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암공파陽菴公派
19. 양암공파陽菴公派
   ◦ 하 활河活 - 파조편 참조
 ◦ 하맹보河孟寶 - 정려편 참조
  ◦ 하중보河仲寶
    1535 中宗 30 - 1586 宣祖 19
자字는 時哉요, 호號는 竹齋이니 안주목사 우치禹治의 손자요 증 공조참의贈工曹參議 활活의 둘째아들이다.
자질이 영오穎悟하여 어린 시절부터 성품이 엄정하고 행동에 법도가 있었고 일찍이 이해로써 그의 마음에 누가 되지 않게 하였고 성리학에만 전심하면서 후학들을 훈진 하는 것으로써 임무로 삼았다. 가선대부 공조참판에 추증되었다
  ◦ 하계보河季寶
자字는 위재偉哉요, 안주목사 우치禹治의 손자이고 증 공조참의 활活의 계자季子이다. 어려서 총명하고 지혜로웠으며 문사가 뛰어나며 행의가 순박하고 독실하였다. 벼슬은 가선대부 공조참판에 추증되었다.
  ◦ 하제河悌
 자字는 자순子順이요, 호號는 정묵재靜黙齋이니 증공조참의 할活의 손자이고 공신功臣 맹보孟寶의 아들이다. 젊어서 시문에 재능이 있었고 또 유학을 지킴에 있어 정성을 다하였다. 임진왜란에 아버지의 명을 받고 호종扈從한 공으로 공신록권功臣錄卷을 받았으며 중훈대부 군자감정中訓大夫軍資監正을 제수 받았다.
  ◦ 하황河愰 1565년 明宗 20 - 1625년 光海 13
자字는 자명子明이요 호號는 관한당寬閒堂이니 증 공조참의 활活의 손자이고 가선대부 공조참판에 추증된 중보仲寶의 아들이다. 성행性行이 엄정嚴整하고 평생토록 사문斯文을 흥기興起시키는 것을 자기임무로 삼았다 임진왜란 때 창의倡義하여 초유사招諭使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의 추천으로 군자감정을 제수 받고 사복시 판사司僕寺判事를 지내다.
   ◦ 하선河㦏 
자字 자열子悅이요, 증 공조참의 활活의 손자이고  증 가선대부 공조참판 계보季寶의 아들이다. 자품資稟이 영오穎悟하고 문사文詞가 뛰어났으며 품성이 청렴결백하여 백성을 구휼救恤하고 밖에서는 사사로운 경영이 없었다. 임진왜란에 아버지의 명으로 호성扈聖 한 공으로 공신녹권을 받았고 임진란에 창의하여 학봉 김성일의 추천으로 군자감정에 제수되고 사복시 판사에 올랐다. 이어 절충장군折衝將軍을 역임하고 동지중추부사를 지내다.
  ◦ 하세원河世元 1639년 仁祖 17 - ?
자字는 인중仁中이요, 호號는 운암雲菴이니  양암공 활活의 5대 손이고 기頎의 아들이다. 사람됨이 청고淸高하고 단아端雅하며 일생에 빈곤하여도 비루鄙陋하고 배리背理한 일을 하지 않고 효로써 어버이를 섬기고 공정한 행실로 군자에 부끄럽지 아니했다. 숙종 1년 1675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1678 숙종 4에 문과文科에 장원壯元 급제하여 헌납獻納을 지내고 봉렬대부奉列大夫 결성 현감結成縣監을 지냈다.
  ◦ 하석우河錫禹 1865년 高宗 2 - 1930년
 자字는 순거舜擧요, 호號는 경매이니 증공조참의 활活의 후손이고 장천章川의 아들이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계배繼配 슬하에서 어린 형제들을 행상으로 양육하면서 자랐다. 어릴 때부터 근체시近體詩에 능하였다. 함양 상림의 초선정憔仙亭 일명 19인정은 유림의 무대로 고종 때 영남학파의 맥을 이어온 선현들의 정신을 기리며 학문을 강론하고 창수唱酬를 즐기며 세정을 비판하고 토론했던 곳이다. 여기에 아직도 순거舜擧의 시詩 경매庚梅가 편액扁額에 전해오고 있다.
  ◦ 하한윤河漢潤 1713년 肅宗 39 - 1783년 正祖 8
자字는 택사澤獅이요. 공조참의 활活의 후손이고 운용雲龍의 아들이다. 자질이 순수하고 재주가 뛰어나며 학문이 깊고 행실이 깨끗하였다. 천성이 돈독하고 재기가 남보다 뛰어나 문장이 넉넉하였다. 벼슬은 증손 석문錫文이 귀貴하게 되어 통훈대부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다.
  ◦ 하횡河鋐 1681년 肅宗 7 - 1764년 英祖 40
字는 성언聲彦이요, 증 공조참의 활活의 후손이고 세관世觀의 아들이다. 절충장군折衝將軍 첨지중추부사僉知中秋府事를 역임하고 영조 무신년 1728에 양란兩亂에 창의倡義하여 문중 5인과 모병토적募兵討賊 한 일이 실기에 실려 있고 유장儒狀
이 있다.
  ◦ 하성원河聖源 1747년 英祖 23 - 1814년 純祖 14
자字는 군원君源이요, 증 공조참의 활活의 후손이고 통훈대부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추증된 한윤漢潤의 이자二子이다. 성격이 온수하고 재기가 탁월 하였으며 뜻을 돈독히 하고 힘써 배워서 일찍부터 문명이 있었다. 손자 석문錫文의 고훈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 하채용河彩龍 1718년 肅宗 44 - 1797년 正宗 21
자字는 문서文瑞이요, 공조참의 활活의 후손이고 당鎲의 아들이며. 생부生父는 금崟이다. 옛것을 좋아하고 학문을 즐기며 윤상倫常에 힘쓰고 의義를 소중히 여겼다. 벼슬이 통정대부 절충장군折衝將軍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에 올랐다.
  ◦ 하석문河錫文 1806년 純祖 6 -  1890년 高宗 27
자字는 이수而受이요, 공조참의 활活의 후손이고 통훈대부 사헌부 감찰에 추증되고 효행으로 정려를 하사받은 필명必明의 아들이다. 벼슬은 1870년 高宗 7에 진사進士시에 합격하고 수자壽資로 통정대부 첨지중추가 되었다가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에 올랐다.
  ◦ 하기현河琪鉉 1881년 高宗 18 - 1968
자字는 송운宋運이요, 호號는 춘계春溪이니 증 공조참의 활活의 후손이고 재일在日의 아들이다. 유학자儒學者로서 자품資稟이 총명하고 경사經史에 능하였으며 조행操行이 정중하고 시부詩賦에 능숙하여 사백詞伯들로부터 추앙을 받았고 후진 양성에도 심혈을 쏟았으며 행의行誼가 세상에 추중하니 사표로 칭송을 받았다. 저서는 문집이 있다
  ◦ 하원순河元淳 1858년 哲宗 9 - 1864년 高宗元年
자字는 치경致敬이요, 호는 청봉晴峰이니 양암공 활活의 12세손이고 석간錫榦의 아들이다. 조행操行이 청고淸高하여 약관弱冠 때 남원에서 우거寓居하면서 후학을 가르쳐 지방의 사표師表가 되있다. 저서로는 문집이 있다
  ◦ 하병순河炳淳 1852년 哲宗 3 - 1884년 高宗 21
자字는 성길聖吉이요, 호號는 위서渭西이니 양암공 활活의 12대손이고 석영錫永의 아들이다. 어버이를 섬김에 효성스러웠고 가정을 다스림에 법도가 있었다. 독서에 대의를 통달하고 재기가 남달랐다. 벼슬은 행지계위문위원行地界衛門委員에 오르고 통정대부를 지냈다.
  ◦ 하정식河定植
자字는 경원慶元이요, 증 공조참의 활活의 후손이고 재원在源의 아들이다. 뜻을 돈독히 하고 힘써 배우고 거동이 아름답고 선인을 빛내니 일시에 명덕으로 추중하는 이가 많았다. 행의로 향당에 칭송을 받았다.
1913년에 행내부주시승行內部主事陞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지내다.
  ◦ 하재섭河在涉
자字는 순필舜弼이요, 증 공조참의 활活의 후손이고 석해錫海의 아들이다. 천성이 온후하고 가정의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품성이 청명하고 학문을 연구 실천하였다. 1901년에 참봉參奉이 되고 1904년에 통정대부 비서감승秘書監丞에 올랐다.
   ◦ 하재구河在九 1832년순조 32 - 1911년.
 조선 말기 문신. 자는 치백致伯이고, 호는 위수渭叟이다. 고조부는 증 사복시정贈司僕寺正 하한윤河漢潤, 증조부는 증 승정원좌승지 겸 경연관참찬관贈承政院左承旨兼經筵官參贊官 하성원河聖源, 조부는 증 호조참판 동지의금부사贈戶曹參判同知義禁府事 하필명河必明, 아버지는 노직老職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오른 진사進士 하석문河錫文이다. 외조부는 동래東萊 정효맹鄭孝孟이며, 처부는 정선전씨旌善全氏이다. 공은 12, 3세 때 이미 사서오경四書五經을 독파하고 그 외 과거 공부에 필요한 잡문을 익혔다. 그는 약관의 나이에 서울로 올라가 문정공(文貞公) 김세균(金世均: 1812∼1879)을 만났다. 1861년철종 12 신유辛酉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2등二等 10위로 합격하였다. 같은 해 대구백大邱伯 김명진金明鎭의 천거로 효력부위效力副尉가 되었으며, 친군영군사마親軍營軍司馬를 거쳐 통훈대부通訓大夫 용양위부사과龍驤衛副司果로 승직하였다. 김명진은 중앙직으로 들어오면서 하재구를 크게 등용하려고 하였으나, 돌아오는 도중 김명진은 사망하고, 하재구 또한 부친상을 당하여 성사되지 않았다. 이후 고종이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에 제수除授하고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