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헌공파竹軒公派
17. 죽헌공파竹軒公派
  ◦ 하 성河惺 - 파조편 참조
 ◦ 하달원 河達遠 1603년宣祖 36 - 1641년仁祖 19
 공의 자字는 백원伯源이고, 영모정永慕亭 진보晉寶의 손자이며, 죽헌공 성惺과 중추부사 곽재록郭再錄의 따님이신 현풍곽씨 사이에 진주 단동에서 태어났다.   공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돈독하였으며 풍의風儀가 단아端雅하고 학업 또한 일찍부터 이루어졌다. 약관弱冠에 동계東溪 권공權公의 신주神主를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썼더니 원근遠近의 사림士林으로 칭선稱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전한다. 수의부위修義副尉를 지냈고, 배위는 봉직랑 이명의李明懿의 따님이신 성주 이씨이며 보潽 ․ 원沅 두 아드님을 두었다.
 
◦ 하달장河達長 1614년 光海 6 - 1645년 仁祖23
 공의 자字는 이원以遠이고, 영모정永慕亭 진보晉寶의 손자이며, 죽헌공 성惺과 중추부사 곽재록郭再錄의 따님이신 현풍곽씨 사이의 네 아드님 중 계자季子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효우孝友가 남달랐으며 천품天稟이 온화하고 자상하였다. 돈독하게 학문을 닦아 행의行誼가 함께 갖추어졌으며, 필법筆法 또한 졍묘精妙하였다. 1645년仁祖23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으나 불행히도 조세早世하여 뜻을 펼치지 못하였다. 감찰監察을 지낸 정렴鄭濂의 따님이신 진양정씨에게 장가들어 독자獨子 선교랑宣敎郞 속涑을 두었다.
◦  하 원 河沅 - 효자·열녀편 참조
◦ 하응천河應天 1689년肅宗 15 - 1746년英祖 22
 공의 자字는 여칙汝則이요, 호號는 자송당自訟堂이다. 죽헌공 성惺의 현손으로, 송파松波 원沅의 손자이며 사호沙湖 윤화潤華의 장자이다. 3세부터 글자를 배우고 8세에 대학을 깨우치기 시작하여 15세에 과거공부를 익혀 문사文詞가 해박하고 필법이 굳건했으니 일찍이 세 번이나 향시에 입격하였다. 20세에 회시會試에 응시했는데 과장에 들어가는 날 갑자기 몸이 불편하여 붓을 잡을 수 없게 되자 곁에 있던 친구가 걱정하면서 대필代筆하기를 청하니 공이 정색하여 말하기를「과거는 장차 임금을 섬기려는 것인데 임금을 섬기고자 하면서 자기 마음을 먼저 속이는 것이 어찌 옳겠는가, 자기를 굽히고 남을 따르는 것은 내가 취할 바가 아니다.」하고는 집으로 돌아와 다시는 세상에 뜻을 두지 않았다.  이후 날마다 강학講學만을 일삼아  심경心經 ․ 근사록近思錄 등의 성리학의 서책에 전심하면서 제산霽山 김성택金聖鐸 ․ 내수耐叟 허추許錘 등과 더불어 도의교의 친분을 맺어 정밀한 부분까지 강마講磨하였고, 경전經傳중에서 일용에 절실한 것은 그 중요한 말을 모두 초록抄錄하여 좌우에 붙여놓고 날마다 바라보면서 성찰하였으며, 성수星數와 의복醫卜에 관한 서책에도 통달하였다. 진주 목사 윤노동이 유일儒逸을 천거하면서 공을 맨 먼저 올려 영營에 보고하여 이르기를「진주 북쪽에 하河선비가 있으니 밝은 창문 조용한 책상 앞에서 종일토록 즐기는 바는 주서朱書뿐입니다.」라고 하였다. 향리에서 붕우朋友를 대할 적에는 성의誠意를 다하였고, 인정이 두터워 가진 것을 모두 베풀고 창고를 비웠으니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였다.
◦ 하계범河啓範 1784년正祖 8 - 1846년憲宗 12
 공의 자字는 낙경洛卿이요 호號는 만취晩翠이다. 죽헌공 성惺의 7대손으로, 송파松坡 원沅의 5대손이고 통덕랑 응윤應崙의 증손이며 만와晩窩 진악鎭岳의 아들이다. 공은 품성稟性이 관화寬和하고 총명聰明하면서 문예文藝가 남보다 뛰어났다. 그러면서도 구수求讐할 뜻이 없고 항상 만절晩節로써 스스로 가다듬어 인하여 만취晩翠를 호號로 삼았다. 사우士友들과 자적自適하였고 강마講磨하는 자들이 심히 많았으니 허락하지 아니하는 이가 없었고 몸소 군자君子로써 행하였다. 일찍이 속주지續州誌에 참여했으나 탈고脫稿에 마치지 못하였다. 선고先考의 문집『만와유고晩窩遺稿』와 공의 문집『만취유고晩翠遺稿』가 함께 전한다.
 
◦ 하경휴河慶烋 1841년 憲宗 7 - 1900년 광무 4
 공의 자字는 낙도洛圖이요 호號는 해산海山이다. 죽헌공 성惺의 8대손으로, 자송당 응천應天의 현손이며 통덕랑 진채鎭采의 손자이고 여범驪範의 아들이다.    공은 성품이 침착하고 재지才智가 명민하여 글을 배울 때부터 터득하지 못하면 그만두지 않았으니 중년重年에는 문장이 능숙해 숙유宿儒들이 경탄하였다. 과거 공부를 하면서 뛰어난 명성名聲이 있었으나 선발이 공정하지 못하자 포기하고는 서울에서 성재 허전에게 제자의 예를 올렸다. 이때 비로소 군자君子의 위기지학爲己之學을 듣고 말하기를「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거의 일생을 헛되이 보낼 번 하였다.」고 하였다. 돌아와서 ‘용사잠容思箴’을 지어 말하기를,「구사九思는 경敬이 마음 안에서 주主가 되고, 구용九容은 경敬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군자君子가 경敬하지 않으면 어찌 학문을 하겠는가?」하였다. 또 ‘심성心性’ ‘이기理氣’ ‘선악善惡’을 명변明辯함에 주자서朱子書를 매우 좋아하더니 손수 정선精選한 내용을 잠을 자거나 식사할 때도 놓지 않았다.. 공은 효성이 천출天出하여 어려서 모친상을 당해서는 슬픔으로 몸을 훼손함이 성인成人과 같았고, 친상을 당한 후 하루에 한번 성묘하기를 비바람이 불어도 폐함이 없었으며, 선조先祖를 받드는 일에 독실하여 제사에는 생전 모습을 뵙듯이 제계齊戒하였다. 해산유집海山遺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