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경절공 하숙보 敬節公河叔溥
공(公)은 양정공 하경복 장군의 손자이며, 강장공 하한(河漢) 장군의 아드님이다. 가업을 이어 단종 원년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녹사를 시작으로 연산 7년까지 48년간을 문무 관직에 종사하였다. 세조 13년 강계부사일 때 서정(西征) 장군 강 순 휘하의 비장(裨將)으로 건주위 정벌에 참여하여 3등 공신에 봉해졌고, 그 후 평안서도 도절제사(성종 원년), 평안도 병마절도사(성종3년), 전라도 병마절도사(성종7년), 형조참판, 충청도 수군절도사(성종10년), 충청도 관찰사(성종14년), 한성부 좌윤, 전주부윤, 영안도 도절도사(성종19년),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성종22년), 경상우도 수군절도사(성종25년) 등 여러 내․외직을 거쳤다.
야인들의 침노가 잦은 국경지역인 평안도와 영안도(함경도)의 도절도사로 재직할 때에는 여진족의 소란을 진압하여 사민정책을 차질 없이 진행하였고, 성종 22년 경상좌도 병마절도사로 떠날 때 성종이 공(公)을 불러 특별히 당부하기를「남방에는 태평한 날이 오래 지속되었기 때문에 군사들이 나태해져 왜구들이 허점을 노리고 침입할 수도 있어 내 경(卿)을 믿고 보내니 엄중하게 방비하라」하였다. 공(公)은 무관이지만 학술이 뛰어났는데, 성종의 지우(知遇)로 성종 25년에는 성절사신 단사(單使)로 명나라에 가서 차질없이 임무를 수행하였다. 명(明)나라에 사신이 갈 때는 정사(正使), 부사(副使), 서장관(書狀官) 등 삼사(三使)가 동행하는 것이 사행(使行)의 관행이나 공(公)이 혼자 모든 일을 전대(專對)할 만한 능력이 있다고 인정하여 단사(單使)의 명을 내렸던 것이었다.
연산 조에 들어와 정치가 문란하자 노병(老病)을 핑계로 사직을 청했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아 연산 3년에 겨우 낙향할 수 있었다. 연산 4년 오위도총부 부총관으로 부르자 마지못해 응했으나 곧이어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내려왔다. 연산 7년 지중추부사로 내직에 임명되자 다시 사직을 청하였는데, 윤필상 등 3정승이 만류하면서 천거하였기에 군 최고의 직인 오위도총부 도총관(정2품)에 오르게 되었다. 얼마 후 자청하여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떠났다가 이 해 2월 3일 임지에서 세상을 떠나니 시호를 경절(敬節)이라 내렸다. 경(敬)은 일찍 일어나서 일을 처리한다는 뜻이고, 절(節)은 청렴함을 좋아해서 사욕(私慾)을 극복했다는 뜻이다. 밤낮으로 국사(國事)를 생각하고 일을 신중히 하며 청렴한 생활을 했다는 뜻으로 시호를 내린 것이었다. 강직과 청렴 근면을 생명처럼 중시하면서 북방개척에 큰 공적(功績)을 남겨 3 대(代)가 연이어 시호(諡號)를 받은 무반(武班) 명문가(名門家)였던 양정가(襄靖家)는 이처럼 연산의 시대를 접하여 공(公)은 세상을 떠나고 공(公)의 아우 장령공은 낙향하여 향리 월횡에 은둔하였다. 이후 양정가(襄靖家)는 벼슬길을 점차 멀리하였고, 16세기 후반에는 훈구파에서 사림파로 전향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