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단지공파丹池公派
◦ 하 협河悏 - 파조편 참조
◦ 하달영河達永 1611년 光海 3 - 1664년 顯宗 5
공公의 자字는 혼원混源이고 호號는 구이당具邇堂이다. 증贈이조판서吏曹判書 진평군晉平君 위보魏寶의 손자이며, 단지공 진사進士 협悏의 장남이다.
공公은 자질이 청명淸明하고 정훈庭訓을 받아 효우孝友가 두터웠으며 언행言行이 단수端粹하고 곧고 바른 주장을 펼치며 그 주장을 실천함에 있어서도 독실하였다. 경학經學에 잠심潛心하여 세속世俗의 명리名利에 대한 생각을 끊고 소요자적逍遙自適하면서 겸재 하홍도謙齋河弘度 ‧ 찰방 권극경察訪權克經 ‧ 상사上舍 안시진安時進과 더불어 도의교道義交로 지냈다. 학문이 뛰어나고 논리論理가 청빙淸氷하여 남명南冥의 산해연원록山海淵源錄을 바로잡는 일에도 참여參與하였으니 공公이 세상을 떠날 때 겸재 하홍도는 만사에서 “만년에 남명 사우록을 함께 편찬하려 하였더니 하루 저녁 바람이 어찌 빼어난 나무를 꺾어버리는가” 라고 하였고, 찰방 권극경은 만사에서 “산해 선생을 추모하고 흠양하는 선친先親의 뜻을 이어받아 연원록淵源錄을 이정釐正하여 후몽後蒙을 깨우쳤네” 라고 하였다. 공의 전취부인은 김해허씨이고 후취부인은 조영기의 따님 함안조씨이다. 조영기는 송정공 하수일의 외조부 조정견의 증손이다. 구이당집具邇堂集이 전해지고 있다.
ᅌ 하달천河達天
◦ 하달한河達漢 1624년仁祖 2 - 1677년肅宗 3
자字는 통원通源이고 호號는 용강龍岡이다. 증贈순충익조공신 이조판서 진평군晉平君 위보魏寶의 손자이고 단지공 진사進士 협悏의 아드님이다. 일찍이 시례詩禮의 교훈을 이어받고 효우가 출천하여 향당鄕黨의 표준이 되었다. 1660년顯宗1 사마시進士에 입격하였으나 당시 사림士林이 분열되고 당쟁黨爭이 격렬激烈하여 자신의 뜻을 펼치기 어려웠던 시기였기에 거업擧業을 접고 다시는 과거에 응하지 않았으며 자연 속에서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겸재 하홍도의 문하에서 남명학의 핵심을 전수받았으나 정인홍의 몰락으로 남명南冥문집의 편차編次 관계로 분쟁이 일어나 진주권역의 남명학파가 분열되어 갈등을 겪게 되었을 때 최백련의 무고로 단목가丹牧家가 대북잔당으로 몰리게 되었는데, 공이 종질從姪 하명河洺과 함께 회덕의 우‧춘(尤庵 宋時烈과 同春堂 宋浚吉) 양현兩賢을 찾았더니 양현께서 그 무망함을 알고 구명에 힘써 마침내 귀정歸正케 되었다. 이후 향리에 용강정사龍岡精舍를 짓고 장수藏修의 처소로 삼아 경학에 잠심潛心하며 후학 양성에 힘을 쏟으니 양현이 선학仙鶴으로 지목하였다. 용강龍岡이라 자호自號한 것은 남양南陽땅 와룡강臥龍岡 아래에 은거隱居하면서 경륜經綸을 온축蘊蓄하던 제갈공명諸葛孔明을 흠모欽慕해서였다. 공의 배위는 매헌梅軒 송치원宋致遠의 따님 은진송씨인데 송치원은 남명의 처부妻父 송린宋璘의 종손자로 사계 김장생의 문인이다.『용강유집』이 전해진다.
◦ 하 현河灦 - 효자·열녀편 참조
◦ 하형河浻 1649년 仁祖 27 - 1731년 英祖 7
공公의 자字는 경해景海이고 공호公號는 호군護軍이다. 단지공丹池公 진사進士 협悏의 손자이며 진사進士 달한達漢의 아드님이다. 공은 자질이 순인純仁하고 기품이 아름다우며 덕성은 세속의 모범이 되어 명성이 오래도록 선비의 자리에서 무거웠으니 효우孝友는 가정의 가르침이요 시詩와 예禮는 선대로부터 이은 명성이었다. 어릴 때부터 빼어나 종백형從伯兄 만향당晩香堂과 함께 오곡정사梧谷精舍에서 수학하여 고비皐比(講學의 자리)에서 이름이 높아 1726년 덕천서원 원장을 엮임하였다. 만년에는 서호西湖의 편안한 노닒을 사모하여 한가롭게 취미로 소요逍遙하였고 다섯 아들의 봉양이 있어 한 몸의 강녕함을 이루었다. 공이 인仁을 행하고 덕을 쌓아 오복의 첫 째인 장수長壽를 누렸는데 무신영조4년에 암행어사가 이를 조정에 알려 그해에 공에게 노인을 우대하는 특별한 은전으로 통정대부 용양위龍驤衛 호군(정4품)의 벼슬을 내렸다.
단지丹池 종가宗家에 대代가 끊어지게 되자 장자長子를 보내어 승가承家토록 하였고, 임란 후에 창주공 증憕이 진양하씨 족보를 수습하여 창보刱譜하였으나 인판印版하지 못한 것을 공公이 제족諸族의 힘을 모아 1719년 기해己亥년에 비로소 인판印版을 하였으니 이것이 곧 진양하씨 최초의 족보인『기해보』이다. 호군공 문집護軍公文集이 전해진다.
◦ 하윤관河潤寬 1677년 肅宗 3 - 1754년 英祖 30
공의 자字는 택후澤厚이고 호號는 인재忍齋이다. 단지공 진사進士 협悏의 증손이며 용강공 달한達漢의 손자이다. 호군공 형浻의 아드님으로 태어나 단지공의 장손인 종숙부 만향당 현灦에게 입적되어 단지공 종가를 계승하였다. 어릴 때부터 순박하고 효우孝友가 남달랐으며 글을 읽을 때는 총오聰悟가 남보다 뛰어났으나 현달顯達을 바라지 않아 다만 향시에 입격하는 것으로 만족하여 일찍부터 거업擧業을 포기하고 성현의 학문이 좋아 이를 몸소 체득하고자 하였다. 태와 하필청 ‧ 도와道窩 이덕윤李德潤 ‧ 소암 이덕관 등 지역의 명유名儒들과 교유하면서 평생 학문에만 정진하여 진주가 문향文鄕으로 이름나게 하는데 기여하였으며 18세기 진주권역의 유림을 대표하였다. 인忍을 실천하여 선비의 도리를 지키고자 했던 태산 같은 마음을 지녔기에 참을 인忍자를 호號를 삼았는데, 가족이 화목하게 사는 비결을 물으니 인忍자를 일백 번 써서 대답을 대신하였다고 한다. 재물을 늘리는 일은 뜻을 손상시키고 허물을 더하는 짓이니 심히 옳지 못하다고 하며 자질子姪들에게 늘 경계하였다. 先代의 문적을 정리하고 아울러 가학家學을 위한 서적을 구비하여 가학을 전수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으며,『창수록唱酬錄』과 자신의 문집인『인재집』을 남겼다. 선공先公이 주도하여『기해보』를 발간할 때 공이 큰 역할을 하였으며,『기해보』의 원본으로 파악되는『무인중수보』도 공이 직접 작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무인중수보』는 근년에 단지가 종택에서 발견되어 진양하씨 세보世譜 연구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일찍부터 덕업德業을 이루었기에 통덕랑通德郞 벼슬에 올랐으며 78세의 일기로 고향에서 세상을 떠났다.
◦ 하윤일河潤一 1689년 肅宗 15 - 1767년 英祖 43
공의 자字는 택선澤善이고 호號는 죽촌竹村이다. 단지공 진사進士 협悏의 증손曾孫이며 용강공 달한達漢의 손자이고 설渫의 중자仲子이다. 어려서부터 자품資稟이 온후溫厚하여 망동妄動하는 일이 없었다. 일찍이 가학을 이어받았고 대소헌의 현손玄孫인 묵재黙齋 조석규趙錫圭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수학하였다. 당시 사회의 부패와 분경分競의 비리非理가 횡행橫行하는 것을 목도目睹하고 그 폐단弊端을 개탄慨歎하면서 거업擧業을 접고 오로지 자신의 수양과 강구저술講究著述에만 전념하였으며 노년老年에는 시서詩書와 잠훈탐구箴訓探究에 경심傾心하면서 성리학에 정진精進하였다.
족族후손 회봉 하겸진 찬撰 묘갈명과 재령 이현덕이 찬한 행장이 전하고 문집文集이 있다.
ᅌ하응회河應會 1696년 肅宗 22 - 1747 英祖 23
자(字)는 성제(聖際)이다. 단지공 협悏의 현손이고 만향당 현灦의 손자이며 인재공 윤관潤寬의 첫째 아드님이다.
◦ 하응명河應命 1699년 肅宗 25 - 1769년 英祖 45
공의 자字는 성휴聖休이고 호號는 치와癡窩이다. 단지공 협悏의 현손이고 만향당 현灦의 손자이며 인재공 윤관潤寬의 둘째 아드님이다.
천자天姿가 영매하고 재기才器가 특출하였으며 효우가 돈독하였고 조행이 정성스러운 것은 가학家學을 이어받은 것에 기인한 것이었다. 여러 차례 향시鄕試에 입격하였으나 스스로 수신修身하기를 원하였기에 거업擧業을 포기하였다. 거처하는 곳을 어리석은 자가 사는 곳이라 명명命名하였으니 대체로 걱정없이 살고자 하는 뜻을 보인 것이었다. 문음文蔭으로 통덕랑을 지냈으며, 1767년 죽촌竹村 윤일潤一 공이 선도하여 진양하씨보를 중수하려다 손세損世하니, 1769년에 공이 이어받아 역사役事를 진행하다가 서거하고 1770년에 오방재梧坊齋에서 족보를 인간印刊하였으니 경인보庚寅譜이다. 그 서문을 공이 썼다.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가 찬한 행장行狀과 족후생族後生 회봉 하겸진이 찬한 갈명碣銘이 있고 문집이 전한다.
◦ 하응휘河應彙 1709년 肅宗 35 - 1786년 正祖 10
자字는 회여會汝요, 호號는 사시헌四時軒이니 진사進士 협悏의 현손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진사進士 달한達漢이고 아버지는 윤창潤昌이요 생부生父는 윤석潤碩이다. 유년부터 영오穎悟 하여 성리학에 정진精進 하였다. 육예六藝의 글과 백가百家의 편編을 항상 가까이하였으며 사악邪惡하고 간사奸邪함을 멀리 하였다. 인생에는 기饑, 한漢, 궁窮, 곤困의 불청사환不請四患이 따르게 마련인데 하늘의 운행運行에도 마치 춘, 하, 추, 동이 있어 모진 겨울과 같은 계절도 있으나 봄에 잎 피고 가을에 결실을 거두어들이는 것처럼 어려움을 순순히 감수하는 철리哲理를 궁행躬行하겠다는 자경自警과 다짐으로 자호自號를 사시헌四時軒이라 하고, 자제子弟에게도 항상 가르침을 게을리 하지 아니하였다. 종사에 특기할 족적族跡은 초간보初刊譜인 진양하씨 기해보己亥譜를 1719년에 호군공護軍公 형浻이 인판印版 한 후에, 50여년 동안 개수하지 못하여 이를 안타깝게 여긴 윤일潤一과 응명應命 등이 재수코자 보사譜事를 시작하였으나 연이어 하세下世 하여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을 종원의 협력을 얻어 1770년에 일을 마친 것이다. 이 족보가 진양하씨 경인보庚寅譜이며 공公이 발문跋文 하였다. 저서는 문집文集이 있다.
◦ 하일호河一浩 1717년 肅宗 43 - 1796년 正祖 20
공의 자字는 이보履甫이요 호號는 죽와竹窩이다. 단지공 협悏의 5대손으로 인재공忍齋公 윤관潤寬의 장손이며 처사 응회應會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영오穎悟하고 자품資稟은 온후溫厚하고 후덕厚德하였다. 박이계朴尼溪 ‧ 성교와成橋窩 ‧ 권상계權霜溪등과 학문을 강론하고 성리학에 정진精進하였다. 죽촌竹村 윤일潤一 공과 치와癡窩 응명應命 공이 진양하씨 족보를 중수하시다가 연이어 손세損世하니 그 일을 이어받아 1770년에 오방재에서 경인보를 간행하고 그 후서後序를 썼다. 또, 문중의 원사院祠 관리에도 남다른 열성을 보여 오방재梧坊齋 창건 후 80여년을 지나는 동안 풍후에 심히 퇴락頹落하여 유지가 어려운 상태에 이른 것을 1764년에 신암공新庵公 후손인 이광태李光泰와 협의하여 문중의 협력으로 응석사凝石寺의 일옥一屋을 매득買得하여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개보수하였다. 성섭成涉〮 ‧〮〮 박래오朴來吾 ‧ 이우육李宇錥 등의 서문序文이 실려 있는『죽와산고竹窩散稿』가 전해진다.
◦ 하복호河復浩 1726년英祖 2 - 1805년純祖 5
공의 자字는 형보亨甫이고 호號는 단사丹砂이다. 단지공 협悏의 오대손으로 인재공 윤관潤寬의 손자이며 치와공癡窩公 응명河應命의 중자仲子이다. 천자天姿가 영오潁悟하고 문장이 섬박贍博)하여 여러 번 향해鄕解에서 입격하였으나 상喪을 당하여 본래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후진後進의 훈회訓誨에만 열중하였으니 성취한 사람이 많았다. 중재 김황이 찬한 묘갈墓碣이 있으며 유집遺集이 전한다.
◦ 하진백河鎭伯 1741년英祖 17 - 1807년純祖 7
공의 초휘初諱는 진극鎭極이고 자字는 자추子樞이며 호號는 국담菊潭이다. 단지공 협悏의 육대손으로 처사공 응회應會의 손자이고 죽와공竹窩公 일호一浩의 아들이다. 어릴 때부터 재주가 남달라 세 살에 글자를 깨우치고 여섯 살에 능히 부시賦詩를 하였다. 소년시절 문충공 하 륜 선생의 재실인 오방재에서 글을 읽으며 포부를 키웠고 부모의 명으로 1790년正祖14 진사시에 입격하였다. 그 후 다섯 차례나 입시入侍하여 남다른 대우를 받았으나 정조 임금의 급서急逝로 노론이 득세하면서 큰 뜻을 펼칠 수 없게 되자 거업擧業을 접고 평생 학문에만 힘쓰더니 1804년 덕천서원 원장에 추대되었다. 공의 벗인 국헌菊軒 이공李公, 눌헌訥軒 박공朴公 등은 한 시대의 이름난 학자들로 매양 공은 재상의 그릇인데도 산림에서 늙고 있음을 탄식하였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과 목재木齊 이삼환李森煥(李瀷의 문하생) 등과도 친교를 가졌는데 다산茶山이 공을 두고 시詩를 지어 이르기를,
단산丹山의 한 구비 그윽한 곳에 살면서,
백수白首로 궁구窮究한 경經을 누구에게 물었던가?
고요히 앉아 또 찾는 것은 안자顔氏의 낙樂(顔回의 淸貧樂道)이었고,
잔년殘年이 된 때에 모두 붙인 것은 회옹晦翁(朱子)의 글이었네.
간아澗阿(내와 언덕)의 일월日月속에 고침高枕을 베고 있어,
경락京洛(서울)의 진애塵埃(세상의 속된것)라도 소맷자락에 물들지 않으리.
이 몸이 있을 곳 어디인지 알려거든, 미원의 꽃나무가 내 집이라오.
丹山一曲寄幽居, 白首窮經問孰如.
靜坐且尋顔氏樂, 殘年都付晦翁書.
澗阿日月惟高枕, 京洛廘埃不染裾.
要識此身休歇處, 渼園花木是吾廬
라고 하니 사람들이 이르기를“공의 그림자를 비춘 것이다”라고 하였다. 낙파洛坡 유후조柳厚祚는 이르기를, “두 번이나 시연에 들어갔고 이름이 선부選部에 올랐는데, 그의 온포薀抱를 베푼 것이 아니라면 어찌 세도世道를 한결같이 개탄할 것이 아니겠느냐?”라고 하였다.
자연과 더불어 살고자 집 주변에 작은 못을 파고 주변에 국화를 심어 가을이 되면 국화꽃이 피어 싯구詩句를 찾느라 매일 밤에 뜰을 산보하면서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조렸으니 공의 호號도 이에 맥을 같이 하는 것이었다. 공이 하세下世한 해에 대부분의 국화 역시 말라죽었는데 공의 계씨季氏(鎭中)가 글을 써서 국화를 위로하자 다시 소생하는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는 일화가 지금까지 가사家史에 빛나고 있다. 낙파洛坡 유후조柳厚祚가 갈명渴命을 찬撰하였고 문집으로『국담집』이 전하고 있다.
◦ 하진탁河鎭卓 1745년 英祖 21 - 1833년 純祖 33
공의 자字는 자앙子仰이고 호號는 죽모재竹慕齋이다. 단지공 협悏의 육대손으로 처사공 응회應會의 손자이고 죽와공 일호一浩의 중자仲子이다.
천성이 효우하여 어려서부터 자제子弟로서의 허물이 없었고, 형제 사인四人이 책상을 맞대고 학문에 전념하여 향내에서 사백詞伯이 되었다. 평생토록 선인先人의 전형典型을 절실히 사모하여 작은 재실을 짓고 편액을 걸어 죽모竹慕라 하였다. 유고遺稿가 전하고 있다.
◦하진중河鎭中 1750년 英祖 26 - 1812년 純祖 12
공의 자字는 자심子深이고, 진영鎭永으로 개명하였으며 호號는 복와復窩이다. 단지공 협悏의 육대손으로 처사공 응회應會의 손자이고 죽와공 일호一浩의 계자季子이다. 학문과 행의行誼가 뛰어나 세상 사람들이 추중推重하였다. 안으로는 백형伯兄 국담공菊潭公과 화목하게 시를 지어 읊조리어 남들이 알 수 없는 즐거움을 누리고, 밖으로는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 ‧ 두와蠹窩 최흥벽崔興壁 등과 도의교를 맺었다. 공이 호號를 복와復窩로 하게 된 것은 천지의 양陽이 회복되는 원리에 느낀바가 있어 당호를 복復으로 한데서 비롯되었다.
공의 유집인『복와유집』에 실린「조국문弔菊文」은 맏형 국담공의 죽음과 동시에 국담공이 심은 국화가 말라죽자 국화를 조문한 글로서 형제간의 우애를 찬미한 것이고,「복와자만復窩自輓」은 공이 위독했을 당시 스스로 만시輓詩를 지은 사실을 들어 매순간 언행을 경계한 유자儒者로서의 면모를 드러낸 것이다. 행장은 낙파洛坡 유후조柳厚祚가 찬하였고 묘갈은 영가永嘉 권상규權相圭가 찬하였으며 문집이 전한다.
◦ 하태범河泰範 1770년 英祖 46 - 1814년 純祖 14
공의 자字는 태경泰卿이고 호號는 낙옹樂翁이다. 단지공 협悏의 칠대 종손으로 인재공 윤관潤寬의 현손이며 죽와공 일호一浩의 손자이고 국담공 진백鎭伯의 아들이다. 공公은 계부季父 복와공復窩公에게 가르침을 받아 스스로 학문에 면려勉勵하였고 배움에 교독敎督을 받지 아니하였다. 형제간의 우애가 두터워 항상 아우 정범鼎範과 연상독서聯床讀書 하면서 고인古人의 인의仁義를 궁구궁행窮究躬行하였으며 선업先業을 제일第一로 삼고 사친봉제事親奉祭에 진성盡誠하였으며 종족宗族 접빈接賓에도 정성精誠을 다하였다. 낙옹유고樂翁遺稿가 전하고 있다.
◦ 하진민河鎭敏 1771년英祖 47 - 1850년哲宗 1
공의 자字는 자형子亨이고 호號는 돈와遯窩이다. 단지공 협悏의 육대손으로 호군공 형浻의 현손이며 조고祖考의 휘는 응성應星이고 고考의 휘는 섭호涉浩이다. 입재立齋 정종로의 문하門下에서 수학하였고 유행儒行으로써 이름이 널리 알려져『진양지』와『금능지金陵誌』인물편에 공의 학행學行이 실려 있다. 만년에 김해金海에 옮아가서 살았으며 유고遺稿 이권二卷이 전한다.
◦ 하정범河鼎範 1777년 正祖 1 - 1855년 哲宗 6
공의 자字는 정경鼎卿이고 호號는 한시당恨是堂이다. 단지공 협悏의 칠대손으로 죽와공 일호一浩의 손자이고 국담공 진백鎭伯의 중자仲子이다. 어릴 때부터 재주가 뛰어나 경전과 사서에 널리 통달하였다. 성품이 남에게 아첨하지 아니하고 차라리 쌓아둘지언정 남에게 팔지 아니하였고 스스로 눈감고 알아주기를 구하지 아니하였다. 유고遺稿가 있다.
◦ 하서범河敍範 1779년 正祖 3 - 1848년 憲宗 14
공의 자字는 내경乃卿이고 호號는 묵와黙窩이다. 단지공 하협河悏의 칠대손으로 죽와공 일호一浩의 손자이고 진억鎭億의 아들이다. 천성이 순수醇粹하고 후덕하였으며 뜻을 북돋우어 일찍부터 학문을 시작하여 학문과 문예가 일찍 성취되었다. 월포月浦 이우빈李佑殯, 진사 성경한成慶漢 등 제공諸公들과 도의교를 맺고 함께 강마講磨하였다. 족현손族玄孫 정근貞根이 행장을 지었고 묘갈은 재령 이현덕이 찬하였으며, 유고遺稿가 전한다.
◦ 하우범河禹範 1792년 正祖 16 - 1866년 高宗 3
공의 초휘初諱는 칙범則範이고 자字는 순경舜卿이며 호號는 모와慕窩이다. 단지공 하협河悏의 칠대손으로 섭호涉浩의 손자이고 진민鎭敏의 아들이다. 효행으로 세상에서 칭송된 사실이 금릉지金陵誌에 실려 있고 유고遺稿가 전한다.
◦ 하정범河廷範 1806년純祖 6- ?
공의 초휘初諱는 명범命範이고, 자字는 인경仁卿이며 호號는 석천石泉이다. 단지공 협悏의 칠대손으로 죽촌공竹村公 윤일潤一의 현손玄孫이며 경착공耕鑿公 응추應秋의 증손이며 상호尙浩의 손자이고 진정鎭鼎의 아들이다. 성품이 강직剛直하여 위무威武로써 그 뜻을 굴복시키지 못하였고 박식博識과 의행懿行으로 당시에 추중推重을 받았다.
◦ 하치용河致龍 1806년 純祖 6 - 1883년 高宗 20
공의 자字는 주서珠瑞이고 호號는 만송晩松이다. 단지공 협悏의 팔대 종손이고 국담공 진백鎭伯의 손자이며 낙옹공 태범泰範의 아들이다. 학식이 풍부하였고 인품이 뛰어났으며 건장하였다. 유림의 중망重望이 두터웠으며 도정都正 정내석鄭來錫, 낙파洛坡 유후조柳厚祚, 승지承旨 한치림韓致林, 안정곡安靜谷 등과 교유하였다. 묘표墓表는 족族후손 용환龍煥이 찬하였고 만송유집晩松遺集이 있다.
◦ 하계효河啓涍 1846년顯宗 12 - 1895년純宗 1
공의 자字는 해조海朝이고 호號는 월호月湖이다. 단지공 협悏의 10대 종손으로 만송晩松 치룡致龍의 손자이며 처사 석원錫源의 아들이다. 재주와 성품이 범상을 뛰어 넘어 5, 6세의 어릴 때부터 이미 독서하고 힘써 실천하였다. 13세 때 부친을 잃고 조부 만송공을 따라 황매산 아래 안정동으로 이주했다. 공公은 약관의 나이에 고헌 정래석(1808년~1893년)을 스승으로 모시고 학문을 닦았는데 고헌은 한강 정 구의 후손으로 가학을 계승하여 어려서부터 힘써 배우고 실천하여 문장이 뛰어난 선비였다. 공公이 입신양명을 꿈꾸며 과거 준비를 위해 시문에 관심을 보이자 스승 고헌은 “그대는 가문의 전통을 이어야 하는 사람이다. 우리 유학의 학문은 시문에 있지 않고 근본 공부에 힘쓰는 것에 있다” 하고 성현의 가르침에 정진할 것을 타이르자 그 때부터 거업擧業을 접고 마음을 가다듬어 성현들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려고 힘썼다.
후산后山 허유許愈 ․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 교우㬔宇 윤주하尹冑夏 등의 현유賢儒들과 교유하였으며, 척암 김도화의 문인이 되면서 향산 이만도 등의 강좌江左지역 선비들과도 교유를 통해 학문의 폭을 넓혔다. 면우는 공이 상중喪中에 있을 때 공을 위로하는 편지를 보내왔다. 공은 후진 교육에 특별히 힘을 쏟았으며 장자長子 환식을 후산后山의 문하에 보내 학문을 익히게 하였다. 1886년 장자 환식이 세상을 떠나자 애통해하며 다시 단목으로 돌아왔고, 향산 이만도에게 부탁하여 단지공의 행장을 새로 갖추는 등 위선사업爲先事業에도 주력하였으며 진양 하씨『병신보丙申譜』간행을 주도하였다. 지역 유림의 일에도 적극 동참하여 면우 곽종석, 교우 윤주하 등과 청곡사에 모여 남명선생 문집 교정의 일에 참여하였으며 산천재에서 남명선생 문집 간행의 일에도 관여하였다.『월호유집月湖遺集』에 아들 하정근이 지은 가장家狀, 이중철이 지은 행장行狀, 최긍민이 지은 유사遺事, 중재 김황이 지은 묘갈墓碣이 차례로 수록되어 있다.
◦ 하환식河煥植 1863년哲宗 14 - 1886년高宗 23
공의 자字는 문현文現이고 단지공 협悏의 11대 종손으로 낙옹공 태범泰範의 현손이고 월호공 계효啓涍의 장자長子이다. 재령 이현덕李鉉德이 찬한 묘지墓誌와 문집文集이 있다.
◦ 하장식河章植 1873년高宗 10 - 1941년
자字는 문휴文休요, 호號는 모산某山이다. 단지공 협悏의 후손이고 태범泰範의 현손이며, 계효啓涍의 아들이다. 전훈典訓을 승습하여 학행을 겸비하였다. 저서는 모산유고某山遺稿가 있다.
◦ 하계휘 河啓輝 1874년高宗 11 - 1943년
공의 초휘初諱는 계금啓琴 ‧ 계익啓翼 ‧ 계옥啓沃이고, 자字는 봉조鳳朝이며 호號는 아단我丹이다. 단지공 협悏의 10대손으로 국담공 진백鎭伯의 현손이요, 한시당恨是堂 정범鼎範의 증손이고, 경우慶佑의 손자이며 직직옹直直翁 황원榥源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자품自禀이 온화溫和하고 행의行義가 단정하여 항상 주위의 모범이 되었다. 교우 윤주하膠宇尹冑夏의 문하에서 훈도薰陶를 받아 학문에 정진하다가 만년에 세변으로 은거하면서 경사經史에 잠심潛心하였다. 하동 옥종에 있는 구산재龜山齋에서 묵재黙齋 하정근河貞根, 이현구, 김선익, 양재형, 김인화 등 많은 후학들을 가르쳤다. 문집文集이 있다.
◦ 하경규 河慶圭 1878高宗 15 - 1941
공의 자字는 석민錫民이고 호號는 옥천玉泉이다. 단지공 협悏의 7대손으로 진학鎭學의 손자이며 태범台範의 중자仲子이다. 유시부터 총명절륜聰明絶倫하여 약관의 나이에 사서삼경四書三經에 달통할 정도로 학식이 뛰어났으며 선비로서의 언행에 한 치의 어긋남이 없으니 강우지역 유림에서 널리 추중推重을 받았고 회봉晦峯 선생으로부터도 많은 지도와 기대를 받았다. 지기志氣가 견강堅剛하고 의표儀表가 단아하였으며 위기지학에 전심하고 실천을 중시하니 세인世人의 긍식矜式이 되었다. 가빈家貧친노親老하여 원지遠地에서 종사從師하지 못하고 향내鄕內의 홍유鴻儒들에게 취정就正하여 덕업이 숙취夙就하였다. 치가治家에 법도가 있어 엄격하지 않아도 가인家人들이 모두 감화하였으며, 비례非禮의 언사가 없고 비리卑俚한 일에는 가까이 하지도 않았다. 일제 치하에서 창씨개명의 강압에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민족혼民族魂을 지켜나갔으며, 족친族親들과 함께 운곡정사雲谷精舍를 건립하여 일제의 탄압으로 위축되어가던 유림儒林의 사기를 진작시켜 나갔다. 제월정霽月亭건립 ‧ 단지계丹池契 결성 등 문중 일에도 앞장서 노력하였으며, 구산재와 운곡정사 등에서 후생들을 훈학하여 인재 양성에 힘썼다. 옥천유고玉泉遺稿가 있다.
◦ 하식원河植源 1887哲宗 24 - 1953
공의 호號는 호생湖生이니 단지공 협悏의 8대손으로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 형조참판에 오른 공범孔範의 손자이며 통덕랑通德郞 운파雲坡 경신慶臣의 아들이다. 유년부터 미목眉目이 맑고 성행性行이 방정方正하였으며 취학하여서는 스승이 독학督學하는 번거로움 없이 스스로 면려勉勵하였다. 시부詩賦와 문사文詞에 능하였으며 16세에 부친상父親喪을 당하여 학문에 전념하지 못하고 자신이 가사를 맡아 경영하여 부유하게 되었으나 조금도 교만驕慢함이 없었다. 사우들과 더불어 교류하여 왕래가 끊이지 않았고 마을 뒤에 운곡재雲谷齋를 지어 향리의 사백詞伯들과 학문을 강론講論하고 후진양성에 심혈을 쏟았다. 하동군 옥종면에 옥종보통학교를 창립하기 위하여 지방 부담금 마련에 솔선하여 온 정성을 쏟아 어려운 여건에도 개교를 성취시켰으며, 진주 일신학교 창립 시에도 그 취지에 찬동하여 자금을 헌납하여 향학鄕學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선현을 존모尊慕함에도 정성스러워 향내의 사림들과 함께 운곡정사雲谷精舍를 용수동에 지어 석차례釋茶禮와 유계儒契를 열어 유풍잔작儒風振作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아우 필원弼源을 동경東京 조도전대학早稻田大學에 유학시키는 등 형제간의 우애도 남달랐다. 유고遺稿가 전한다.
◦ 하정근河貞根 1889년高宗 26 - 1973년
공의 초휘初諱는 기식琪植이며, 자字는 중호重浩이고 호號는 묵재黙齋이다. 단지공 협悏의 11대손으로 만송공 치룡의 증손이고 월호공 계효啓涍의 네 아드님 중 계자季子이다. 어려서부터 재기가 영오穎悟하여 숙가塾家에서 통감절요通鑑節要 ‧ 사자서四子書 ‧ 시문경적詩文經籍을 수학하였다. 삼종숙 아단我丹 하계휘河啓輝로 부터 학문을 익혔는데 아단이 교우 윤주하의 문인이므로 공은 성재 허전과 한주 이진상의 학문을 이은 셈이다. 중재 김황과 교유가 두터워 중재가 사석에서는 공을 형으로 칭할 정도로 예우하였다고 한다. 단지공 이하 12대의 문집을 모아“지상세제록池上世濟錄”이라 이름하여 팔책八冊으로 편집 인쇄하여 집안에 분질頒帙하였으며, 이어서 선세先世의 교지敎旨 ‧ 예조입안禮曹立案 ‧ 향도유장鄕道儒狀 ‧ 분금기分衿記 ‧ 호적장戶籍狀 ‧ 갈만제문碣挽祭文 ‧ 지구서간知舊書簡 등의 문적을 모아 사책四冊으로 분류하여‘선적유편先蹟類編’이라 이름 하였는데, 훗날 명가名家의 고문서古文書『선비가의 학문과 지조』의 저본底本이 되었다. 여러 종원들의 뜻을 모아 선영先塋하에 있던 원모재遠慕齋를 단목으로 옮겨 제월정霽月亭이라 편액扁額하였으며, 장자 만관을 백씨 환식의 양자로 보내 단지가의 가통을 잇게 하였다. 문집文集으로『묵재집黙齋集』이 있다.
◦ 하정식河禎植 1912 - 1990
공의 자字는 향칠享七이고 호號는 근재謹齋이다. 단지공丹池公 협悏의 11대손으로 계안啓安의 아들이다. 어려서는 족숙 아단我丹 하계휘河啓輝에게 배웠고 성장 하여서는 처남妻男 심재心齋 김봉권金鳳權에게 사사師事하였다. 30대 중반에 한시漢詩 창작에 전념하면서 족형 묵재黙齋 정근貞根을 종유하여 도산서원과 퇴계종택 등 유림의 근원지를 심방하면서 선현들의 자취를 살피고 배워 자신의 안목을 넓혔다. 소당처사小塘處士 ‧ 사시헌四時軒 등의 묘갈墓碣을 세웠고 사시헌四時軒 문집文集을 간행하였다. 향내의 뜻이 맞는 사우士友들과 설악계雪嶽契를 창수創修하여 학문을 강마講磨하고 시문詩文을 창수唱酬하며 때로는 함께 어울려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유람하여 그 정기를 흡취하였다. 선조들의 산소에 석의石儀를 갖추었고 간행되지 않은 선조先祖의 유고遺稿를 간행하는 등 후손으로서 도리를 다하였다. 문집文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