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정공
3. 양정공 하경복 襄靖公河敬復
    1377년(禑王 3)- 1438년(世宗 20)
 장군의 휘(諱)는 경복(敬復)이고, 어머니 보성 선씨가 자라 꿈을 꾸고 잉태하여 아명(兒名)은 자라의 배에 그려진 왕(王)자를 따서 군팔(君八)이라 했다. 장군의 증조는 전객시 령(令)을 치사(致仕)한 후 자헌대부 병조판서에 추증된 병판공 휘 거원(巨源)이고, 조고(祖考)는 군기감을 지낸 후 가선대부 병조참판으로 증직된 참판공 휘 을부(乙桴)이다. 선고(先考)는 서운관 부정을 거쳐 상호군에 올라 정헌대부 병조판서로 증직된 판서공 휘 승해(承海)이다.  여말 홍건적의 침입 때 무공을 세워 1등 공신에 책봉되어 청천군의 봉호를 받은 휘 을지(乙沚)는 장군의 종조부이며, 태종 조에 조선의 통치 질서를 완비한 정사좌명공신 문충공 휘 륜(崙)은 장군의 재종숙부(再從叔父)이다.
 장군은 진주시 수곡면 사곡리에서 장자로 태어나 천품이 순후하고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지략이 뛰어났으며 특히 활을 잘 쏘았다. 태종 2년 26세 때 무과에 급제한 후 태종 10년 무과 중시(武科重試)를 거쳐 길주도조전지병마사, 경원병마사, 경성병마절제사 등 젊은 시절의 대부분을 함길도 지역에서 무장(武將)으로 근무하다가 태종 14년(1414) 동지총제로 승진하여 함길도 도절제사에 제수되었다. 태종 18년 내직에 들어와 의용위장군절제사, 삼군도진무, 우군총제 등에 제수되었으며 世宗 4년(1422) 다시 함길도 도절제사에 제수되었다. 당시 두만강 유역의 방어가 어려워 중신회의에서 경원부(府)를 남쪽으로 후퇴시키자는 주장이 대세였으나, 장군과 김종서 등이「성을 쌓아 진을 설치하는 일을 늦출 수 없다」 하며 강력히 반대하였다. 이 때 압록강 등지에서 공을 세운 최윤덕을 조정의 공론으로 함길도 도절제사에 추천하였으나, 세종은「최윤덕은 토벌에는 용감하나 변방 주민을 위무하고 적을 달래서 진압하는 능력은 하경복을 따를 자 없어 하경복을 함길도 도절제사로 정한다」고 했다. 이 후 장군은 함길도 도절제사로 10년간 연임(임기 2년의 도절제사직을 5차례 연임)하여 근무하면서 두만강 유역의 소란을 완전히 평정하였다. 세종 14년 판중추원사로 내직에 들어와 다음해에는 왕명으로 우리의 실정에 맞는 병서를 편찬하는 데 총재로 참여하여 조선시대 최고의 진서(陣書)로 평가되는『계축진설』을 완성하였다. 
 世宗 16년(1433) 여진족 사이에 큰 내분이 일어나자 세종 임금이 이를 구강(舊疆) 회복의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김종서를 함길도 관찰사로 파견하였을 때, 장군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함길도 도체찰사가 되어 함길도를 오가며 변방 개척사업을 진두지휘하였다. 세종 17년 의정부 좌찬성(종1품)으로 승진하여 의금부 제조를 겸하다가 세종 18년 함길도 도순검사로 그곳을 순찰한 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내려가니 모부인의 봉양을 위한 세종 임금의 배려였다. 세종 20년 62세를 일기로 북방개척 사업의 완성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니, 왕명으로 백석동(수곡면 원계리)에 예장(禮葬)하였다. 임금이 시호(諡號)와 제문을 내렸는데 시호를 양정(襄靖)이라 했다. 장수로서 갑옷과 병기로 수고했음이 양(襄)이고 온유(溫柔)한 덕으로 민중을 편하게 했음을 정(靖)이라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