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손씨
 
 
하부 밀양손부인 효행비문(河婦密陽孫夫人孝行碑文)
 
광복삼년 정해(丁亥) 여름 인보(寅普)가 하회봉(河晦峯)선생 영전(靈前)에 곡(哭)하고 비로 인해 사곡의 하씨 선재(先齋)에 머물렀는데 하루 밤엔 말이 옛 효부(孝婦)에 미치자 하군(河君) 영기(永箕)가 문득 사모하여 슬퍼하니 군(君)은 곧 회봉(晦峯)의 재종질(再從姪)이다. 그 안색(顔色)이 몹시 애처로움으로 옆에 물으니 말하기를 군(君)이 왕년(往年)에 작고한 모부인의 효행을 생각하여 슬퍼한다하므로 내 다시 모부인의 행실을 물으니 군이 정색(政色)하고 이르기를 오모(吾母) 손부인(孫孺人)은 밀양인으로 세칭(世稱) 팔용(八龍)의 계(季) 생원공(生員公) 시(時)의 예(裔)요 사인(士人) 경란(慶蘭)의 여女로 유년부터 정숙하여 십육(十六)에 출가하여서는 부자(夫子)를 정성껏 섬김은 물론 양가(兩家)의 구고봉양(舅姑奉養)에 더욱 독실(篤實)하여 사친(四親) 심허(心許)하였고 동서간에 화목하여 일가가 열복(悅服)하였으며 길쌈과 바느질 음식마련에 이르도록 손가는 곳마다 모두 정교(精巧)하였건만 재능을 자처하지 않았고 이십 육세시에 사모(媤母) 해주정씨(海州鄭氏)가 오십 구세로 문득 실명하자 백방으로 힘썼으나 무효하므로 가사를 자부에게 위임하였다. 시모媤母)의 본심을 익히 아는지라 비록 소사나 자상하게 고하고 못하면 직접 보는 것과 다름없이 보살폈다. 일찌기 말하기를 시모가 나를 믿고 사물을 접하는데 내가 숨기면 어찌 사물을 분변하겠는가하였다. 여름이면 시모를 엎고 전원(田園)을 거닐면서 과일과 소채(蔬菜)를 하나하나 짚여 보이며 인륜을 즐겼다. 이와 같이 십년을 하루같이 지내다가 시모가 별세 하니 상례(喪禮)와 제의(祭儀)에 후회(後悔)를 남김이 없었다. 감동한 향리에서 설명하여 표상하였으나 불응한채 육십 일세로 졸 하나니 영기(永箕)가 숙부께서 기실(記實)하기를 바랐고 숙부 또한 자임(自任)하였으나 미과(未果)하였다. 장차 모행(母行)을 돌에 각하여 수전(壽傳)코자하니 원컨대 어른은 명(銘)하소서 하니 내 이르기를 유인의 행실이 옛 효부에 비견(比肩) 할 수 있으므로 선양할 뿐이요 결코 사정(私情)을 따르지 아니한다. 이에 특행(特行)을 엮어 세상의 인부(人婦)에게 고하니 니 어찌 명심銘心하지 않을 소냐 유인(孺人)은 고종(高宗) 경진(庚辰)생이고 묘(墓)는 남종기(南宗基) 건좌(乾坐)이며 부(夫)는 명진(溟鎭)이니 송정선생(松亭先生) 후(後)이고 고(考)는 재규(載奎)요 생고(生考)는 재연(載淵)이며 셍비(生妣)는 밀양손씨(密陽孫氏) 사관(思灌)의 여이고 육남은 영기(永箕), 영한(永漢), 영길(永吉), 영락(永洛), 영복(永福), 영갑(永甲)이며 여서(女壻)는 정순영(鄭舜榮) 이배현(李培鉉) 권판성(權判聖) 장동수(張東秀)요 손남(孫男) 두근(斗根), 위근(渭根), 해근(海根), 홍근(洪)根은 백방출(伯房出)이요 문근(文)根, 무근(武根), 충근(忠根), 봉근(奉根)은 차방출(次房出)이며 욱근(旭根), 내근(乃根)은 삼방출(三房出)이고 한동(漢東)은 사방출(四房出)이며 우송(友松), 대송(大松)은 숙방출(叔房出)이고 경송(京松), 창송(昌松), 무송(武松)은 계방출(季房出)이며 여(餘)는 불록(不錄)하고 명(銘)하여 이르기를, 하늘이 무심하여, 소학 내칙 아득하네, 이에 현부 있으니, 어찌 행실 정숙한가, 남쪽이랑 삼을 심어, 실 뽑아 베를 짜고 채전에서 김맬제, 자부(子婦)노래 시모장단. 사모 문득 실명(失明)하자, 밤낮으로 보살펴. 눈이 되고 발이 되어, 시모 종년 받들었네. 인효(仁孝)는 끊임없이, 내외가 두루 화목(和睦). 사인(四隣)에 이르도록, 그 온정 넘쳐흘러. 뽕나무에 앉은 포곡(布穀), 세끼들 입 벌리고. 치마잡고 떼 쓸 때, 뉘 주고 뉘 안주랴. 빛나는 덕(德)과 행실, 사람가고 향기만 가득. 옥(玉)돌에 사실 새겨, 부녀(婦女)에게 고(告)하네.
                                                                                                                         광복 오십 육년 경진 월 일
                                                                                                                                        동래 정인보 찬 

河婦密陽孫夫人孝行碑銘 幷序
 
光復三年丁亥夏普哭河晦峯先生因雨而留士谷之河氏先齋一夕語及古之孝婦河君永箕輒思其母而含悲君卽晦峯再從子也其貌頗有悽愴故普詢之坐人一人曰蓋君往歲喪母母有孝行故如是爲戚矣復問其母之行君作而言曰吾母孫孺人籍密陽世稱八龍之季生員公時之裔士人慶蘭女幼而婉淑十六歸吾父則事夫子能盡其誠養二家舅姑尤篤於敬四親許之妯娌間恒絀己以和妯娌悅服自麻枲絲繭之事刀針之功以至羹食之供手之所過無不精巧素不以才自處二十六歲時姑海州鄭氏年至五十九而忽然失明百方肆力而終不得則家事巨細一委婦旣曲得姑心雖小告之纖悉其不告者亦縷縷使如目見焉嘗曰姑倚吾而親苦不告而遺是吾所以爲姑視者未全也夏日負姑而周行園圃一爪之華一果之實引姑手而就撫之以樂人倫如是者十年如一日姑奄逝則送終之儀居喪之節無遺悔尤以是鄕黨設酌表顯祖則孺人不肯竟以年六十一歿世則永箕心望叔父之實記叔父亦爲自任而遂未果今則己矣玆摭吾母之德將圖刻石以壽傳願吾丈惠以爲銘 普曰君之情悲矣然固非循其子求也孺人之行儔擬於古孝婦之所以裨陰敎故宣揚而己於是孺人特行如右書之以認于世之爲人婦者可不銘哉孺人生於高宗庚辰墓在本里南宗基乾坐原其夫曰溟鎭松亭先生受一後考曰載奎生考曰載淵生妣密陽孫氏思灌女六男永箕永漢永吉永洛永福永甲餘繁不錄銘曰
天下拯民內則杳邈爰有賢婦何行之淑蓻麻南畝乃絺乃綌耘耔菜田婦唱姑拍自姑喪明夙夜相憐爲目爲足以旣姑年仁孝不匱內外孔和至於四隣情無以
                                                           加鳲鳩在桑子呀其口援衣誼呼孰與孰否令德紛郁人去香幽鐫之玉珉敢告內閨
                                                                                                                                           東來鄭寅普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