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장공
4. 강장공 剛莊公 하한 河漢
 공(公)은 양정공 하경복 장군의 독자(獨子)로 가업(家業)을 이어 무과에 진출하여 무장(武將)으로 세종, 문종, 단종, 세조 등 4대에 걸쳐 국방에 큰 공적을 남겼다. 공은 세종 9(1427)년 호군으로 명나라에 조현하는 세자(문종)의 시종관으로 뽑혔으며, 회령진 첨절제사, 영북진 첨절제사, 함길도 경력 등 중년 시절의 대부분을 함길도에서 근무하며 용맹을 떨쳤다.
 세종 20(1438)년 부친(父親) 양정공이 세상을 떠나자 환향하여 3년간 시묘하였으며 세종 24(1442)년 길주목사에 보직되어 다시 북방으로 나아갔다. 세종 29(1447)년 중추원부사로 내직에 들어왔으나 곧이어 조모상(祖母喪)으로 잠시 벼슬에서 물러났는데 세종 31년 야선(也先)이 요동에서 변란을 일으켜 국경지방이 급박해지자 상중(喪中)임에도 불구하고 기복(起復)하라는 명령을 받고 황해도 도절제사겸황주목사로 부임하였다. 문종 조(朝)에 잠시 중추원과 의정부 등 내직에 근무하였으나 계유정란 후에는 경상우도 도절제사를 거쳐 경상좌도 도절제사를 지내면서 왜구의 노략질을 차단하는 데 전념하였다. 이 때 임금이 남도(南道)의 관찰사․절제사․체찰사 등을 궁궐로 불러 유시하기를, “지금 날씨가 매우 추운데 변경(邊境)을 지키는 괴로움을 매양 생각하면 어찌 잠시라도 잊겠는가?” 하면서 잔치를 내려서 위로하였다.
 세조 2(1456)년 판중추원사로 승진하여 주로 중추원에 근무하다가 경상좌도 처치사로 제수되었다. 세조 6(1460)년 세상을 떠나니 나라에서 부물과 제전을 내리고 시호를 강장(剛莊)이라 내렸다. 굳세고 과감함을 강(剛)이라 하고, 적을 이기는 큰 뜻을 장(莊)이라 한 것이었다. 공(公)이 세상을 떠나기 50여일 전에 세조 임금이 조회(朝會)에 나와 여러 신하 앞에서,「내가 양녕대군을 보면 사냥이 생각나고, 김주ㆍ김말을 보면 서적이 생각나며, 하 한(河漢)을 보면 정벌이 생각난다.」고 하였다. 세조 임금의 눈에는 공(公)이 ‘무(武)와 정벌의 상징 인물’로 보였던 것이다. 따라서 시호도 강(剛)과 장(莊)으로 내렸던 것이다.
 공(公)은 성품이 호쾌하고 담백하며 싸움에 나가서는 반드시 이기려고 하는 뜻이 충만하였고, 또한 모든 일에서 과감하고 강직하여 굽힐 줄 모르는 투지를 지녔던 인물로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