선 후기에 제작된 ‘진주성도 병풍’에도 공진당(拱辰堂)이 표시되어 있다.
• 후손들이 수곡면 낙수암(落水岩) 골에 경절사(擎節祠)를 건립하여 공의 위패를 봉안하여 사림봉사를 하였다. 고종 8년 서원철폐령으로 사림봉사가 불가해지면서 후손들이 기제사(12월 15일)를 봉행하게 되었다.
• 1957년에는 진주성내의 공진당(拱辰堂)자리에 경충사(景忠祠)를 세위 공(公)의 위패를 봉안하고 후손인 문충공 하륜과 양정공 하경복을 함께 배향하였다. 1992년 진주 성지를 정화 할 때 경충사(景忠祠)가 헐리면서 동쪽으로 약간 옮긴 자리에 사당인 경절사(擎節祠)와 강당인 충의당(忠義堂)을 새로 건립하였다. 경절사(擎節祠)에 공(公)의 화상(畵像)과 위패를 모셔 후손들이 음 3월 17일 춘향대제와 음 12월 15일 기제사를 이어가고 있다.
1. 상향문(常享文)
한마디로 적을 물리치고 單辭却敵
이국에서 순절하니 絶域殉節
공신각이 비록 없어지더라도 雲臺雖沒
충절은 저 높은 태양에 걸려 빛나리 高懸烈曰
2. 경절사 봉안문
유세차 갑자1804 십이월 정축삭 십오일에 후손 봉운은 시조 증 문하시랑평장사부군의 영령에게 감히 밝게 고하나이다.
엎드려 생각하나이다. 만약 근원이 깊지 않다면, 흐름이 어찌 멀리 갈 수 있으며, 뿌리가 단단하지 않으면 가지가 어찌 무성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은 더욱 그러하오니, 할아버지가 없으면 손자가 없지요. 조상의 음덕이 흘러내려서, 후손들이 번창한 것입니다.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 보답해야 하오니, 그 은혜 감히 잊을 수 있겠습니까? 위대하십니다. 우리 시조이시여! 만고에 충절을 지킨 신하십니다. 지혜로운 말 한 마디로 적을 물리치시어, 나라가 위태로운 경지에서 벗어났습니다. 자신은 요나라에 포로가 되어 갔지만 자나 깨나 조국을 그리워하셨습니다. 탈출하여 돌아올 방법을 가만히 도모하여, 준마를 비밀리에 배치해 두었습니다. 요나라 임금이 염탐하여 알고서, 가혹한 국문을 가하였습니다. 늠름하게 사실대로 답변하시며, 털끝만큼도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나는 고려의 신하이니, 두 마음 먹는 것은 바로 역적이라오.” 온갖 방법으로 회유해도, 굽히지 않다가 결국 죽임 당했습니다. 곧은 충성과 큰 절개는 역사책에 길이길이 빛날 것입니다.
적의 나라에 시체 버려졌으니, 묘소를 만들 수가 있었겠습니까? 공신각에 화상을 그려 걸었지만, 세월이 오래되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추모하는 마음 붙일 곳이 없었기에, 후손들은 부끄러워하고 답답해했습니다. 사당을 세워야만 한다고, 후손들의 논의가 세차게 일어났습니다. 落水巖의 기슭에다 터를 잡아 집을 지었습니다. 이에 길한 날을 받아 위패를 받들어 모시나이다. 경건하게 제기를 진설하고서, 성誠을 다해 정갈하게 제사 드립니다. 봉안하는 일이 비록 늦었지만 너그러이 이해하시고 흠향하시옵소서. 많이 인도하시고 도와주시옵소서. 숭배하고 흠모하는 마음 더욱 간절합니다.
3. 고려 증 문하시랑평장사 하공진공 충절 사적기
高麗贈門下侍郞平章事河拱辰公忠節事蹟記
진양하공 휘 공진拱辰은 고려 현종 때에 삼촌三寸의 설舌로써 40만 거란군을 물리치고 적정(敵廷)에서 글안주의 환대를 비웃으며 불사이군(不事二君)을 외치다가 장렬한 최후를 마친 고려 충절의 표상이다.
하공(河公)은 진주인으로서 고려 성종13년(서기 994년)에 압강도구당사(鴨江渡句當使)에 제수되어 역사무대에 첫선을 보였다.
목종 때는 중랑장으로서 친종장군 유방, 중랑장 탁사정(卓思政) 등과 더불어 침질한 왕을 잘 호위하더니 동왕(同王)12년 정월에 마침 천추태후가 척신 김치양(金致陽)과 더불어 왕을 폐하고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를 즉위시키려는 대역을 도모함에 하공(河公)은 친위세력과 더불어 종사의 위태로움을 감지하고 왕王의 좌우를 수호하였다. 한편 목종은 삼각산 신혈사에 있는 태조의 손자 대랑원군 순(詢)을 후사로 삼을 계획을 세우고 서북면 도순검사 강조(康兆)로 하여금 궁내를 호위하도록 조처하였다.
이에 강조(康兆)가 상경하였으나 오히려 딴 마음을 품고 목종(穆宗)을 폐하고 대랑원군으로 왕위를 계승케 하는 한편 김치양(金致陽)을 제거하고 폐왕을 살해하는 변란을 일으켰더니 급기야 거란주 성종이 강조(康兆)의 문제를 구실로 40만 대군을 친솔하여 내침하는 외환이 닥치게 되었다.
파죽지세로 남하하는 거란군을 강조(康兆)가 대적하였으나 곧 체포되고 서경이 함락되자 현종은 수도 개경을 버리고 남으로 몽진을 떠났다. 이에 하공(河公)은 도차(道次)에 왕을 배알하고 주(奏)하기를 거란의 내침이 본래 강조(康兆)의 불충을 명분으로 삼았으니 이제 강조가 체포되었으므로 사신을 보내서 화를 청하면 반드시 회군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왕이 복서(卜筮)에서 길괘를 얻었으므로 곧 하공(河公)을 거란 진영에 보내어 화의를 청하기로 하였다. 하공(河公)은 창화현에 나아가서 우선 낭장 장민과 별장 정열로 하여금 청화서를 보내어 ‘국왕이 친림코자 하신 바이나 병위를 두려워하여 오지 못하고 공진(拱辰) 등에게 그 사유를 담은 서한을 전하라 하셨는데 공진(拱辰)도 역시 황구하여 감히 앞으로 나서지 못하는 바이니 속히 철병하고 화의하도록 하자’는 뜻을 전달하려 하였으나, 거란군이 이미 창화현에 도착하였으므로 공이 직접 이 뜻을 전하였다. 거란주는 묻기를,국왕은 어디에 있느냐고 하니, 공(公)이 국왕은 지금 강남으로 몽진하셔서 어디 계신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거란주가 다시강남은 얼마나 먼가하니, 공은 강남은 하도 멀어서 기만 리 인지 알 수 없다하였다. 이로써 거란군은 추격을 멈추고 다음해에 하공(河公)과 호부원외랑 고영기(高英起)를 인질로 하여 철군하였으니, 이것이 즉 하공(河公)의 삼촌설(三寸舌)의 위력이었다. 적정에서의 하공(河公)은 겉으로는 충성을 다하여 거란주의 총애를 받고 내심은 오로지 조국으로의 탈주뿐이었다.
드디어 하공(河公)은 고영기(高英起)와 밀모하여 거란의 성종에게 본국이 이미 멸망하였으니 신등이 병을 거느리고 가서 점검하고 오리다 하였다. 이에 거란주는 의심하지 않고 허락하였으나, 미구에 고려왕의 환도 소식이 당도함에 따라 그것이 허위이었음을 알고 고영기(高英起)를 중경에 하공을 연경에 살게 하고 양가녀(良家女)와 혼인시켜 안주하기를 희망하였다. 그러나 하공은 좌절하지 않고 틈틈이 준마를 매입하여 동로(東路) 요역에 배치하고 환국을 도모하였는데 그만 비밀이 탄로되어 거란주의 친국을 받았다.
하공은 당당하게고려국의 신하로서 감히 두마음을 품을 수 없으니 너희들을 섬겨 삶을 원하지 않는다.고 외쳤다.
거란의 성종이 공(公)의 절개를 가상히 여겨 그의 전향을 간청하였지만 하공(河公)은 언사를 더욱 불순하게 하여 급기야 심간을 꺼내어 씹히는 충렬의 죽음을 당하고 말았으니 때는 현종 2년(1011) 12월이었다.
현종은 하공의 순국에 대하여 교지를 내려 그 공훈을 찬양하고 아들 칙충(則忠)에게 녹과 관자를 더하여 주었고. 문종 6년(1052)에는 왕이 친히, “통화28년에 거란군 침입 시 하공진(河拱辰)은 일신을 나라에 바치기로 하고 적에 대하여 삼촌설(三寸舌)로써 대군을 물리쳤다”고 치하한 다음 문하시랑평장사를 추증하며, 공신각상에 公의 영정을 모시도록 하고 아들 칙충(則忠)에게는 오품직을 주더니 얼마 후에 상서공부시랑을 추증하였다. 예종 5년(1110) 9월에는 왕이 재추고관과 함께 천수전에서 연희를 베풀었는데 우인이 연희로 하공을 칭미하므로 왕이 감격하여 공을 추념한 다음 공의 현손 내시위위주부 하준(河濬)을 합문지후로 삼고 시 일절을 지어 하사하였다.
이에 송하노니 공의 삼촌설(三寸舌)의 기지는 대군을 물리쳤고 조국 향한 일편단심은 피아의 심금을 울렸도다. 심간을 씹히는 장렬한 최후는 살신 구국의 표상이 되었고 그래서 지켜진 조국은 만세토록 면면하도다. 1994년 7월 상한
대한민국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박영석(朴永錫) 근찬
4. 고려사 척록(高麗史摭錄)
△ 성종(成宗) 13년 갑오(甲午)에 이승건(李承乾)을 압강도구당사(鴨江渡句當使)로 삼았다가 얼마 뒤에 하공진(河拱辰)을 보내어 교대하다.
△ 목종(穆宗)12년 기유(己酉)에 친종장군(親從將軍) 유방(庾方)과 중랑장 유종(柳宗) 탁사정 하공진(河拱辰)으로 하여금 근전문(近殿門)을 늘 지키게 하다.
△ 현종(顯宗) 원년 경술(庚戌) 오월에 상서좌사낭중(尙書左司郞中) 하공진(河拱辰)과 화주방어낭중(和州防禦郞中) 유종(柳宗)을 원도(遠島)로 귀양 보내다. 하공진(河拱辰)이 동여진(東女眞)을 치다가 패함을 보고 유종(柳宗)이 한탄하더니 조금 뒤에 여진족(女眞族) 95인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화주관(和州館)에 이르니 유종(柳宗)이 모두 살해한 연유로 귀양살이를 하였다. 십이월 계해(癸亥)에 하공진(河拱辰)과 유종(柳宗)을 불러 돌아오게 하고 그 벼슬을 복직시켰다. 임신(壬申)에 왕(王)이 후비(后妃)와 더불어 거란병을 피하여 남으로 거동할 새 갑술일(甲戌日)에 양주(楊州)에 도달하여 공진(拱辰)과 호부원외랑 고영기(高英起)에게 표장(表狀)을 가지고 거란 진영에 보내 화의(和議)를 청(請)하게 하다.
△ 현종(顯宗) 2년 신해(辛亥) 12월에 거란이 하공진(河拱辰)을 살(殺)하다.
△ 문종 6년 임진(壬辰) 3월 임금이 “좌사낭중 하공진이 통화28년 거란이 침입했을 때 대적(對敵)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세 치 혀로 대군을 물리쳤으니 형상을 그려 공신각에 걸만하다.” 라고 하고, 아들 칙충(則忠)을 승진시켜 5품직을 제수했다. 이 해 8월에는 하공진이 사직을 보위한 공훈이 있다 하고 상서공부시랑에 추증했다. - 高麗史節要
△ 예종(睿宗) 5년 경인(庚寅) 9월 갑술(甲戌)일에 왕(王)이 여러 재상(宰相)과 천수전(天授殿)에서 연회(宴會)를 하더니 날이 밝아서야 파했는데, 왕(王)이 시(詩)를 지어 유신(儒臣)에게 명(命)하여 화답케 하더니, 우인(優人)이 선대공신(先代功臣) 하공진(河拱辰)을 기리는 연희(演戱)를 하니, 왕(王)이 그 훈공(勳功)을 추모(追慕)하여 그 현손(玄孫) 내시위위주부(內侍衛尉主簿) 준(濬)으로 합문지후(閤門祗侯)를 삼고 이어 절구(絶句) 한 수(首)를 지어 하사(下賜)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