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의공파參議公派
21. 참의공파參議公派
   ◦ 하경리河敬履 - 파조편 참조
 ◦ 하 충河漴
 공은 병판공 휘諱 거원의 현손이고 참판공 휘諱 을부의 증손이며 판서공 휘諱 승해承海의 손자로 참의공 휘諱 경리敬履의 아드님이다. 양정공 하경복 장군이 공의 백부이니 강장공 한漢은 공의 종형從兄이다.
 공은 무반가의 후예로서 일찍부터 무예를 익혔으며 강장공이 명당 월횡에 학문의 터를 잡은 후 그곳에서 맹보, 중보, 숙보, 계보 등 당질堂姪들과 함께 월봉산을 오르내리며 문무의 도를 닦았다. 학문이 일취월장하여 일찍 진사과에 입격한 후 성균관에서 수학하였고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비안현감 등 여려 수령직을 거친 후 경직京職으로 들어가 중훈대부 행行 사헌부지평을 지냈다.
 공은 무반가의 혈통을 이었기에 문관이지만 무예에 능하여 백부님 양정공 처럼 활을 특별히 잘 쏘았다. 세조실록 4년 4월 조條에,「임금이 문신으로서 활을 잘 쏘는 자를 부르니 군기판사 이효장, 이조정랑 장효문 등이 들어와 활을 쏘았다. 이때 홍윤성이 아뢰기를 “전前 비안현감 하충河漴이 활을 잘 쏩니다” 하니 임금이 정원政院으로 하여금 치서馳書하여 하충河漴을 부르게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공은 백달伯達․ 숙달叔達․ 계달季達 세 아드님과 두 따님을 두었다. 장자長子 백달은 통훈대부 행行 단성현감을 지내고 두 따님만 두었다. 막내 아드님 계달은 준濬․  홍洪․ 심深․ 징澄․ 흡洽 등 5형제를 두었는데 그중 홍洪․  심深․  흡洽 등이 생원시에 입격하였으며 심深의 후손들이 참의공파 문중의 대代를 이어오고 있다. 공의 장녀는 전주인 참군 이맹명에게 시집가 생원 하우석(목사공의 兄)을 사위로 맞았고, 차녀는 창녕인 성안중에게 시집갔으니 부사 성여신이 공의 외外 후손後孫이다.
 
 ◦ 하백달河伯達
 공의 증조는 판서공 승해承海이며, 조부는 참의공 경리敬履이고 부친은 사헌부 지평 충漴이다. 공은 태어나면서 용모가 순수하였으며 자라면서 우람하고 무게가 있어 성인과 같았다. 행의行誼로 천거되어 사헌부 감찰을 지낸 후 단성현감 등 여려 수령직을 거쳐 통훈대부로 증직되었다. 배위配位 숙인 파평윤씨는 좌윤 자慈의 따님이고 사헌부 사간 정미貞彌의 손녀로, 아들을 낳지 못하고 두 따님만 두었다.
 큰 따님은 전의이씨 도총제 이승간(호정 하륜의 사위)의 증손曾孫인 이창윤李昌胤에게 시집갔다. 이창윤은 문과에 급제한 후 문과중시를 거쳤으며, 연산조 때 사간원 정언으로 사초사건에 연루되어 용천에 유배되었다가 얼마 후 서용되어 봉상 직장을 거쳐 연산 10년 사헌부 장령이 되었다. 이창윤의 아들 공보公輔는 현감이 되었다. 이창윤의 종손從孫 신암 이준민이 현달하여 문충공 호정 선생의 외손으로 오방재를 창건하였으며 신암의 큰사위가 대소헌 조종도이다.
 둘째 따님은 함안인 남계처사 조수만趙壽萬에게 시집가 26세에 세상을 떠나니 다음해에 남계도 23세로 조세하였다. 우참찬 이미李薇가 찬撰한 남계처사의 묘갈에, 「공의 부인은 하河씨로 진주에서 이름난 집안이다. 부친 백달伯達은 사헌부 감찰로서 고려 평장사 공진의 후손이다. 부인은 성품이 효순하고 부공婦工에 민첩하였으며 베짜고 바느질하는 솜씨가 정교하여 마치 사람의 손에서 나온 것이 아닌듯했다. 경술(1490)년 8월에 산후병을 얻어 다음달 22일에 조세早歲하니 26세였다. 부모가 그 자부子婦의 죽음을 슬퍼하고 함안군 방어산 기슭에 합장하였다.」라고 되어있다. 남계의 아들 하구정下鷗亭 조응경趙應卿은 감찰을 지냈으며 자신이 강보에 쌓인 젖먹이로 양친을 여위고 성장하여서 부모 얼굴을 알지 못함을 지극히 애통해하다가 친척에게 물어 부모의 형상을 그린 화상을 봉안하고 제사 때는 반드시 펴서 모시니 관포 어득강魚得江이 하구정下鷗亭의 효심에 감복하여 ‛영당影堂’이란 시를 짓고 ‛南溪處士晉山河氏畵像贊’이란 글을 남겼다. 남계의 손자는 참봉 언堰이며, 증손은 대소헌 조종도趙宗道이다. 대소헌은 함양군수를 지낸 후 왜란 때 초유사 김성일을 도와 큰 공을 세우더니, 1597년 정유재란 때  일가족을 이끌고 안음安義의 황석산성에 들어가 왜장 가토기요마시加藤淸正의 대군과 싸우다 일가족과 함께 몰사하였다. 대소헌의 장손 조징송은 송정공 하수일의 따님 금아와 혼인하여 송정공을 따라 다녔으므로 살아남았으나 그해 12월에 송정을 모시고 선산으로 피난을 갔다가 심병을 얻어 요절하였으며, 대소헌의 차손 조징성은 단지공 하협의 사위로 황석산성에서 대소헌과 함께 전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