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주공파滄洲公派
18. 창주공파滄洲公派
   ◦ 하 증河憕 - 파조편 참조
 ◦ 하명河洺 1630년 仁祖 8 - 1677년 肅宗 3
 자字는 차해次海요, 창주滄洲공 증憕의 손자며 달도達道의 아들이다.
 천성이 효우하여 1638년 아홉 살 때 부친을 여의었는데, 애통해하는 모습이 주변 사람들을 감동시켰고, 모친이 뒤따르려하자 지극한 정성으로 모친의 마음을 돌리고 봉양하기를 남달리 하였다.
 1660년顯宗 원년에 생원生員시에 합격하였으나 과거를 그만두고 자신을 수양하는 학문에 힘썼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과 동춘당 송준길同春堂宋浚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천자天姿가 수려하여 우암,동춘 두 선생은 공을 늘 선계仙界의 학鶴이라 일컫기도 했다.
 1670년경 공公은 유생 최백년崔栢年의 모함으로 한때 억울한 누명을 쓴 적도 있었으나 우암尤庵, 동춘당同春堂 두 선생의 도움으로 벗어날 수 있었다. 이후 공은 우암尤庵, 동춘당同春堂은 물론 자신의 구명에 힘쓴 송규렴宋奎濂, 송규정宋奎禎, 이상일李尙逸, 이채李埰 등 노론 학파의 인사들과 교유를 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남명南冥 선생의 문집 편차가 잘못된 부분이 있고 인홍仁弘이 스스로 붙인 내용이 많아 안타깝게 여겨 진사進士 최경 등과 상의해 우암尤庵 선생에게 상의해 고쳤다. 만년에는 산수가 좋은 곳에 초당을 짓고 자연과 더불어 유유자적하게 살다가 세상을 떠나니 향년 58세였고 실기實記가 간행되었다.
  ◦ 하응운河應運 1676년 肅宗 2 - 1736년 英祖 24
 초명初名은 응룡應龍이요 자字는 여등汝登이며 호號는 습정재習靜齋이니, 진사進士 증憕의 현손이고 윤우潤宇의 아들이다.
 성품이 강직하였으며 시비에 더욱 분명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뜻이 흔들리거나 빼앗기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강우지역의 사림은 남인과 노론으로 대립하여 송시열과 송준길의 문묘종사소에 가담한 사람을 처단해야 한다는 방이 나붙기도 하는 등 사태가 심상치 않았지만, 공은 여기에 개의치 않고 그의 아들에게 명하여, ‘두 선생은 동방의 대현大賢으로 우리 가문의 은혜로운 분이니 정성을 다하라.’ 라고 하며 양현문묘종사소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게 하였다. 임종에 유언하기를, 선조를 받드는 것은 「家禮」로써 하고, 제가齊家는 「小學」으로 하라. 또한 화복禍福은 자기가 구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오직 경계하고 삼가고 두려워하여, 술가術家의 허랑한 말에 마음이 흔들리지 말라. 고 하였다.
 겨우 열다섯 살에 문예가 이미 성숙하였으며 세상을 향한 포부를 갖고 세 번이나 향시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신축년과 임인년에 걸쳐 일어났던 신임옥사辛壬獄事에서 서로 다투는 당시 선비들의 습속習俗을 목격하고 다시는 과거에 응하지 않고 일생을 처사處士로 살 결심을 하였으며, 장서 수천 권을 갖고 두문불출 공부에 침잠沈潛하면서 사물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 일찍이 ‘靜字공부는 주선생周敦頤으로부터 시작하여 정문程門에서 사람을 가르칠 때 제일로 하였다. 오직 정양靜養하고난 뒤에 행동해야 제대로 성취할 수가 있는 것이다.’ 라고 하면서 호를 습정習靜이라 하였다.
 공은 당대에 대한 위기의식에 입각하여 산림으로 물러나, 주정적主靜的 세계관을 정비하여 안으로는 통명通明을, 밖으로는 공부公溥를 획득하고자 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문학창작을 하였다. 대책문을 잘 짓기로 이름난 손명래孫命來가 공의 글을 보고 ‘이 사람의 글이 또한 이와 같은가! 안중에 짝할 자가 없겠구나.’라고 하면서 망년지교忘年之交를 맺고 공의 글을 고문古文에 가깝다고 평했으며, 공과 40년 지기知己인 동야東野 정상호鄭相虎는 ‘공의 문장은 세속에서 벗어나 깨끗하고, 기이하고 웅장한 품격을 지녔으며, 고문에 매우 가까워 문원文苑의 사종詞宗이라 해도 될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공은 문예 창작을 달갑게 여기지 않아 분량 면에서 풍부하지 못하다. 저서로 습정재집이 있다.
  
  ◦하진태河鎭兌 - 정려편 참조
  ◦ 하익범河益範 1767년 英祖 43 - 1813년 純祖 13
 자字는 숙중叔中이요, 호號는 사농와士農窩이다. 문행과 지절이 높았던 습정재習亭齋 응운應運의 증손曾孫이고, 우암과 동춘당의 문묘종사를 청하는 소를 올렸던 재악의 손자요 효행으로 정려를 받은 행정杏亭 진태鎭兌의 아들이다.
 성품이 강의剛毅하고 온후溫厚하였으며 지기志氣가 있어 어려서부터 식자識者들이 원대한 뜻을 가진 학자가 될 것을 기대했다.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에게 사사師事 했으며 경호鏡湖 이의조李宜朝에게 예학禮學을 배워 이공李公이 가례증해家禮增解를 편찬할 때 일조一助할 만큼 예학에 밝았다. 1800년 과거 응시차 한양에 갔다가 거자擧子들이 분주히 돌아다니는 것을 보고는 입신양명하는 길보다는 학문과 지조를 가진 사대부로 가세家勢를 유지하는 것이 더욱 중요함을 자각하고 과거를 폐한 뒤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전념하였다. 저서로 담상문답潭上問答 과 대학강의大學講義 및 문집文集이 있다 
  ◦ 하진달河鎭達 1778년 正祖 2 - 1835년 獻宗 1
자字는 영서英瑞이요, 호號는 역헌櫟軒이다. 생원공生員公 명洺의 현손이고 생부生父는 수호壽浩이요, 해호海浩의 아들이다. 기국器局이 엄정嚴正하고 천성天性이 효우하며 경전經典에 힘을 쏟았고 예서禮書에 정통하였다. 후진을 가르치고 선세先世의 유문遺文을 모아 추모록追慕錄 4권을 엮었고, 임천서원이 퇴락하여 각 문중과 더불어 중건하고 강당과 문루까지 완비하였다. 문충공 문집이 병화 뒤에 보존되지 못해 공이 극력 수집하여 호정집을 엮었고, 문충공이 찬한 촉석루, 봉명관 기판記板을 잃어 공이 모두 중간重刊하여 걸었으며, 오방재 검암서숙黔巖書塾이 거의 무너지게 되니 제종諸宗과 중건하여 후생들의 수업受業 장소로 삼았다. 저서는 문집文集이 있다.
 
 ◦ 하극범河極範 1812년 純祖 12 - 1876년 高宗 13
자字는 시건時建이요, 호號는 일암逸菴이다. 생원공 명洺의 후손이고 진달鎭達의 아들이다. 저서는 시고詩稿가 있다.
  ◦ 하석원河錫源 1825년 純祖 25 - 1858년 哲宗 9
자字는 우규禹圭이요, 생부生父는 경한慶漢이며 진백鎭伯의 중손이고, 치용致龍의 아들이다. 어릴 때부터 스스로 글 읽을 줄을 알아서 학문에 전념하였고 고헌顧軒 정내석鄭來錫을 지알贄謁하고 수양하는 학문에 전념하였다. 후산 허유后山許愈 면우 곽종석俛宇郭鍾錫 교우 윤주하膠宇尹冑夏와 교유 하면서 명리名理를 강론하였다. 저서는 문집文集이 있다. 
  ◦ 하계룡河啓龍 1851년 哲宗 2 - 1932
 字는 치견致見이요, 號는 단파丹坡이니 진사進士 증憕의 10세손이고 진태鎭兌의 현손이요 복원復源의 아들이다. 공은 조상을 경모하는 마음이 남달랐을 뿐만 아니라 조상을 기리는 사업에 열과 성을 다하였다. 특히 창주滄洲와 습정재習靜齋에 대한 자부自負와 존모尊慕는 유달리 커서, 사람들이 창정滄靜의 통서統緖를 이었다고 하였다.
 공은 큰 벼슬과 공적이 없어 문벌을 빛내거나 세상에 공명을 크게 날리지 않았지만, 공公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그가 평범한 향사鄕士가 아니라고 하였다. 공의 학문적 바탕은 효성과 우애의 실천에 있었고, 친인척에게 높이 평가를 받았을 뿐 아니라,당시 사림의 중망을 받았다. 지역의 선비들 사이에서 명망이 있었음은 공이 진양지晉陽誌의 서문을 쓴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고, 공이 하세했을 때에 만사를 지은 사람이 50명에 이르고 이들이 지은 만사가 70여수에 이른 사실을 통해서도 확인 할 수 있다. 저서로 단파유집丹坡遺集이 있다.
  ◦ 하우식河祐植 1875 - 1943
 자字는 성락聖洛이요, 호號는 담산澹山이니, 창주 하증河憕의 후손이고 계룡啓龍의 아들이다. 담산은 송병선, 최익현, 등 당시 기호학계의 거장들과 사우관계를 형성하였는데, 특히 송병화宋炳華. 송병기宋秉夔. 송교순宋敎淳 등 이른바 양송兩宋 후손들과도 교유하며 하명河洺이래의 세의를 유지해나갔다.
 담산의 학문 연원은 남명학과 율곡학을 함께 계승한 데 있다. 21세부터 27세까지 대포촌大浦村에서 강학講學에 종사한 적이 있는데, 그때 거처하던 집의 동쪽방에는 ‘경재敬齋’ 서쪽방에는 의재義齋라고 명명할 정도로 남명사상의 정수인 ‘경의敬義’를 적극 수용하였으며, 30대에 들면서 간재艮齋 전우田愚를 스승으로 삼아 율곡학을 이었으니, 『사계신독재전서沙溪慎獨全書』『송자대전宋子大全』.『동춘당집同春堂集』『면암집勉菴集』『간재집艮齋集』등의 간행에도 적극 참여했다.
 역사적 격변기를 겪어야 했던 담산은 일제에 적극적으로 항거하는 대신, 선왕에 대한 충성을 변치 않는 ‘정헌靖獻’의 자세를 견지하고, 연원이 닿은 선현들의 문집 간행과 집안의 유문遺文 간행을 통하여 도덕성을 회복시키는 세교世敎에 힘씀으로써 항일정신을 고취시키고자 하였다.
 1895년 부친으로부터 선조 유문遺文을 수습 정리하라는 명을 받은 담산은 40여 년 동안 주야로 심혈을 기울여  『창주집滄洲集』, 『생원공유문生員公遺文』, 『습정재유고習靜齋遺稿』, 『행정유고杏亭遺稿』, 『사옹와유고士農窩遺稿』등을 간행하였다. 담산집澹山集 4책이 있다.
  ◦하순봉河恂鳳 1901-1970
 자字는 기언岐彦이요, 호號는 해성海醒이니, 창주 하증河憕의 후손이며 우식祐植의 아들이다. 아버지 담산澹山이 세상을 떠 난지 16년이 지난 1959년에 문집을 간행하였다. 담산이 세상을 떠난 지 2년 뒤 일제로부터 광복이 되었고, 남북한 정부수립의 혼란과 6.25라는 민족상잔의 비극을 거친 뒤 정국이 다소 안정된 시기에 간행 되었다. 또한 가장家狀을 수록하여 남김으로 일대의 생애를 요연하게 파악 할 수 있게 하였고, 충분한 학식을 바탕으로 사림의 중망을 입게 되면서 창주가의 대표성도 더욱 높이게 되었다.
◦ 하태범河泰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