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인(士人) 하상현(河尙顯)의 처로 군수 운수당 윤(潤)의 후예(後裔)이다. 1790년 정조14년에 생(生)하여 1824년 순조24년에 졸(卒)하였다. 아버지는 통덕랑 강 복(姜福)이며, 감사(監司) 윤(潤)의 손녀요, 증이조참판 이일(履一)의 증손이다. 부덕(婦德)이 있어 시부모를 정성껏 받들었으며, 간언(間言)하는 사람이 없었다. 1822년 순조22년에 지아비 상현(尙顯)의 상(喪)을 당하여 염습(殮襲)하고 전(奠) 올리는 것을 친히 행하여 유감(遺憾)이 없었고, 슬퍼하여 마음을 상(傷)하는 것이 법도에 지나쳤다. 남편의 종상일(終喪日)에 평소와 같이 시부모를 봉양하고 가사(家事)를 돌본 후에 방에 들어가 자결(自決)하였다. 이런 열행烈行으로 주지州誌에 실려 있다.
하열부(河烈婦) 분성 김씨(盆城金氏) 여표비(閭表碑) 열부(烈婦) 김씨(金氏)는 분성인(盆城人) 연갑(延甲)의 따님이다. 시집와서 진양(晉陽) 하공(河公) 용관(龍寬)의 계배(繼配)가 되었다. 영종(英宗) 임자(壬子)1732년 봄에, 용관이 연갑이 먼 길을 떠나야 했기 때문에, 와서 뵙고 이틀을 묵었는데 염병에 걸려서 죽었다.
열부(烈婦)는 혼인한 지 몇 달 되지 않아, 아직 시집에 가지 않았을 때였다. 급히 약물(藥物)을 만들어 용관을 구제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크게 통곡하여 숨이 넘어가다가 깨어난 것이 여러 번이었다.
얼마 뒤, 갑자기 일어나 여러 장례(葬禮) 용품을 챙기고 마련하였다. 그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죽은 남편에게는 다행히 전처(前妻)의 자식들이 있어 내 몸을 의탁할 만하니, 어머니는 나를 측은하게 여기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용관의 상여가 발인(發軔)하자, 또 이르기를 \"제가 상여를 따가서 가면, 다시 돌아오는 것을 기약할 수 없습니다. 평소 시집에 보내려던 예물을 싣고서 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고는 떠날 채비를 하려고 방에 들어갔다. 그 어머니가 방문을 열었을 때, 양잿물을 두 입술 가득 머금고 죽어있는 것이 보였다. 이에 용관의 집안사람들이 열부의 시신을 수습하여 용관의 상여에 함께 운구하여 선산(先山) 아래에 장사(葬事)하였다.
처음에 열부가 부모를 섬김에 효도를 다하여 소문이 났고, 그 효도하는 도리를 옮겨서 남편을 섬겼으니, 곧
\'정(貞)\'이 되고 \'열(烈)
\'이 되었다. 그러나 \'열(烈)
\'은 타오르는 불길처럼 맹렬한 것이니, 그 보편적인 것은 항상 불행을 당했을 때 감정이 격발하여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열(烈)
\' 중에서 뛰어난 것은 두텁고 느긋함에 있기 마련인데, 열부는 이것을 이루었다. 어찌 참되고 슬기롭지 않겠는가?
순조(純祖) 정축(丁丑)1817년에 수의사(繡衣使) 이화(李墷)가 상주(上奏)하여, 사천(泗川) 건점리(乾占里)에 정표(旌表)하고 마을 어귀에 각(閣)을 세우도록 하였다. 정려각(旌閭閣)을 세운지 지금 200여 년이 지났으니 각(閣)이 헐어 무너졌다. 후손 치권(致權) 등이 빗돌에 새겨 대신 세우기로 의논하고, 나를 찾아와서 글을 청하였다. 내가 삼가 정려각 안에 있는 옛 기록을 살펴보고 탄식하며, 옛것 그대로 살려 글을 지었으니, 대개 또한 노팽(老彭)이 사실을 기술(記述)할 뿐 더 보태어 지어내지 않는다는 뜻이다. 명(銘)을 다음과 같이 지었다.
순수하고 강건한 기운이,
온 천지에 가득 차서,
아! 천백 년에,
떳떳한 도리를 보였네.
거룩하신 김씨(金氏),
그의 죽음 오래 묻혔었네.
효(孝)로 말한다면,
부모를 잘 섬겼고,
절(節)로 말한다면,
지금 남편 따라 순사(殉死)했네.
삶을 버리고 죽음을 택했으니,
그 광영(光榮) 빛나고 빛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