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청천군菁川君 하을지 河乙沚
1318년忠肅王 5 ~ ?
공의 증조는 고려 말엽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정치가 문란하자 덕을 숨겨 벼슬을 멀리했던 부심富深이며, 조부는 선관서승을 지낸 후 순충보조공신 숭록대부판사평부사判司評府事에 추증된 식湜이다. 아버지는 전객시 령令을 치사致仕한 후 순충익조공신 자헌대부 병조판서로 증직된 거원巨源이며 어머니는 사온서령을 지낸 진양정씨 정경正卿의 따님이다.
공은 7형제 중 맏이로 태어나 충혜왕 복위 5년(충목왕 즉위년, 1344) 지공거 박충좌가 주관한 과거에 장원 급제하여 중앙의 요직을 거치니, 목은 이색 등이 공을 부를 때 하장원河壯元이라 하였다. 1361(공민왕10)년 홍건적의 2차 침입 때 개경이 함락되자 전공전랑으로 총병관 정세운의 휘하에서 개경 수복에 공을 세워 1363(공민왕12)년 1등 공신으로 책봉되고 청천군菁川君의 봉호를 받았다.
1373(공민왕22)년 강화 만호를 지냈고, 1375(우왕1)년 전라도원수겸도안무사全羅道元帥兼都安撫使가 되었다. 그해 여름 군적을 편성할 때 연호군과 별민군을 정원 외로 늘려 편성함으로써 농사에 지장을 주었다는 간신들의 무고로 파직 명령을 받았다. 이 때 병마사 유영柳榮을 후임 원수로 정해 공을 대신하게 하였는데, 때마침 왜구가 영산으로 침략하여 전함을 불사르고 다시 나주로 침범하였다. 공은 유영이 와서 자신의 직책을 대신한다는 말을 듣고 영營을 떠나 진주의 농장으로 돌아가니 왜구들이 이 틈을 타서 원수부元帥府에 불을 질렀으나 능히 막아 내는 사람이 없어 크게 패하였다. 이 일에 대한 책임으로 공은 하동현으로 장류杖流되어 다시 봉졸烽卒이 되었으나 곧 석방되어 계림 원수로 서용되었다.
1380(우왕6)년 왜군이 대규모의 병력으로 침입해왔을 때 삼도三道 9원수 중의 일인一人으로 지리산 일대에서 왜구의 주력부대와 맞섰고, 그 후 이성계의 황산전투에서 왜구를 격퇴하는 데 공功을 크게 세웠다.
공의 독자獨子 현부玄夫는 벼슬이 사직司直이었는데『신증동국여지승람』의 ‘진주목 효자조’와『해동잡록』등에, “하현부는 효행이 지극하여 향방에서 효자로 칭송되었다. 90세가 된 어머니가 중한 병이 들자 대변을 맛보고 종기를 입으로 빠는 등 지극 정성으로 간병하였으며 부모님 사후에는 6년 동안 상복을 입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독손獨孫 귀지貴之는 적자를 두지 못하고 을손, 철손, 수손 등 서자 세 명만 두었으니 불행하게도 훗날 보첩에 오르지 못해 청천군의 후손으로 대를 잇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