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절사
敬節祠
시조 하공진공 사당 경절사
소재지 : 진주시 남성동 진주성 내
서행량 충의당
동행량 수덕재
경앙문
경절사 전경
경절사는 진양하씨 시조 고려 충절신 하공진河拱辰공의 사당이다. 경절사는 진양하성의 성역일 뿐 아니라 고장의 명소로서 구국충절의 표상이 되고 있다. 경절사의 구조는 상단에 삼칸 맞배지붕을 올렸으며 내부 정면에 하공진공의 영정과 위패가 모셔져있다. 사우 동편의 3칸은 전사청이다. 좌측에는 각종 행사시 회의 장소로 사용되는 충의당이 있고 우측에는 행사나 제향 때 후손들이 기거하는 수덕재가 있다. 그리고 충의당 경내境內에 후손 병태炳台 옹이 경절사 연혁을 기록한 작은 비碑가 있다.
하공진河拱辰공의 탄생지인 이곳 경절사는 우리 민족의 정기와 자주정신을 선양하는 도량이며 구국충절을 거양하는 표상으로 영구히 현창하고 보존하는 사적지로 자리하고 있다.
시조 사적비
소재지:진주시 남성동 진주성내 경절사 앞
사적비문
하공진은 진주 사람이다. 성종 때에는 압록강 관문장으로서 목종 때에는 중랑장으로서 상서 좌사랑중으로 전직되었고 현종 때에는 먼 섬으로 귀양살이를 한바 있었으나 곧 부름을 받았다. 거란이 강조를 처 들어오는 난을 당하여 왕이 피란 차남으로 떠나게 되었을 때 공진이 왕의 뒤를 쫒아가 길에서 아뢰기를 거란이 처음은 역적을 친다는 명분이었으매 이제 이미 처서 잡았으니 사신을 보내 강화를 청하면 거란이 반드시 군사를 올릴 것이라고 하였다. 왕은 아침에 좋은 꽤를 얻어 공진 및 고영기에게 친서를 주어 거란군으로 가게 하였다.
공진이 창화현에 이르러 랑장 장민 별장 정렬을 먼저 보내 친서를 거란군에 전하게 하여 우리 국왕께서 친히와 뵈올 것이나 전쟁이 두렵고 또 내란이 있어 강남으로 피신하였으며 신하 하공진 우리에게 이 사유를 담은 서한을 주어 전달하라고 명령하였으나 역시 황겁하여 앞으로 나오기를 감히 못하오니 철병하여 달라고 청원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장민 우리가 채가기도 전에 거란의 선봉장이 이미 창화현에 닥쳤으므로 공진 무리는 곧 그 뜻을 말하였다. 왕이 만리 강남으로 가고 없음을 알고 거란의 추적병은 되돌아갔다. 그 이듬해 공진과 고영기는 거란본영에 가서 회군의 강화를 청하니 가란임금은 응락 하는 동시 공진무리를 억류시켰다.
공진이 볼모가 되자 속으로는 환국을 꾀하면서 겉으로는 충성을 다하여 거란임금의 총애를 샀다. 공진은 영기와 짜고 우리본국이 망하였으니 군병을 이끌고 가서 살펴보고 오겠다고 거란임금을 속여허락을 얻었으나 그는 다시 국왕이 이미 돌아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영기를 중경에 공진을 연경에 나누어 살게 하고 양가집 처녀를 아내로 선사하였으나 공진은 준마를 몰래 몰아내어 탈출을 꾀하다가 누설되어 거란임금의 친국을 받았다. 공진은 사실임금을 실토하고 나는 본국의 신하로서 감히 두마음을 품을 수 없으니 너히를 섬겨 삶을 원치 않는다고 외쳤다. 거란임금은 그를 아끼어 절개 고칠 것을 권유하였으나 공진의 말은 더욱 격렬하였으므로 드디어 배가 갈려지고 염통과 간이 씹혀지는 충렬의 죽음을 당하였다. 뒷날 국왕께서 교지를 내려서 그 공훈을 기리고 아들 칙충에게 녹과 가자를 주었다. 문종 육년 교서에는 하공진은 한 몸을 바쳐 적에 임하여세치의 혀로서 거란의 대군을 물리쳤다고 치하 하여 공신각에 영정을 그려 모시고 그 아들 칙충에 오품직을 주었으며 조금 뒤에 상서공부시랑의 증직을 하였다.
후학 완산 최재호 삼가 옮기고 씀
단기4302년 乙酉
後孫 泳淑 使子 在根 竪
後學 金海 金秉旭 謹書
2) 경절사 상향문擎節祠常享文
왕실에 충성을 다하고 盡忠王室
오랑캐 땅에서 순절했네 致命殊域
윤리를 도와서 서게 했으니 扶植倫綱
영원토록 본보기가 되네 百世衿式
3) 경절사 연혁擎節祠年革
1804년純祖 4 甲子
경절사 창건擎節祠創建
진주시 수곡면 사곡리 낙수암에 경절사를 창건하고 시조 고려 증문하시랑동평장사 시조 하공진河拱辰공의 위패를 봉안하고 음 12월 15일 사림 봉사 하다
1868년朝鮮 高宗 5
경절사 훼철擎節祠毁撤
원사 철폐령으로 향사를 일시 중지하였다가 1869년고종6년 기사己巳에 부조묘不祧廟로 자손 봉사하였다.
1954년
경충사와 충의당 창건景忠祠와忠義堂創建
시조공의 존엄한 얼을 숭모하기 위하여 시조공의 사우 건축 기성회를
결성하고 각 문중 첨종에게 탄성 집의토록 통지문을 보내다
임원= 會長 河泳珍, 副會長 河恂鳳, 總務 河啓鎭, 財務 河龍鎭
사우祠宇의 부지용으로 시조공의 유적지인 북장대 아래 남성동 167의 3번지 238평을 매수하다.
본 대지는 시조공께서 탄생하시고 사셨다는 이곳 성지내 - 현 충의당 위치이다.
어언 천년의 세월동안 병영兵營으로 관아官衙로 일제 강점시日帝强占時에는 도청부지로 사용 되어 오다가 경상남도 도청이 부산으로 이전 후에는 관사부지로 수용을 당하였던 곳이다.
1958년 4월 8일
경충사와 충의당 준공擎忠祠義堂竣工
경충사 6평 충의당 24평 내삼문 1평을 건축하고 진양군 수곡면 사곡리 낙수암에 봉안하던 시조공 위패를 봉안하기로 한 안을 변경하여 신위를 봉안하고 매년 음陰 3월 17일 제향하다.
陰 3월 17일 경충사와 충의당 준공 기념일에 이어 문충공 륜崙과양정공 경복敬復종향하다
1961년 4월
시조공 사적비를 입수하다始祖公事蹟碑立竪
충의당전忠義堂前에 입수하다 河在根出捐
1978년 월 일
경충사와 충의당 철거령景忠祠忠義堂撤去令
진주성을 임진란 전적지로 성역화하기 위한 국가방침에 따라 성내에 있는 모든 민가와 구조물 철거령을 내리다.
1979년 1월 13일
충의당 사적 보존회 결성忠義堂事蹟保存會結成
수곡면 사곡리 낙수암 경절사 제향일 종회에서 충의당 사적지 보존회를 결성하다.
임원
회장: 河 炳 台
부회장: 4인
상임간사: 6인
이사: 6인
고문: 13인
자손들의 뜻을 모아 당국에 보존 건의서를 제출하다
1979년 5월 18일
충의당 사적 유지 보존 방침 확정忠義堂事蹟維持保存方針確定
정부 요로에 건의서를 제출하고 문화재 전문의원회의 결의를 거쳐 청와대의 승인을 받아 유지 보존하라는 문공부 방침이 확정되다.
1981년 3월 17일
진양하씨 도청 발족晉陽河氏都廳發足
진양하씨 도청을 발족하고 종약을 제정하다
임원
도청장: 河炳烈
부 도청장: 3인
유사: 7인
장의: 15인
감사: 약간 명
1982년 5월 일
시조공 유적지 성역화 사업추진 취지서 발간
始祖公遺蹟地聖域化事業推進趣旨書發刊
사단법인 진주 문화원에서 고려충신 증 문하시랑동평장사 하공 공진拱辰 유적지 성역화 사업추진 취지서를 발간하다.
1985년 6월 일
도청의 사업추진都廳의事業推進
도청에서는 문공부에서 승인받는 사업은 다음과 같으나 자금 조달
부진 등 로 추진되지 못했다
《사업내용》
경충사와 충의당을 원 위치에서 20미터 동편으로 이건하고 전사청 내삼문 화장실 신축과 시조공 사적비를 사당 경내로 이건 조경 공사등이며 진주시가 공사를 주관하고 자금은 도청에서 전액 부담하라는 조건이었다.
1987년
시조공 영정봉안始祖公影幀奉安
장 7.5척 폭 4.5척의 영정(影幀)을 봉안하였다作者鄭弘巨
1988년 6월 19일
고려충신 사당 보수비 영달高麗忠臣祠堂補修費令達
정부가 고려 충신 사당 보수비로 6천만원이 영달되다.
1988년 7월 11일
경충사 및 충의당 이건공사 확대건의景忠祠忠義堂移建工事擴張建議
정부가 집행코자 하는 사업규모가 협소하여 확장해 줄 것을 진주시를 경유하여 문공부 장관에게 건의 하였다.
1989년 3월 일
경충사 및 충의당 이건공사 착공景忠祠義堂移建工事着工
진주시에서 경충사가 북장대를 가린다는 이유로 경충사를 동편으로 20미터 원형대로 이건하는 경충사 이건공사에 착공했다.
9월 11일
시조공 사적지 성역화 사업추진 위원회결성
始祖公史蹟地聖域化事業推進委員會結成
충의당에서 임시종회를 개최하여 시조공 사적지 성역화사업 추진위원회를 결성하다.
임원
위원장: 河炳台
부위원장: 17인
위원: 48인
상임위원: 河元植, 河性泰
1989년 10월
경충사 및 충의당 이건철거 공사 중지景忠祠忠義堂建撤去工事中止
사적지 추진위원회는 이곳이 시조공의 태생지胎生地이며 오성吾姓의 발상지라 원위치대로 보존하기 위하여 철거를 중지시켰다.
1989년 10월 6일
시조공 사적지 성역화사업 추진위원회 성역화 사업 착수
始祖公事蹟地聖域化事業推進委員會聖域化事業着手
사우 확장 중건 필요성과 규모를 알리고 헌성금 출연을 권하는 시조공 사우 중건 취지문을 각 첨종에게 보내고 모금 활동을 개시하였다.
종중이 의도하는 시설물의 수용에 필요한 최대한의 용지확보를 위하여 원 위치의 서원(西垣)을 기준으로 연장하여 경계를 넖혀 주도록 진주시와 문공부 문화재 관리국 및 관계기관을 수차 방문하여 승인 을 받다.
1989년 2월 13일
제 일차 사업승인第一次事業承認
정부 배정액 6천만원으로 사우 경내공사
사당 12평
내삼문 3.75평
전사청 6평 및 원장공사를 진주시 주관으로 집행하라는 문공부 승인
이 있어 공사를 진행하다
1989년 6월 19일
제 2차 사업승인第二次事業承認
사우 경역 남북 41.5미터 동서 34미터 430평의 부지를 사용하라는 문공부 승인을 받다.
1990년 7월 14일
추가 사업승인追加事業承認
자손들의 전액부담으로 시행할 공사는 충의당 26평 수덕재 22.5평 외삼문 5.5평 원장축조공사 규모를 확정하는 문화공보부로 부터 추가 승인을 받다.
8월 27일
공사 직영승인工事直營承認
진주시장으로부터 공사 직영 허가를 받고 문공부 등록 기능 보유자에게 도급하고 위원장이 직접 감독키로 하다.
1990年 11월 1일(음 9월 15일)
위패 매안位牌埋安
충의당은 시조공의 유적지이므로 시조사라 하고 시조공의 위패만 봉안 하자는 종회결의에 의해 경충사에 종향하던 문충공과 양정공의 위패를 매안 하다.
1992년 4월 30일
4차년 공사四次工事
경충사 6평을 철거하고 12평으로 신축
내삼문 1평을 철거하고 3.75평으로 신축
충의당 24평 남향에서 동향으로 26평을 신축
수덕재 22.5평을 충의당 목재로 서향으로 개축
외삼문 5.5평
전사청 6평 신축
원장 부럭조에서 자연석 문화재 규격으로 신설
4월
낙수암 경절사에 봉안하던 시조공 위패를 충의당내 경절사로 이안(移安)과 동시 영정影幀을 봉안하다.
음 3월 17일 대제 봉향.
음 12월 15일 기제사 봉향奉享
경충사를 경절사로 현판교체
1992년 4월
시조공 봉사답 헌납祀沓獻納
진주시 수곡면 사곡리 낙수암 경절사에 봉안하던 시조공의 위패를 충의당 시조사로 봉안과 동시
수곡면 사곡리 869-1답 2831.6㎡
수곡면 사곡리 863-2沓 1637.1㎡
시조공의 봉사 답으로 헌납하다
헌납자 사곡 河宗根. 河永珍
1992년 5월 15일 음 3월 17일
대종회 결성大宗會結成
춘향 대제시 충의당에서 진양하씨 대종회를 결성하고 시조공 사적지 성역화 사업추진위원회가 계획한 사업을 완수하여 재산과 종무 일체를 동일자로 대종회에 인계하고 추진 위원회는 해산하다.
1994년 7월 일
충절 사적기忠節事蹟記
고려 증 문하시랑동평장사 하공 충절사적기를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장 박영석이 찬한 사적기를 게시揭示)하다.
1998년 4월 20일
경절사 안내판 설치擎節祠案內板設置
충의당전에 시조공의 사적을 홍보하기 위하여 안내판을 설치하다.
2001년 9월 26일
헌성금 모금 기록표석 입수
충의당을 보존하기 위하여 종인들이 헌성금을 모금한 정표를 계속 기록 유지하기 위하여 표석을 세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