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발간사
  글쓴이 : 진양하씨대…     날짜 : 12-07-22 23:09     조회 : 873    
               진양하씨 족보발간사
                  晉陽河氏族譜發刊史
 족보는 한 가문의 역사를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혈통을 실증實證하고 혈족 여부를 가늠할 수 있는 문헌으로, 혈족간 소목昭穆의 서차序次와 촌수 관계를 분간하여 존조 경종尊祖敬宗의 정신을 앙양하고 종족간 화목 단결을 강화시켜 주는 책이다.
 족보의 역사는 오래되었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3~5세기 육조六朝 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제대로 체계를 갖춘 것은 10세기에 이르러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에 속한 소순蘇洵, 소식蘇軾, 소철蘇轍 세 부자父子가 만든 소보蘇譜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13세기 고려 말엽부터 족보가 시작되었다고는 하지만 현재 전해지는 것은 없고, 가승家乘이 마련되어 오다가 체계를 갖춘 족보로서는 15세기 후반인 조선 성종 7년1476년에 간행된 안동권씨 성화보成化譜가 처음이라고 하며(1423년 문화유씨보가 나왔다는 설도 있음), 그 후 명종 20년1565년에는 문화유씨 가정보嘉靖譜가 간행되었는데, 18세기 초반까지의 족보는 자녀의 차별 없이 나이순으로 수록하였으며, 친손과 외손을 동등하게 다룬 것이 특이하다.
 진양하씨의 족보는 진양지에 보면 문효공 하연河演 선생이 찬撰한 진양하씨보 서문이 등재되어 있으나 족보 실체는 볼 수 없고, 1416년에 호정浩亭 선생이 세운 진양부원군晉陽府院君 신도비神道碑 주문主文과 음기陰記에 호정 선생의 선계先系와 증조曾祖 이하 친인척親姻戚을 열기列記하여 진양하씨 족보의 모태母胎가 되었다. 이에서 비로소 진양하씨 시조를 휘 공진拱辰이라 하였고, 박사공 이하 현재의 계대대로 이었다.
 선대 족보 서문을 종합해 보면 임진왜란 전에도 진양하씨 족보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임란을 겪는 동안 산실散失되어, 창주공滄洲公께서 성심을 다하여 자료를 구하시다가 상사上舍 이명호李明怘에게서 첨정僉正 하여관河汝灌 공이 소장하던 보첩 한 질을 찾아 그것을 1605년 봄에 송정공松亭公에게 보이니, 송정공께서 전사傳寫시키고 서문을 지으셨다. 그리고 창주공께서는 견문을 참고하여 선사繕寫하고 성보成譜하시어 선계先系에 불명확한 것을 후인들이 오해할까 염려하시고 1621년에 사실을 밝히셨으니 바로 진양하씨족보서晉陽河氏族譜序이다. 즉, 시조 아래에 박사공 탁회卓回로 계대하시고, 박사공이 평장공의 아드님이 아님을 밝히셨다. 그러면 왜 그와 같이 계대했느냐 하면, 창주공께서 상서공부시랑 칙충則忠 공이 평장공 아드님임을 아셨지만 적장자嫡長子인지 차자次子인지 명확하지 않고, 합문지후 준濬이 평장공 현손임도 아셨지만 그 원류源流가 미상未詳하니 박사공의 직계直系인지 아닌지 그 여부를 알 수 없으므로 세계世系를 어지럽힐 수 없어서 시조 이하에는 세계世系가 명확한 박사공부터 계대하신 것이다.
 그 후 1698년 무인에 족보를 인간印刊하기 위해 초안草案을 잡은 것이 있는데 소위 무인중수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정이 있었던지 간행하지 못하였고, 1719년 숙종 기해에 호군공 형浻께서 주창主唱하시고 통훈대부 행 초계 군수 옥沃과 중훈대부 사천 현감 필도必圖께서 개보주사開譜主事와 도유사都有司를 맡고, 간국유사刊局有司에 하윤시河潤時, 하응대河應大, 하윤흡河潤潝, 사판유사寫板有司에 하윤일河潤一, 하윤규河潤逵, 수정유사修定有司에 하윤채河潤采, 하윤관河潤寬 공을 맡겨 창주공의 진양하씨 족보서晉陽河氏族譜序를 서문으로 하고 호군공께서 발문을 쓰시어 족보를 출간하였으니, 활자화한 진양하씨 첫 족보요, 명실名實 공히 진양하씨 첫 대동보大同譜인 셈이다. 즉, 사곡, 단목, 월횡, 운문 등 문하시랑공파가 상·하 두 편編이요, 별보別譜로 사직공파司直公派, 안렴공파按廉公派, 그 외 두어 계보系譜를 실었다. 이때 각 지단支單이 모두 칙충공 아래에 박사공으로 계대했기 때문에 그와 같이 했다.
 그 후 영조 경인 서기 1770년에는 전보前譜 때 지었던 습정재 응운應運 공의 서문에 치와공 응명應命과 죽와공 일호一浩의 후서後序, 사시헌공 응휘應彙와 흥와공 응겸應兼의 발문으로, 전보前譜에서 별보에 얹었던 계파는 빼고 문하시랑공파門下侍郞公派만으로 족보를 출간했고, 1820년 순조 경진년에는 사곡, 단목만으로 족보를 간행했는데, 송정공 서문을 수록하되 저작 연월 미상으로 하고 지명당知命堂 발문을 재록載錄하였으며, 경진보 서발문은 일절 수록치 않고 경인보 서발문을 그대로 실었다.
 1876년 고종 병자 3월 10일에 사곡, 단목, 운문, 월횡, 함양, 합천, 옥야, 신풍 등지에서 모여 같이 족보를 간행하려고 보청譜廳을 설치하고 도유사都有司에 하술범河述範, 하달홍河達弘, 부사府使 하겸락河兼洛, 하학운河學運, 하상진河尙晉, 교정校正에 진사進士 하재원河載源, 하정룡河定龍, 하홍운河弘運, 진사進士 하재구河在九, 하운범河雲範 등 유사有司까지 정했으나 족보를 발행하지 못했고, 1900년 고종 경자년에도 사곡과 단목만으로 서발문을 경진보와 동일하게 수록하여 경자보庚子譜를 간행했으며, 1936년에는 구서발문을 수록하고, 재화載華 공 서문에 진원振源, 계휘啓輝, 영욱泳旭 공의 발문으로 병자보丙子譜를 간행했다. 그러다가 광복 후 서기 1976년에 계대系代에 이의異議가 있어서 사곡의 일부와 단목, 월횡, 운문이 같이 족보를 간행한 적이 있는데, 앞에 구보의 서발문 중 창주공 서문, 송정공 서문, 호군공 발문, 지명당 발문, 습정재 발문, 치와공 서문, 죽와공 서문, 사시헌공 발문, 흥와공 발문을 차례대로 싣고 만기萬璣 서문序文에 재환在煥 발문跋文, 현석炫碩 후서後序로 출간된 병진대동보丙辰大同譜이다. 그 후엔 많은 파보派譜들만 간행되어 지금에 이르렀다.
 이에, 송정공 서문, 창주공 서문, 호군공 발문을 소개한다.
                        ▪ 1605년宣祖 38     乙巳譜序文
                        ▪ 1719년肅宗 45     己亥譜序文
                        ▪ 1719년肅宗 45     己亥譜跋文
 
 
진양하씨족보서晉陽河氏族譜序
1. 송정공 서문 1605년
 우리 집에 예전부터 족보가 있었는데 임진년壬辰年 난리에 불타버렸다. 그 후 14년이 지난 해 봄에 진사 하증河憕이 나와 동성同姓이라 하여 족보族譜를 구해 나에게 보이므로 이에 책자를 만들어 조카 선璿으로 하여금 베끼게 하고는 그 원본은 증憕에게 돌려주었다.
 하河씨는 진양에서 나왔으니 강씨 정씨와 더불어 대대代代로 진양의 삼대 성씨가 되어 마침내 사방으로 펴졌다. 고려시대에 우리 시조 하공진河拱辰은 현종조顯宗朝에 벼슬하여 좌사낭중左司郞中으로 거란에 사신으로 갔는데 거란 왕이 억류시켰다. 우리 시조始祖는 은밀히 말을 사서 환국還國을 도모하다가 거란 왕에게 발각되어 심문審問을 당하였다. 이에 우리 시조始祖가 말하기를 <나는 본국에 두마음을 품을 수 없다>하여 결국 화禍를 입었으니 국사에 절의節義로써 칭송稱頌되었다. 그 후 자손들이 세세世世로 드러나 혹 재상宰相이 되기도 하고 혹 군君에 봉해지기도 하여 금장옥패金章玉佩가 대대로 이어졌다. 나에게 이르기까지 세수世數가 17대代이고 햇수는 500여년이니 아! 이 또한 참으로 오래 되었다. 전傳에 말하기를 <덕德이 두터운 이는 광영光榮이 후대後代까지 미친다.>고 하였으니, 이로써 보면 어찌 우리 조선祖先의 덕德이 실로 그 원천源泉이 깊고 뿌리가 견고한 것이 아니겠는가!
 예전에 송宋나라 미양眉陽 소순蘇洵이 그 족보에 서序하여 이르기를 <소씨蘇氏의 족보族譜는 소蘇씨 집안의 세계世系를 적은 것이다.〉 라고 하였으니, 내 또한 말하기를 <하씨河氏 족보族譜는 하씨河氏 집안의 세계世系를 적은 것이다.> 라고 하겠다. 그러나 소씨蘇氏의 족보는 자기로부터 고조高祖에 이르기까지 단지 그 족친親族 중에 복服이 있는 이들만 기록했을 뿐이지만, 이제 우리의 족보는 나로부터 우리 고조에 이르고 우리 고조高祖로부터 위로는 시조始祖까지 소급하며 밖으로는 타성他姓에 이르기까지 모두 기록하였다. 이런 까닭으로 우리 족보를 보는 이는 무릇 그 대종大宗 소종小宗의 구분과 친제親弟 족제族弟의 분별과 딸과 손녀가 누구에게 출가出家했는지와 원류源流가 무슨 파派이며 어느 파派가 어느 근원根源에서 나왔는지를 모두 소상히 볼 수 있어 단번에 이를 모두 파악할 수 있다.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군자君子의 유풍遺風도 5세가 되면 다하고 소인小人의 유풍遺風도 5세가 되면 다한다.> 고 하였으니 이는 모두 상복喪服을 말한 것이다. 대저 복제服制는 예禮로부터 말미암고 예禮는 정情에서 연유하니 정情에는 경중輕重이 있어서 예禮에 절문節文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6世가 되면 친속親屬은 다하지만, 동성의 정의情誼는 백세토록 다함이 없다. 무릇 종족을 보전하는 법도는 족인 중에 가까운 이는 마땅히 친하고 먼 이는 반드시 소원疎遠하게 되지만 멀어도 또한 우리 선조의 후손이니 잊을 수 없으며, 성씨가 같은 이는 마땅히 중하게 여기고 성씨가 다른 이는 필시 경輕하게 여기지만 달라도 또한 우리 선조의 후손이니 버릴 수 없다. 요컨대 그 친한 바를 먼저 생각하고 그 소원疎遠한 바를 나중에 생각하며 그 중한 바를 급히 여기고 그 경한 바를 천천히 대할 뿐이다. 행여 혹 이에 반하여 그 선후의 차례를 잃고 그 완급緩急의 정의에 어두워져서, 가난하고 천하면 비록 지친至親이라 하더라도 남같이 보고, 부유하고 귀하면 멀어도 부형父兄같이 받든다면 이는 세리勢利로써 족인을 대하는 것이다. 세리勢利가 어찌 족인을 대하는 도리가 될 수 있겠는가!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큰 덕을 지극히 밝혀 구족을 친하게 하라!>고 하였으니 이른 바 큰 덕이란 인의仁義이다. 우리 족인을 위하는 것은 또한 인仁일 뿐인데 어찌 세勢로써 하겠으며, 우리 족인을 위함은 또한 의義일 뿐이니 어찌 이利로써 하겠는가? 세勢를 따르면 이적夷狄에 이르지 않은 자가 없으며, 이利를 좇으면 금수禽獸에 이르지 않은 자가 없으니, 우리 자손들은 어찌 서로 경계하지 않겠는가! 예전에 우리 선조先祖들은 모두 석덕碩德과 영재英才로써 부지런히 힘쓰고 스스로 분발하여 그 공명사업功名事業이 당대當代에 혁혁하고 후세까지 미쳐 전하는 명성이 실로 무궁하다. 그러나 우리 후손에 이르러선 모두 어리석고 불초不肖하여 한 사람도 능히 그 뜻과 사업을 계승한 이가 없으니 낳아주신 분들을 욕되게 함이 실로 깊다. 이 어찌 두렵지 않으며 어찌 부끄럽지 아니한가! 시경詩經에 말하기를 <나의 날日이 지나가면 너의 달月도 흘러간다.> 하였고, 서경書經에 말하기를 <만약 아비가 집을 지으려 했다면 그 아들이 기꺼이 이를 완성한다.> 고 했으니 우리 자손들이 어찌 서로 힘쓰지 않겠는가!
 이에 시詩를 지어 읊으니,  혁혁한 우리 선조 진양에서 발원發源하여, 공명功名 이미 드러나고 절의節義 또한 빛났다. 고관대작의 가업家業이 영세토록 전하고, 자손들 성대하여 면면히 이어 왔네. 500년 사이에 때로 변혁變革 있었지만, 17대 가운데 종문宗門 끊김 없었네, 비유컨대 저 원목園木 뿌리 이미 공고鞏固하여 줄기와 가지들이 우람차고 무성하듯, 또한 저 천류川流같이 원천源泉 이에 깊으니, 파류派流가 유장하여 고금古今에 뻗쳤구나. 후생들의 선조 추념은 실감하고 영모永慕함이니, 무릇 아들 손자들은 이 족보 경시輕視 말라.
선조乙巳 1605 후손 도사 수일受一 근서

2. 창주공 찬 기해보 서己亥譜序 -1719년(1621년에 찬함)
하씨가 진주의 대성으로서 그 본원本源은 동일同一하나 파별派別이 삼분三分되니 기일其一은 고려 문하시랑중서평장사門下侍郞中書平章事 휘諱 공진拱辰이시니 즉 우리의 소자출所自出이다. 역년歷年이 오래되고 자손이 번성繁盛하나 병화兵火 뒤에 보첩譜牒을 보존하지 못하니 오호嗚呼라, 한 자손으로서 마침내 노인路人같이 서로 알지 못하게 된다면 어찌 크게 슬프지 아니하리오. 내 이것이 두려워 부지런히 가첩家牒을 구하다가 다행히 이 상사 명호李上舍明怘씨 집에서 한권을 얻으니 즉 우리 성족姓族 하여관河汝灌의 소장한 바라, 공경恭敬하고 애중愛重하여 견문見聞을 참고삼아 내외지류內外支流를 열기列記하여 일본一本을 선사繕寫하니 길이 가중의 보물寶物이 될 것이다. 한번 피람披覽하면 선대의 소목분파昭穆分派를 역력히 알게 되니 이 또한 다행치 않으랴? 그러나 세계世系가 오류誤謬되어 의심됨을 그대로 전하지 못하겠기에 변명치 않을 수 없는 바이다. 평장공의 아드님에 탁회卓回라 한 것은 사실이 아니나니, 변춘정卞春亭이 지은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 윤린允潾 신도비 왈, 선대 좌사낭중先代左司郞中 휘 공진諱拱辰이 유공有功 현왕조顯王朝하야 증 문하시랑중서평장사贈門下侍郞中書平章事하고 사문박사四門博士 휘 탁회卓回는 고왕조高王朝에 벼슬하다가 친로親老로 면관환향免官還鄕이라 하였으니, 이를 본다면 평장공平章公은 현종顯宗 때요 박사공博士公은 고종高宗 때니 왕실 13대에 연수年數가 200이 지났으니 박사공이 평장공의 아드님이란 고증이 그릇되었고, 또 여사麗史에 현종顯宗이 교서敎書를 내려 공신을 기록할 때 평장공의 아드님 칙충則忠에게 녹자祿資를 더하였고, 문종 6년에 또 칙충에게 5품직을 주었으며, 예종 5년에 우인優人이 연극演劇으로써 선대공신 하공진河拱辰을 칭미하니 왕이 그 공로를 생각하여 현손 내시위위 주부內侍衛尉主簿 준濬을 합문지후閤門祗侯로 삼았다 하니 ,이를 본다면 박사가 칙충則忠과 지후祗侯에게 직파直派인지 아닌지는 자상仔詳치 않으나 세대世代가 절연截然함은 틀림이 없는 것이다. 가정 초년嘉靖初年에 조 단성 응경趙丹城應卿 씨가 또한 하가외예河家外裔로서 정성을 다하여 글을 모아서 진양 사대성 족보晉陽四大姓族譜를 만드니 삼하 사강 십정三河四姜十鄭의 분간이 질연명비秩然明備라 진주 향사당晉州鄕射堂에 장치藏置하니 마땅히 상핵詳覈하여 여온餘蘊이 없을 터이나, 성산 이순星山李淳씨가 내외 족보를 부집裒集하면서 하씨 내파중河氏來派中에 탁회를 칙충의 개명改名이라 하고 진주 향사당에서 얻었다 하니 저어하건대 조 단성의 사대성 족보四代姓族譜도 고증이 완전치 못한 바라.
 대저大抵 세대가 요원遼遠하고 와천訛舛이 불일不一하여 박사공 이상으로 평장공 이하에 궐루闕漏되고 산실散失된 것은 고증할 수 없는지라, 고로 하승지河承旨 락洛이 선대 비문을 지을 때 또한 평장공으로부터 3· 4대를 지나서 박사공에 이른다 하였는데 이로써 본다면 어찌 3·4대뿐이겠는가? 후인이 이 족보를 보고 박사공을 평장공의 아드님으로 오인誤認할까 저어하여 애오라지 한두 가지 기록하여 아는 자者를 기다리노라

천계원년 광해신유 8월 상한에 박사15세손 진사 증 근지

3. 기해보 발문己亥譜跋文 -1719년
 하씨河氏가 진양晉陽의 망족望族으로서 병화兵火뒤에 보책譜冊이 전傳해지지 못한 고로  천계 연간天啓年間에 종조從祖이신 상사 창주공 휘 증 씨上舍滄洲公諱憕氏께서 유질遺帙을 힘써 구求하여 한질을 만들었는데, 세대世代가 점점 강하降下 되면서 소목昭穆이 이어지지 못하고 또 자손子孫이 빈약貧弱하여 침재鋟梓를 못하였다.
 근자近者에 종인宗人 옥沃이 마침 팔계재八溪宰가 되어 사천쉬 필도泗川倅必圖와 더불어 수재영전讎梓永傳키로 의논議論하여 각각 봉전捧錢을 덜어 이 일을 도우니 어찌 잔손孱孫의 다행이 아니겠는가! 이에 각처各處에 단본單本을 받아 다시 선사繕寫할새 생각하건대, 창주공서문滄洲公序文에서 평장공平章公의 아래에 박사공博士公으로 잇는 것이 믿을 수 없다고 논변論辯을 자상히 하셨으나 각가各家의 보첩譜牒이 모두 공부시랑공工部侍郞公 휘 칙충諱則忠으로 박사공博士公 위에 계대系代하여 의심疑心이 없었던 것 같다. 당시當時 창주공滄洲公이 박아博雅한 학식學識으로 정력精力을 다하여 심소深素하여 고거考據를 정상精詳하게 하셨은즉 세대世代의 차례에 명영明瑩치 아니 함이 없을듯하나 이제 각처 단본單本이 모두 다 이와 다르니 반드시 의거처依據處가 없는 것이 아니요, 또한 후우後愚로서 감히 논란論難할 수가 없는 고로 서문序文을 그냥 두어 후에 아는 이를 기다리는 바이다.
 휘諱 안린安麟의 파派는 본시本是 우리 시조始祖의 후예後裔로서 중간中間 파계派系가 실전失傳된 고로 하편 말下篇末에 기재記載하고, 휘諱 진珍, 휘諱 중용파仲龍派는 필시必是 동원同源이로되 세대世代가 멀어서 보첩譜牒을 징빙徵憑할수 없으므로 동편同篇에 기록記錄치 못하고 별보別譜를 만들었으니 후생後生의 탄식歎息이 간절하다. 오호嗚呼라, 일인一人의 몸이 나누어져 도인塗人이 된다 함은 소명윤蘓明允이 이미 감개感慨한바 있고 육무관陸務觀의 말에 왈曰, 내 아들과 형兄의 아들을 조부祖父가 보실 때에는 다른 점이 있겠는가? 미루어 올라간다면 백세百世라도 가히 알 수 있으리라 하였으니, 우리의 동종同宗들은 어찌 조선祖先을 거슬러 생각하여 그 복도비육覆燾庇育하신 무궁無窮한 경행慶幸을 본받지 않겠는가! 내 이로써 스스로의 매치昧穉함을 계칙戒勅하고 또 여러 종인宗人에게 길이길이 권면勧勉하노라.
숙종 45년 기해己亥 7月 후손 형浻 謹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