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단주공파丹洲公派
◦ 하 변河忭 - 파조편 참조
◦ 하달제 河達濟 1636 인조14 ~1674 숙종 즉위년
공은 단주공 변忭과 충의위 이유눌李惟訥의 따님 성산이씨 사이의 독자獨子이시다. 공은 초인지재超人之才와 경세지략經世之略이 있었고, 일찍이 경사經史와 제자諸子에 통달하여 1660년현종1년 25세에 생원시에 입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 관중館中의 제학사諸學士와 더불어 경전經典의 취지를 강론하였고 한양의 제호걸諸豪傑과 교우交友를 맺었다. 당시는 공이 태어난 해에 있었던 병자호란의 국치國恥를 씻기 위해 북벌운동이 한창이었던 때라 공도 선세先世로부터 이어온 충훈 ‧ 절의 ‧ 효우를 계승하기위해 들어와서는 효우지도孝友之道를 다하였고, 나가서는 제현諸賢과 더불어 국사國事를 도모圖謀하였으니 장차 이일에 기회를 얻어 온축蘊蓄한 포부를 천하天下에 나타내고자 함이었으나 불행이도 39세로 요절夭折하니 사우士友들이 통석痛惜해 하였다.
◦ 하 정 河瀞 1659 孝宗 10 - 1714 肅宗 40
자字는 이해爾海이요 호(號)는 괘호정掛壺亭이다. 단주공 변忭의 손자이고 생원 달제達濟의 아들이다. 단동 세제世第에서 태어나 문헌고가文獻古家에서 성장하면서 귀로 듣고 눈으로 보았기에 윤상倫常을 일상日常에 행하지 않음이 없었다. 16세에 고자孤子가 되어 거상居喪의 매사每事에 전일專一하여 성인成人과 같았다. 이후 모부인을 지성至誠으로 한결같이 섬기어 지체志體를 편안케 봉양하였으니 종족宗族이 그 효성을 칭송하였다. 치가治家는 근검勤儉을 주로 하니 창늠(곳간)은 남아 쌓인 것이 있어 춘궁기에 이웃에게 베풀 수 있었고, 빈우賓友들을 기쁘게 맞이하여 문주文酒로 서로 즐겼으니 스스로 호號를 괘호정掛壺亭이라 한 것은 까닭이 있음이다. 일찍이 향시에는 3번이나 입격하였으나 서인과 남인과의 당쟁이 격심한 시기였기에 대과 공부는 접고 병거屛居하면서 후진 양성에 힘쓰니 따르는 후학이 많았다. 향내 사백詞伯들과 교우하면서 유유자적悠悠自適하였다. 유집遺集이 있다
◦ 하윤채 河潤采 1691 肅宗 17 - 1741 英祖 17
자字는 택수澤受이요 호號는 오오당吾五堂이다. 단주공 변忭의 증손으로, 생원 달제達濟의 손자이고 괘호정掛壺亭 정瀞의 아들이다. 공은 자품資稟이 활달豁達하며 행동을 방정方正하게 제어制御하였고 마음을 항상 관인寬仁에 자리잡게 하였다. 효성이 지극하여 양친兩親을 섬김에 지체志體를 편안하게 하였고 처사處事를 공평하게 하였으며 의義롭지 않으면 두속척백豆粟尺帛도 취하지 않았다. 남과 사귐에 신의信義가 있었고 빈객賓客을 접대함에는 성의誠意를 다하였고, 조선祖先을 공경하게 받들고 가문家門에는 이간離間하는 말이 없어서 항상 화기애연和氣藹然하였다. 향시에 두 번 입격하였고 저서著書로는『자경훈몽』‧『궁격설』‧『역리』그리고 유집遺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