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문충공 하륜文忠公河崙
1347년忠穆王 3 -1416년太宗 16
자字는 대림大臨이요, 호號는 호정浩亭이니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선생은 봉익대부 예의판서 행 순흥부사 증 영의정부사 진양부원군奉翊大夫禮儀判書行順興府贈領議政府事晉陽府院君 윤린允潾의 아들이다. 1360년 공민왕 때 국자감시國子監試에 입격하고 1365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는데 좌주는 이인복李仁復과 이색李穡이었다.
1367년 춘추관 검열을 거쳐 감찰규정糾正이 되었으나 신돈의 문객인 양전부사量田副司의 비행을 공박하다가 파직되었다. 그 뒤 고공좌랑考功佐郞, 판도좌랑判圖佐郞, 교주찰방交州察訪, 지평持平, 전교부령지제교典敎副令知製敎, 대사성大司成등의 관직을 거치고 1380년 부친상을 당하여 관직에서 물러났다. 3년 상喪을 마친 뒤 대언, 밀직제학 등 밀직사 소속 관직을 역임하고, 1388년 최영 장군의 요동정벌 계획을 극력 반대하다가 양주(지금 양양)에 유배당했으나 위화도 회군으로 최영崔瑩 장군이 실각하자 풀려났다. 그후 이색 정몽주 등 온건파 사대부와 뜻을 같이하면서 정도전 일파의 혁명파 사대부와 맞서다가 1389년 영흥군 왕환王環의 진위眞僞 사건에 연루되어 광주 등지로 추방되었으나 그 다음해에 정몽주의 도움으로 풀려나 전라도 도순찰사가 되었다가 정몽주가 죽은 이후 물러났다. 태조 2년 새왕조가 어느정도 안정되면서 개국반대파를 회유하여 등용하였는데, 이때 자신의 정치이념인 부국강병과 민생안정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새왕조에 참여하는 것외에 다른 방법이 없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 해에 경기좌도 관찰출척사로 나아가 부역제도를 개편하니 전국으로 확대하여 실시하게 되었다. 그후 신도新都를 계룡산으로 정하는 것을 반대하여 중지시켰고, 1394년에 첨서중추원사簽書中樞院事가 되었으나 부친상을 당하여 사직했다. 그러나 곧 기복起復되어 예문춘추관학사가 되었는데, 때마침 명나라와의 표전문表篆文 시비가 일어나자 명나라에 들어가 그 일의 전말을 납득시키고 돌아왔다. 제1차 왕자의 난을 평정하게 하여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이 되고 진산군晋山君에 봉해졌다. 그해 5월 명나라 태조가 죽자 진위 겸 진향사陳慰兼進香使로 명나라에 가서 정종의 왕위계승을 승인받아 귀국하였다. 찬성사, 판의흥삼군부사 겸 판상서원사 우의정을 거쳐 진산백晋山伯에 봉해졌다. 이해 태종이 즉위하자 좌명공신佐命功臣 1등이 되었다. 이어 영삼사사領三司事로서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새로운 인물들을 뽑았으며, 관제를 개혁하고, 영사평부사 겸 판호조사로서 저화楮貨를 유통시키게 하였다. 1403년에 의정부 좌정승 판이조사로서 등극사가 되어 명나라 성제成帝의 즉위를 축하하고 조선왕조의 고명인장誥命印章을 받아 돌아왔다. 그 뒤 영의정부사를 역임하고(8번 정승 중 영의정 4번) 1416년에 70세로 치사致仕하여 진산부원군晋山府院君이 되었다. 치사한 뒤 노구를 이끌고 함경도의 능침陵寢을 돌아보고 오던 중 득병하여 정평 군아定平郡衙에서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는 호정집浩亭集이 있다. 태종 묘정廟庭에 봉안 되었다. 조선 후기에 후사後嗣가 끊어져 1774년 함양의 방후손 하한통河漢通이 봉사손으로 입후立后되었다. 묘는 진주시 미천면 오방리 산469번지이고 조선조 고분군으로 1977년 12월 30일 경상남도 기념물 제414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