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판공계兵判公系 상대인물上代人物
ᅌ하을숙 河乙淑
공의 증조는 고려 말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정치가 문란하자 덕을 숨겨 벼슬을 멀리했던 휘 부심富深이며, 조부는 선관서승을 지낸 후 순충보조공신 숭록대부판사평부사判司評府事에 추증된 휘諱 식湜이다. 부父는 전객시 령令을 치사致仕한 후 순충익조공신 자헌대부 병조판서에 증직된 휘諱 거원巨源이며 모母는 사온서령을 지낸 진양인 정정경鄭正卿의 여女이다.
공은 7형제 중 중자仲子로 태어났으며 장형長兄은 장원 급제한 청천군 을지乙沚이고 바로 아래 동생이 참판공 을부乙浮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형제들과 학문에 매진하였으며 재기才器가 뛰어나고 학문 또한 특출하여 문음으로 비순위 정용 낭장을 거쳐 문한직의 으뜸인 한림원 학사에 올랐으며 1남 4녀를 두었다.
독자獨子 염濂은 신호위 정용 산원을 거쳐 별장別將을 지냈으며 네 아드님을 두었는데, 장사랑 축蓄, 성균관 직강 효상孝祥, 문과 좌익원종공신 성균관 직강 순경淳敬, 수경粹敬이다. 쌍계파는 성균관 직강 효상의 후손이고, 단목파는 성균관 직강 순경의 후손이다.
공의 네 따님은 목사 최유강崔有江 ,소윤 정신덕鄭新德, 감무 정하손鄭賀孫, 진양인 정신중鄭臣重에게 시집갔다.
진양인 정신중(鄭臣重)의 아들이 문정공 교은郊隱 정이오鄭以吾이다. 교은郊隱은 대제학을 지낸 후 태종 때 호정 하륜과 함께 태조실록 수찬修撰에 참여하였고, 그 후 세종 때 태실증고사가 되어 전국을 누빈 끝에 사천 곤명에 세종의 태실소를 정하였으며 이후 찬성사를 거쳐 판우군도총제부사로 치사致仕하였다. 교은의 아들 애일당愛日堂 정분鄭苯은 문종 때 우찬성겸 판이조사를 지내고 단종 때 병조판서를 거쳐 김종서의 천거로 우의정에 올랐으나 계유정난으로 낙안(광양)에 안치되어 사사되었는데, 1719(숙종 45)년 복관을 청원하니 1746(영조 22)년 신원․복관되어 충장忠莊이라 시호가 내려졌다.
◦ 참판공 하을부 河乙桴
공公의 증조는 고려 후기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정치가 문란하자 덕을 숨겨 벼슬을 멀리했던 휘 부심富深이며, 조부는 선관서승膳官署丞을 지낸 후 순충보조공신 숭록대부 판사평부사判司評府事에 추증된 휘諱 식湜이다. 부父는 전객시령典客寺令을 치사致仕한 후 순충익조공신 자헌대부 병조판서에 증직된 병판공 휘諱 거원巨源이며, 모母는 사온서령을 지낸 진양인 정정경鄭正卿의 여女이다.
공은 6형제 중 숙자叔子로 태어났으니 장형長兄은 장원 급제한 청천군 을지乙沚이고 둘째 형님은 학사공 을숙乙淑 이다.
공은 일찍부터 형님들을 따라 학문을 닦았고 문음으로 관직에 나아가 군기감軍器監을 지낸 후 일찍이 향리에 은거하였으나 훗날 손자 경복의 현달로 가선대부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배위 정부인 수성라씨는 검교檢校 예빈시정禮賓寺正을 지낸 경瓊의 따님이시며 5남 1녀를 두었다. 장자는 개곡처사 취유就濡이고, 둘째는 공조전서 취동就東이며 셋째는 상호군을 지낸 후 병조판서에 추증된 승해承海이다. 넷째 승호承浩는 이조정랑을 지냈으며 관찰사 하자청의 아들 하효문이 그의 외손서外孫婿이니 겸재 하홍도는 공의 외외후손外外後孫이다. 다섯째는 호군 열烈이며, 외동 따님은 낭장 김득귀에게 시집가 찰방 상균과 상비 두 아들을 두었다.
공의 묘는 하동읍 두곡리 문암 동산에 쌍분이며 묘표가 있다.
◦ 하승해河承海
공公의 조부는 전객시 령令을 치사致仕한 후 자헌대부 병조판서에 추증된 병판공 휘諱 거원巨源이고, 부친은 병판공의 숙자叔子로 군기감軍器監을 지낸 후 가선대부 병조참판에 추증된 참판공 諱 을부乙桴이다.
공은 공민왕대에 문음으로 무관직에 나아가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이 극심했을 때 여려 전투에서 크게 활약하였으며 조선 왕조 개국 후에는 중앙군의 여려 보직을 거쳐 장군將軍(정4품)의 직위에 올랐다.
태조 7년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을 때 중앙군의 장수 대부분이 정도전의 당여黨與로 지목되었기에 공公도 순군옥巡軍獄에 투옥되었다가 그 뒤 풍해도(황해도) 수군에 충군充軍되었다. 태종이 왕위에 오른 후 풀려나 복직되었고 그 후 상호군(정3품)까지 올라 태종의 특별한 은총을 입어 전토田土와 노비까지 하사받았으며 세상을 떠날 때에는 미두米豆와 지촉紙燭의 부의가 내려졌다. 세종 조朝에 아드님 양정공(諱,敬復)의 현달로 정헌대부 병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공의 배위는 보성선씨 전객령典客令 진기眞起의 따님이시고 두 아드님 경복敬復‧경리敬履와 네 따님을 두었다. 아드님 경복은 북방개척에 공을 세워 의정부 좌찬성에 오르니 양정襄靖이라 시호가 내려졌고, 경리는 성주목사를 지낸 후 병조참의에 증직되었다. 따님들은 목사 김각金珏, 문과 군수 최득경崔得涇, 단양인 우적禹跡, 그리고 정지걸鄭之傑에게 시집갔다.
1932(임신)년 3월에 사방공사에 나간 사곡士谷인 한 사람이 사곡士谷 서록西麓 허물어진 언덕에서 활꼴의 석물을 발견했는데, 그 석물에 “보성 태부인 선씨 묘, 정헌 병조판서 진산晉山 하승해 처妻로 정통 정묘(1447) 12월 21일 에 졸하다. 장자는 숭정 의정부 찬성 경복敬復이고 손자는 가선 중추 한漢이다. 차자는 통훈 성주목사 경리敬履이고 손자는 생원 충漴이다. 무진(1448) 2월 초 3일에 이곡狸谷 서강西岡에 장사지내니 나이 90 이었다.” 라고 새겨져 있었다.
태부인의 묘는 500여 년 전에 하동읍 문암동門岩洞 판서공 묘 옆에 이장되어 500년 동안 향화香火가 끊어지지 않고 부전자父傳子 자전손子傳孫 금일今日에 이르고 있으므로 이 석물은 초장初葬시에 설치되어 이장移葬 때 묻어둔 것으로 추정되어 옛 위치에 다시 설치하여 묘역을 수축하였다.
◦ 하순경河淳敬
공公의 증조는 자헌대부 병조판서에 추증된 휘諱 거원巨原이고 조부는 한림학사 을숙乙淑이다. 공은 신호위 정용 산원을 지낸 염濂의 숙자叔子로 태어났으며, 문충공 호정 선생의 재종질이고 양정공의 재종제다. 공은 世宗 26(1444)년 문과에 급제하여 감찰, 박사 등을 거쳐 世祖 卽位年(1455)에 좌익원종공신에 책훈되었고 성균관 직강을 지냈다.
세종 31년 6월 극심한 가뭄으로 흥천사에서 기우제를 지낼 때 수양대군 이유가 내향內香을 받들고 합장을 하였는데, 도승지 이사철을 비롯하여 참여한 관리 모두가 따라하자 감찰監察 대감(大監-祭監)이던 공도 따라하였다. 대감이 기우제에 참여하여 합장하는 것은 제감祭監으로서의 예에 어긋났다고 생각하여 며칠 뒤 근신하기를 청하였지만 세종 임금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 후 집현전 직제학 신석조 등이 제감祭監이 예불을 행한 것은 헌신憲臣의 체모를 크게 손상시킨 일이라며 공의파직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이때 세종임금은 “순경이 간사한 무리였다면 기우제에서 예불을 피하였을 것이나 오히려 정성을 다하였으니 나는 순경이 정직하다고 생각 한다” 하며 공의 파직을 끝내 하락하지 않았다. 이후로 절에서 기우제를 지낼 때 감찰도 부처에게 절하는 것을 항식恒式으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이일이 있기 전인 세종30년 임금이 궁성 옆에 사찰寺刹을 세울 것을 명했을 때, 성균관 박사였던 공은 이일로 인해 불교가 다시 만연하고 그 해약이 다시 일어날 수 있으니 명을 거두어 줄 것을 강력히 상소한바 있다. 공은 불교의 폐단을 줄이기 위해 억불정책을 추진하되 불교의 장점만큼은 계승하고자 했던 선초의 사대부와 뜻을 같이 하였다고 할 수 있다. 공은 비록 세조 때의 원종공신이기는 하지만 공신들의 횡포로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펼칠 수 없게 되어 일찍 벼슬에서 물러났으나, 세 아들 기룡, 기린, 기서 모두가 문과에 급제하여 비록 고관은 아니지만 상경 종사하는 과정에서 가격家格이 더욱 신장 될 수 있었다.
공은 환향 후 수 백년의 세거지였던 비봉산 아래 중안동를 떠나 진주부 남쪽 대여촌(현 금산)으로 이주하였고, 공의 아들 통찬공諱.起龍이 대여촌을 떠나 진주부 북쪽 단목리로 이주 하였다. 이 후 주거의 편리함과 물자의 풍부함을 바탕으로 후손들이 하씨 집성촌을 형성하여 전형적인 반촌班村으로 발전시켜 이른바 단목 하씨로 예칭 될 수 있었다. 단목 세덕사의 소승사昭繩祠에 배향되었다.
◦ 하기룡河起龍
성균직강行成均直講을 지낸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순경淳敬의 장남이다. 문과에 급제하고 통례문 통찬通禮門通贊을 지냈다.
◦ 하기린河起麟
성균직강成均直講을 지낸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순경淳敬의 둘째 아들이다. 문과에 급제하고 그후 중시에 급제하여 대호군大護軍을 지냈다.
◦ 하기서河起犀
성균직강行成均直講을 지낸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순경淳敬의 셋째 아들이다. 문과에 급제하였다.
◦ 하우치河禹治 1474 成宗 5 - 1544 中宗 39
자字는 평지平之이다. 공의 증조는 직강공 휘諱 순경淳敬이고, 조고祖考는 통찬공 휘諱 기룡起龍이며, 고考 휘諱 유鮪는 창신교위彰信校尉 행行충무위忠武尉부사과副司果이다. 공은 단목리 효우孝友의 가문에서 태어나 정훈庭訓을 받으면서 성장하니 청렴강직淸廉剛直한 인품을 지니게 되었다. 무과에 투신하여 군기시 주부(종6)에 오른 후 어버이 봉양을 위해 사천현감을 자청하여 나갔다가 이후 내자주부, 사복판관 등을 지냈다. 당시 조정에서 연례적으로 제주점마濟州點馬를 실시할 때 업무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반드시 낭관郎官중에서 일에 능하고 재간才幹있는 자를 가려서 보냈는데, 공이 수명受命하여 현지에서 일을 능숙하게 처리하고 돌아오니 호조정랑에 오르게 되었고 그후 오위도총부 경력을 지냈다.
여산(礪山;익산시 여산면) 군내에 강도들의 폐해가 너무 심해 군수가 막지 못하자, 공이 군수로 나가 발호跋扈하는 20여 명의 강도들을 사로잡아 모두 처치하여 경내境內를 안정시킨 후 청빈淸貧을 일로 삼고 군민들의 생업안정에 힘쓰는 선정善政을 베푸니 호우湖右 사람들이 모두 그 정성政聲에 감복하였다. 그 뒤 내선첨정內饍僉正과 예빈부정禮賓副正으로 옮겼다가 청천강에 임臨하고 교통과 군사의 요충지인 안주安州 목사牧使에 제수되었다. 그 후 조정에서 당상관인 훈련도정訓練都正 자리가 공석空席되었으나 마땅한 인재를 구하지 못하자 공이 그 방면에 자질이 있었으므로 종3품 건공장군으로 품계가 미급未及하였지만 조정의 의론議論으로 수직守職으로 정3품 훈련도정에 등용되었다. 수직守職(자기 품계보다 높은 관직)을 받을 만큼 무예가 뛰어나 공公을 일러 전곤專閫의 재질이 있어 장차 크게 쓰일 것이라고 했으나 불행히도 안주에 있을 때 얻은 병 때문에 훈련도정의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물러나 귀향하였다. 공은 외직에 근무할 때마다 모두 치성治聲이 높아 사천과 여산에 유애비遺愛碑(송덕비)가 세워지기도 했으며, 당대의 대문장가로 중앙에서 문명을 떨치던 고성 출신 대사간 어득강과 사돈을 맺었으니 사회적 지위도 탄탄하였다. 귀향 후 20여 년 동안을 휴양하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 칠십일七十一이었다. 고가故家에서 동쪽으로 시오리쯤十五里許의 오곡산烏谷山 계좌癸坐에 장사지냈다. 관포 어득강은 묘갈명에서 공의 업적을 한漢의 관리 순淳에 비유하여 찬양하면서 “무엇을 후세에 남겼는가? 두 아들에게 청빈함을 가르쳤네” 라고 하였다.
公은 고향 원로인 사직司直 하경윤河敬倫의 따님과 혼인하여 숙淑 ‧ 활活 두 아들과 세 따님을 두었다.
장자長子 숙淑은 관포 어득강漁得江의 서랑壻郞으로 그 후손은 단목丹牧에서 문호門戶를 열어 단목7파로 분파되었으며, 차자次子 활活은 황주목사 박임경의 손녀 무안박씨와 혼인하게 되면서 함양 우루목으로 이거하여 후손들이 번성하였으니 오늘날의 양암공파 문중을 이루고 있다.
◦ 하위보 河魏寶 1527 中宗 22 - 1591 宣祖 24
자字는 미재美哉이다. 공은 목사공 휘諱 우치禹治의 장손이며 휘諱 숙淑의 장자이다. 공의 외조外祖는 16세기 문장가로 유명한 관포灌圃 어득강魚得江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간을 지내고 상호군으로 사직하여 진주에 은거하였으니 공이 외조의 문하를 일찍부터 출입할 수 있었다. 공은 남명 선생에게 집경執經 수업하지는 않았지만 일찍부터 두 동생과 함께 남명의 문하를 출입하여 학문을 토론하는 과정에서 크게 신임을 받았다. 명종 13년(1558) 생원시에 입격하여 성균관에 유학했을 때 동료 유생들이 모두 경모敬慕하였다. 늘 일이 어긋나 대과에 응시하지 못하다가 과업科業을 폐廢하고 임천林泉에서 덕을 기르며 학문에만 잠심潛心하면서, 남명의 고제高弟 수우당守愚堂 최영경 각재覺齋 하항 양현兩賢과 성리학을 강구講究하면서 활발히 교유하여 단목가丹牧家가 남명학파와 학연을 맺게 되는 시발점이 되게 하였다. 공은 순수한 천품天品으로 효우孝友를 다하고 상장제례喪葬祭禮는 항상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따르며 몸가짐이 바르고 고을에서 처신할 때 성심을 다하니 향인鄕人들이 흠복欽服하였다. 1566년 목사 박승임이 북면의 사죽리에 서재書齋를 설치하여 공에게 훈회訓誨를 주관하게 하였는데 후진들이 성취하는 바가 많았으니 후학 양성과 남명학문 전수에 크게 기여하였다.
공의 초배初配는 사천이씨니 증贈참의參議 휘諱윤綸의 따님으로 칠자이녀七子二女를 두었는데, 칠자七子는 항恒 침枕 각恪 척惕 증증 경憬 성惺이고, 이녀二女는 박천정朴天禎과 윤무尹茂에게 시집갔다. 생원․진사에 입격하고 덕천서원 원장을 역임했던 윤승경尹承慶이 윤무尹茂의 아들이다. 후배後配 진양강씨는 증贈참參議 휘諱우佑의 따님으로 사자일녀四子一女를 두었는데 이자일녀二子一女는 일찍 죽고 이자二子는 변忭과 협悏이다.
아드님 협悏이 정운원종공신定運原從功臣 일등에 책봉되면서 공은 순충보조공신純忠補助功臣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진평군晉平君에 추봉되었다.
공의 7자子 항 ․ 각 ․ 징 ․ 경 ․ 성 ․ 변 ․ 협의 후손들이 각각 송강공파 ․ 진사공파 ․ 창주공파 ․ 참봉공파 ․ 죽헌공파 ․ 단주공파 ․ 단지공파 등 이른바 단목 7파를 이루고 있다.
◦ 하진보河晉寶 1530년 中宗 25 - 1585년 宣祖 18
공의 자字는 덕재德哉이요, 호號는 영모정永慕亭이다. 직강공 순경淳敬의 5대손으로, 입단동入丹洞하신 통찬공 기룡起龍의 현손이며, 안주 목사安州牧使를 지낸 우치禹治의 손자이고 승사랑承仕郞 숙淑의 둘째 아들이다. 천성이 낙이樂易하고 덕량이 관후하여 일에 임하고 물物을 접함에 있어 밖으로 부드럽고 안으로 밝았다. 공은 남명 선생을 사사師事하였고, 백형伯兄(휘,위보)을 따라 청주목사를 지낸 강원과 함께 곤양 다솔사에 기거하면서 밤낮으로 독서를 하였는데 잠이 오면 수건으로 허리를 매달아 놓고 책을 읽었다. 노승이 이를 보고 감복하여 매일 새벽 죽을 끓어 주면서 하루는 말하기를, “공公들은 부지런히 공부하라. 이방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모두 성공할 것이다. 내 꿈에 황룡 한 마리가 이방에서 승천하는데 두 마리의 금 거북이도 뒤따라 하늘로 올라갔으니 이는 좋은 조짐이다”고 하였다. 뒤에 삼공三公 모두 사마시에 입격하였고 공公과 강원은 문과에 급제하였다. 공은 명종10(1555)년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 승정원 주서, 사간원 정언, 세자 시강원 사서, 병조좌랑, 사헌부 지평, 예조정랑, 사간원 헌납 등을 거쳤다. 대간臺諫으로 근무할 때 차문箚文을 올려 생살권生殺權을 쥔 당대의 권신 윤원형(문정왕후의 동생)을 탄핵하였더니 남명 선생이 서찰을 보내 칭찬하였다. 명종 21(1566)년 성균관 사예로서 강원도에 파견되어 백성들의 진휼 상황을 살폈고, 다음 해에 외직으로 나가 선산부사가 되면서 외직으로 목사․부사를 지낸 것이 다섯 번 이었는데 선산․안주․성주․김해․밀양이다.
김해 부사일 때 오래 동안 누적되어온 결손 관곡 때문에 그 폐단이 적지 않았는데 공이 그 문건을 불태워 버리고 관청비용을 절약하여 보충하고 고을 민에게 부담시키지 않았으니 공이 떠난 후 공의 선정을 기리는 송덕비가 세워지기도 하였다. 남명 선생이 후학을 위해 김해의 신어산 아래에 지은 산해정을 확대하여 서원으로 창건하여 남명 선생의 위패를 모셨는데 훗날 광해 원년 신산서원으로 사액이 내려졌다.
밀양에서는 사가士家의 부녀婦女들이 송사 때문에 관청에 예사로이 드나들면서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는데 공이 예양禮讓과 염치廉恥를 가르치고 깨우쳐 그 습속을 혁파하였다. 또 앞에 있는 강물에 배가 침몰하여 익사자溺死者가 발생하자 전례에 따라 공은 체임遞任될 처지였으나 사민士民들이 성문을 막고 한 달이 넘도록 에워쌓으니 조정에서 이를 듣고 유임留任을 허락했으며 백성들은 비를 세워 송덕하면서 이를 거사인정비去思仁政碑라 하였다.
부사 하정河珽(청백리 하맹질의 증손)이 기묘사화 때 김해부사로 재직하면서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여 오래 동안 신원伸寃되지 못했는데 공이 이에 신설伸雪(伸寃雪恥)을 논했으니 사람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선조6(1573)년 사헌부 장령(정4)이 되었고 만년에는 수우당 최영경과 친교하면서 계자系子 성惺을 수우당의 문하에서 수학하게 하였다. 공이 병들어 위독하자 수우당이 찾아와 문병하고 친히 탕약을 달였다. 향년 56세로 선조 18년에 세상을 더나니 집안에는 관棺을 만들 재목조차 없어 수우당 최선생이 관재棺材를 부의賻儀했으니 당시 사람들이 어진 분의 부의를 얻었다면서 크게 기뻐하였다. 공이 떠난 7년 뒤 임진왜란 때 왜구들이 김해로부터 습격하여 진주를 포위하고 지나는 곳마다 분탕과 살육을 무수히 자행했는데, 단지촌에 이르러서는 공이 거처하던 곳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곳은 우리 원님의 집이다」 하면서 불태우는 것을 금하였으니 이는 대개 왜적을 따라온 사람들 중에는 김해인金海人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한다. 200여년 뒤에 김해의 사림들이 산해정에 공을 배향配享할 논의를 했으나 나라의 금법禁法으로 인해 이루지 못하였다. 공은 아들이 없어 조카 성惺으로 후사를 이었고, 따님만 하나 두었는데 내암 정인홍의 아들 정연鄭沇과 혼인하였다.
◦ 하국보河國寶 1539년 中宗 34 - ?
자字는 선재善哉이고, 증 순충익조공신 자헌대부 병조판서 거원巨源의 후손이고 안주목사를 역임한 우치禹治의 손자요 승사랑承仕郞 숙淑의 셋째 아들이다. 일찍이 문의文意를 해독하였고 사서史書에 능하였을 뿐 아니라 독서를 통해 학문적 포용성을 길렀고 자신의 수양과 더불어 고을의 풍습을 교화하는 데 앞장섰다. 항상 충효에 관심을 가졌을 뿐 아니라 전통윤리傳統倫理에 심혈心血을 쏟았다. 1573년 宣祖 6에 생원生員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을 접고 초야에 살면서 후진양성에 힘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