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현사
경현사
景賢祠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171호 1990. 1 .16
소재지: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월횡리
 
경현사는 조선 초기 함길도에서 여진족 토벌과 방어에 무공을 세워 3대代가 연이어 시호諡號를 받은 양정공 하경복 장군, 아드님 강장공 하 한 장군, 손자 경절공 하숙보 장군, 그리고 양정공의 아우님 참의공 하경리 등 네 분의 위패를 봉안하고 유림과 후손들이 향사를 받드는 사우祠宇이다.
양정공 하경복 장군은 진양하씨 시조 문하시랑 하공진의 11대손으로 진주시 수곡면 사곡리에서 태어나 1402태종2년 무과에 급제하여 무과 중시를 거쳐 삼군도진무에 올랐으며, 세종 4년 함길도 도절제사로 나가 10년간 연임하여 근무하면서 여진족을 토벌하고 영토를 확장하여 김종서가 6진을 개척하는데 초석을 다진 분이시다. 아우 참의공은 형님이 북방에 전념하는 동안 진주 인근의 9개 고을 수령을 차례로 지내면서 노모를 성심껏 봉양하여 청렴淸廉과 효우孝友로 빛을 남긴 분이시며, 양정공의 아드님 강장공은 출중出衆한 용력勇力과 무예武藝로 황고皇考에 이어 여진족의 토벌과 왜구倭寇의 침략을 방어防禦 함으로서 세종대에 북방의 안정은 공公의 부자父子의 공적功績이라는 칭송이 있게 한 장수이고, 강장공의 아드님 경절공은 무과 초시初試와 중시重試를 거쳐 나라의 간성干城처럼 국토방어에 큰 공훈功勳을 세운 장수로서 시혜施惠와 청렴淸廉의 기풍氣風을 수범垂範한 청백리淸白吏이시다.    

 1784정조8년 진주 지역의 유림들이 공의共議를 모아 양정공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공의 묘소 아래에 사우祠宇를 지어 제향하기 시작하였다가, 1922년 후손들이 사우를 이곳 월횡으로 이건하면서 참의공 ․ 강장공 ‧ 경절공 등 3공三公을 추봉追奉하였으며 이후 몇 차례 중수를 거듭하였다. 1948년 사우 앞에 네 분들의 정신을 기리면서 충효忠孝의 도道와 학문을 닦을 수 있는 건물을 지어 그 편액을 도천서당이라 하였으며 중재 김황金榥이 기문하였다. 1990년 후손들의 헌성금과 노력으로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로 지정되면서 국비가 보조되어 현재의 모습으로 중창되었다.

 건물의 배치는 사우祠宇를 중심하여 튼 미음(ㅁ)자 형이다. 정문인 숭덕문崇德門은 남쪽으로 향하고 있고, 사우祠宇 아래의 도천서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민도리집으로 5량五樑구조를 한 8작 지붕의 건물이며, 도천서당 전면前面 좌우에 사성재思誠齊와 수유재垂裕齊가 위치해 있는데 중창시에 도천서당과 사성재는 중수하였고 수유재와 숭덕문은 신축하였으며, 2004년 숭덕문 앞에 '양정공일가삼세연시기적비襄靖公一家三世連諡紀蹟碑'를 세웠다.

 뜰에는 큰 바위돌이 있는데 그 전면前面에 '충동일월忠同日月,덕수우주德垂宇宙-충은 해와 달과 같고, 덕은 온 누리에 드리웠네' 라는 글귀를 새겨 양정공의 공열功烈이 빛났음을 표현하였고, 그 후면後面에 '천류불식川流不息-흐르는 물은 쉬지 않는다' 이라는 글귀를 새겨 후손들이 양정공의 덕망을 부지런히 읽혀 이어갈 것을 면려勉勵하는 뜻을 담았다. 지금까지 지역의 유림들과 후손들이 이곳 경현사에서 매년 음력 3월 20일 춘향을 올리고 있다. 
 
1, 경현사景賢祠 봉안문奉安文
산악山嶽이 신神을 내리어 양정공襄靖公이 태어나셨도다. 웅대雄大한 계획과 무략武略으로 나라의 우뚝한 간성干城되셨네. 일찍이 진공進貢하는 꽃가지 꺾고, 범안犯顔하여 바른말로 간諫하였셨다. 만년晩年에 중요한 진鎭을 지키니, 오랑캐도 이에 순종順從하였네.  추악醜惡한 오랑캐 멀리 달아나, 오직 부리로만 숨을 쉬었으며, 위엄威嚴이 삭막朔漠까지 멀리 떨쳐서, 십년이나 봉화烽火가 잠잠하였네. 임금이 기뻐하여 면류勉留시키며 옥찰玉札을 여려 번 하사하시어, 혼정신성昏定晨省못해도 걱정 말게나, 경卿의 모친은 편하게 계시네. 조정에 들어와 찬성贊成이 되고, 외방에 나가서는 당얼棠臬 맡으셨네. 이로움과 해로움을 지적하면서 상주上奏한 소장疏狀도 적절適切하셨네. 쓰임에 알맞은 계략이 있어 한번은 펼쳤다가 한번은 늦추셨네,우레천둥 같은 위엄威嚴 보였고, 비처럼 무양撫養하셨도다.  은택恩澤은 온 백성에게 미쳤고, 공적功績은 사직社稷에 남아있으니, 장수로 삼았다가 재상宰相도 삼았으니, 임금은 착하고 영명英明하셨다. 계씨季氏 또한 현인賢人이어서 상체화常逮花兄弟가 빛나고 밝았다. 노모老母 봉양奉養 잘하여서 날마다 삼생三牲으로 진공進供 하셨네. 남기신 인애仁愛가 백성에 있었으니, 여려 해를 아홉 고을 옮게 맡아서, 은총恩寵을 내려주어 겹쳐 이르니, 나라의 충성스런 신하이셨도다. 닮은 분에 강장공岡莊公이 있어 부친의 공명사업功名事業 이어 받았으니,절원節鉞符節과 斧鉞을 지니고 남북으로 달려 네 조정朝廷을 내리 섬기셨도다. 임금이 그 재주 가상嘉尙히 여겨, 발탁拔擢해서 추밀樞密에 참여케 했으니, 공훈功勳에 보수報酬한 것이 신충宸衷에서 발단發端하였네. 경절공敬節公이 능히 이어서 홍弘에게 무武가 있었음과 같아서, 대대代代의 아름다움을 따랐으니 그 할아버지에 그 손자이시구나. 황경皇京에서 단사單使로 전대專對하고, 도총관都摠管을 겸하여서니, 명성名聲이 죽백竹帛에 번적이는데 누가 더불어 크다고 하라!

형제가 방명芳名을 나란히 하고, 삼대가 연이어 시호諡號를 받았으니, 진양晉陽의 오래된 문벌門閥에 이 네 분 어진이 뿐이로다. 뛰어나게 아름다운순량純良으로 자질資質이 영특英特하고 절조節操가 맑아, 예전에도 지금에도 밝게 빛나서, 세상에서 사표師表가 될 만하셨네. 세상의 스승으로 될 만했으니, 사社에서 제향祭享함이 마땅했는데, 지금까지 욕례縟禮 없었음은 후생後生들의 부끄러움이로다. 이에 상재桑梓 고향故鄕에다가 사우祠宇를 건립하고, 좋은날 가려 받아 게건揭虔(祭享)올려 혼령魂靈을 편안히 모시니,  혼령이 환하게 이에 임臨하여, 양양洋洋하게 좌우에 계신듯하네. 서쪽을 위上로 하여 차례 정함은 예법에 비추어 증거가 있다. 운잉雲仍(雲孫과 仍孫)들이 정성으로서 공경히 변두籩豆 올리니, 희생犧牲과 제주祭酒는 깨끗도 한데, 빈조蘋藻(祭物) 또한 향기로워라. 애연僾然하게 숙연肅然히 경해謦欬를 받듦과 같으니, 일찍이 거니시던 곳 구학邱壑(구릉과 골짜기)이 더욱 빛나네, 월산月山은 장엄莊嚴하고 월천月川도 깊고 맑으니, 오호嗚呼라, 후손後孫들이여! 영구토록 편안히 모시세.
                                        방후손傍後孫 용환龍煥 삼가 지음
景賢祠奉安文
維嶽降神 篤生襄靖 雄圖武畧 屹屹干域 早折貢花 犯顔直諫 晩守重鎭 戎狄是膺 胡醜遠逃 惟其喙矣 威震朔漠 烽息十年 王喜勉留 累下玉札 無憂曠省 曰卿母安 內拜贊成 外司棠臬 指陳利病 剴切奏疏 有猷有爲 一張一弛 嚴加雷電 養以雨風 恩被黎民 功存社稷 曰將曰相 君王聖明 季方亦賢 棣萼鞾鞾 善養老母 日進三牲 遺愛在民 歲遷九牧 寵賚洊至 爲國藎臣 惟肖剛莊 纘父之緖 仗鉞南北 歷事四朝 王嘉乃才 擢置樞密 報功酬勳 發自宸衷 敬節克承 若弘有武 趾厥世美 是祖是孫 專對皇京 兼都摠管 名耀竹帛 孰與爲京 元季聯芳 三世延諡 晉康舊閥 有此四賢 卓烈循良 英姿淸節 炳烺今古 爲世可師 旣爲世師 宜祭於社 迄無縟禮 后生之羞 爰就桑鄕 爰建祠宇 爰涓吉日 揭虔妥靈 靈赫斯臨 洋洋左右 西上序位 於禮于徵 雲仍齎誠 敬薦籩豆 牲酒旣潔 蘋藻且香 僾然肅然 如承謦欬 曾經杖履 丘壑增輝 月山莊嚴 月川泓瀁 於乎來者 惟以永寧
                                                           傍裔龍煥謹書
 
3. 도천서당 기道川書堂記
   하씨河氏가 진양에서 대성大姓이 된 지 오래이다. 조선 초에 벌열閥閱이 성盛하였는데 양정공襄靖公 세가世家를 최고最高로 일컬었다. 양정공은 태종 때 무과로 등용登用되었는데, 세종 때 벼슬이 경재卿宰에 이르렀다. 내직內職에서는 군국기무軍國機務를 담당하고, 외직으로 나가서는 북관北關의 자물쇠 구실을 하여 윤발綸綍이 답지하는 은총을 입었고, 공훈功勳은 이상彛常에 새겨졌으니 한 시대의 명망名望이 진실로 혁혁赫赫하였다.
  그 아우 참의공도 효성과 청렴淸廉으로 발탁되어 그 치적이 아홉 고을에 드러났다. 아들 강장공과 손자 경절공도 문종文宗, 세조世祖, 예종睿宗. 성종成宗을 내리 섬겼는데 역시 뛰어난 재기才氣와 청아淸雅한 절도로 여러 번 포장襃獎되었다. 삼대三代가 연이어 사서史書를 빛나게 하였으니 역대 조정에서 찾아보아도 많지 않으니 어찌 훌륭하지 않는가!
  양정공의 옛 살던 곳은 사곡士谷이었으나, 강장공 때에 비로소 월횡月橫으로 처음 이거했는데 사곡과 월횡은 모두 진주의 서쪽 지경地境이다. 이후 월횡을 세장世庄으로 하였으나 400여년이 지나면서 문운文運이 점차 쇠퇴해지자  각기 흩어져 이거移居함으로써 마침내 세거지를 지켜낼 수 없게 되니 후손들로서 항상 한탄恨歎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 그러다가 지난 을유년乙酉:1945가을에 후손들이 서로 의논하여 월횡 옛 마을에 집 하나를 구입購入하였다. 기둥과 지붕은 그대로 두고 고치고 꾸며서 추모追慕하는 곳으로 삼고 편액扁額을 도천서당道川書堂이라 걸었으니 그 집터가 도천道川가에 있기 때문이다. 혹자或者는 세분이 모두 무략武略으로써 세상에 이름이 높이 드러났는데  서당書堂이라 하는 곳은 강학講學하는 장소이니, 그 명칭과 실상實相이 서로 걸맞지 않음이 있는 듯하다고 의아疑訝해 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다. 문무文武의 도道는 원래 다른 것이 아니다. 국가의 유사有事시에 적을 무찌르고 방어하는 자者는 평소 마음이 의리義理에 익숙하도록 연마鍊磨되어 그때에 형세를 다스리는 것이 심대深大하니 대체大體와 강령綱領에 힘쓴 것을 알 수 있다. 더군다나 사람이 사람답게 되는 것은 무엇이 큰 것인가. 충효忠孝읠 따름이다. 학문을 강론하는 바는 이 충. 효의 도道를 밝히는 것이니 이 도를 배워 익히지 않고 다만 공적功績만 섬기면 그 근본이 변해진 것이다. 이것은 오히려 이후 세상이 날로 무너지고 어지러워지는 원인이 되어 나라를 위하는 자는 염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제 세분의 실기를 비교하여 상고하니, 맡은 일을 두루 거치면서 이룬 공적이 거듭하여 이러한 사실을 가리키고 있다. 요컨대 마음을 쓰고 일을 행한 것이 하나라도 충효를 근본으로 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평소에 익힌 바의 실상이 진실로 그대로 있었다. 어찌 무략武略만으로 얻은 명성이 그 실상을 덮어 가릴 수 있겠는가? 공의 후손된 자도 또한 마땅히 충효를 익히고 권장하는 것을 대대로 전하는 것을 규법으로 삼아야 한다.
 이 서당에 주선周旋하면서 그의 실기를 읽고 그 남기신 본보기를 생각하면서, 오직 하루아침에 가성家聲을 떨어뜨려서 조종祖宗에게 부끄러움을 끼치게 될까 염려한다면 서당이라는 실체가 대개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 사모하는 마음을 붙이는 곳으로서 무엇이 이보다 더하겠는가? 그러하지 않고 모수모구某水某邱에 집을 지어 선조의 이름을 표시하기만 한다면 작고 천박한 일이라 무엇을 숭상한다고 말할 것인가! 후손 만규가 나에게 기문울 청하기에 이와 같이 적고 따라서 힘쓰기를 권장한다.

            경인년1950중추 하한에 문소聞韶-安東古號 김황金榥 삼가 기문하다.
 
道川書堂記
 河氏之爲大姓於晉陽遠矣其在韓初閥閱之盛最稱襄靖世家襄靖公由武擧登用太宗世宗朝致位卿宰內而機務軍國出而鎖鑰北關寵沓綸綍勳銘彛常固巳赫然一代望矣其弟參議公拔擢孝廉治著九邑而子剛莊公孫敬節公歷事文世睿成之際亦以雄材雅操亟被褒獎上下三世震耀史官之書求之國朝所末始多有何其偉哉襄靖公故居士谷自剛莊公始移月橫皆晉之西境也由是以往遂以月橫爲世莊歷四百年餘漸而陵替則各自離散轉徙而世莊者竟不得保有後孫常懷慨恨頃歲乙酉秋相與謀購一屋月橫舊里因其架設而改修飾之以爲寓慕之圖而扁曰道川書堂爲其地在道川之上也或疑三公皆以韜鈐名世而書堂者講學之所也其於名實宜若有不相稱者是不然文武之道元非二致國家有事而折衡禦侮者心其平素諳練於義理時勢者深所務之體要可知也況人之爲人孰大焉忠孝而巳矣學之所講講此道也此道不講而唯事功機變之是尙此後世之所以日趨於壤亂也爲國家者可不念哉今講試考三公實紀其歷任成績可累指悉也要其用心行事無一不本之忠孝則平日所講之實固自有在而豈韜鈐之所得專蔽哉爲公後承者亦宜以課忠責孝爲世世相傳規周旋是堂讀其實紀念其遺謨唯恐一朝墜失以爲祖宗羞則書堂之實庶幾在此而其爲寓慕也何以加諸不然而惟以某水某邱堂仞榱尺爲表識先舊之名抑末矣尙爰稱焉後孫萬圭請余紀爲之書此仍以勉之
                                          歲庚寅仲夏下澣聞詔金榥謹記

4, 양정공襄靖公 일가一家 삼세三世 연시連諡 기적비紀蹟碑   -병서幷書-
 우리 역사상 가장 국세國勢가 안정되고 문화가 찬란燦爛한 시대로 조선 세종조世宗朝를 친다. 세종대왕이 이런 훌륭한 정치를 할 수 있었던 원인은 경제적 기반과 국방의 안고安固에 있었다. 조선 전기前期 백百여년 동안 북로남왜北虜南倭를 방어하여 국가를 안정시킨 일문一門에 삼대三代 조祖․자子․손孫이 있으니 바로 양정공襄靖公 휘諱 경복敬復 강장공剛莊公 휘諱 한漢 및 경절공敬節公 휘諱 숙보叔溥이다. 세 분의 위성偉盛한 훈적勳績은 이미 국사國史에 훤혁烜赫하다. 하河 씨는 본관이 진양인데 고려조高麗朝의 절신節臣 문하시랑 평장사 휘諱 공진拱辰이 시조이다. 그 뒤 휘諱 거원巨源은 전객령典客令 증贈병조판서兵曹判書이고 자子 휘諱 을부乙桴는 군기감軍器監 증贈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참판兵曹參判이고 자子 휘諱 승해承海는 서운부정書雲副正 증贈정헌대부正憲大夫 병조판서兵曹判書이다. 이상以上이 양정공의 증조曾祖와 대고大考 및 황고皇考이다. 비妣는 태부인 보성선씨寶城宣氏이다.
 양정공은 우왕 3(1377)년에 진주 사곡士谷에서 탄생하였다. 자유自幼로 기량氣量이 관작寬綽하고 풍자風姿가 괴위魁偉하고 여력膂力이 절륜絶倫하였고 사어射御에 뛰어났다. 일찍이 사냥을 나갔는데 맹수猛獸가 달려들자 공公이 물에 처박아 죽인 일이 있었던 바 이로부터 신용神勇이 널리 알려졌다. 태종 2년에 무과武科에 합격하였다. 갑사甲士로써 숙위宿衛할 적에 분매盆梅를 왕에게 진상進上한 이가 있었는데, 공公이 그 일지一枝를 꺾으며 "북로北虜가 충동蟲動하여 인재人才 구求하기에 급급汲汲해야 할 때에 주상主上께서 이런 상지지물喪志之物을 즐길 겨를이 있겠소?" 라고 하자 태종太宗이 듣고 크게 기이奇異하게 여겼다. 태종 10년 중시무거重試武擧에 올라 길주吉州 조전지병마사助戰知兵馬使를 거쳐 경성병마사京城兵馬使, 함길도咸吉道 병마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 등等직職에 제수除授되었다. 공公은 근近 25년 동안 국경에서 여진족의 침구侵寇를 막았기에 세종이 비도丕圖를 전개展開하여 수준 높은 치적治績을 쌓을 수 있었다. 북변北邊의 수비守備는 공公에 힘입어 무려無虞 할 수 있었으나 공이 모부인母夫人을 시양侍養할 수 없는 실정을 세종이 이해하여 제弟 휘諱 경리敬履를 진주 인근의 수령守令에 제수除授하여 모부인母夫人을 봉양하도록 조치措置하는 한편, 모부인에게 자주 식량과 의복衣服 등을 선사宣賜하고 공公을 위로하는 어찰御札을 누차累次 내려 안심하고 방수防守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했다. 세종 9년에 의정부참찬에 승진하여 10년 만에 환경還京하여 세종을 알현謁見하고 귀향歸鄕하여 모부인을 근견勤見하였다. 세종 14년에 판중추부사 겸兼 함길도체찰사가 되었다가 17년 의정부찬성 겸兼 의금부제조가 되었다. 이때 왕명王命으로 황보인 등과 진서陣書를 편찬하였다. 그 익년翌年에 세종이 특별히 귀양歸養을 명命하였다가 바로 경상도 도절제사로 제수하여 모부인 봉양을 편리하도록 하였다. 이에 앞서 가인家人들이 공의 봉록俸祿을 저축하여 웅장하게 제택弟宅을 건축했는데 공이 보고 노怒하여 철거하라고 명命하였으나 자서子壻와 인리隣里의 간청으로 그대로 두었는데 이에서 그 지심持心이 염결廉潔함을 알 수 있다. 1438(세종20)년 62세로 연관捐館하니 도성都城의 백성들이 모두 통곡痛哭하며 철시撤市하였다. 백석동白石洞 자좌지원子坐之原에 안장安葬했는데 세종은 특별히 조관朝官을 보내 장례를 도우도록 하고 사제賜祭하였다. 양정襄靖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는데 갑주甲冑로 공로功勞가 있는 것을 양襄이라 하고 덕德으로 회유懷柔하여 여려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는 것을 정靖이라 한다고 하였다.
 초자肖子 휘諱 한漢은 무과에 합격하여 세종 9년에 호군護軍에 제수된 이래로 시종관侍從官 상호군上護軍 등等 직職을 거쳐 세종 15년 회령진첨절제사, 영북진첨절제사에 제수되어 북새北塞를 방어하였다. 세종 20년 경상좌도 도만호都萬戶를 거처 길주목사, 황해도 도절제사都節制使, 판영변도호부사, 경상좌도 도절제사, 동지중추부사, 경상우도 처치사 등 직을 거쳐 자헌대부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세종 15년에 군신들과 활쏘기를 하였는데 공公이 일등一等을 하자 왕은 활을 하사하였다. 세종 30년 요동遼東에서 변란이 있자 세종은 공이 거居 상중喪中 임에도 기복起復하여 대책을 세우게 할 정도로 지우知遇를 입었다. 세조 2년에 원종공신 3등에 녹훈錄勳되었고, 또 세조는 "하한河漢을 보면 정토征討가 생각난다" 라고 말할 정도로 공公의 정벌征伐한 공功을 기억하고 있었다. 1460년 12월 26일에 서세逝世하니 세조는 부전賻奠을 하사하고 강장剛莊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는데, 강하고 굳세고 과감果敢함을 강剛이라 하고 적을 이기고 뜻이 강한 것을 장莊이라 한다.
 양정공의 영손令孫 휘諱 숙보叔溥는 단종 원년에 무과에 올랐고 세조 2년에 중시重試에 합격하여 길주 판관으로 전임傳任되었다. 세조 12년에 통정계通政階에 올라 강계부사江界府使에 제수되고 이후 평안서도 절도사,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하였다. 성종 9년에 가선대부 형조참판에 제수되고 이후 충청도 수군절도사, 호조참판, 충청도 관찰사, 한성부 좌윤, 전주 부윤, 지중추부사 등等 직을 역임하였다. 1494(성종25)년에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건주위 정벌의 공功으로 3등 공신에 책훈되었다. 전주 부윤으로 재임 시에는 청간제일淸簡第一이라는 칭송이 있었고 도임지到任地 마다 치적治績이 있었다. 1501년(연산7년)에 자원대부 지중추부사 겸兼 5위도총부 도총관에 이르렀다. 이해 11월 초 3일에 임지에서 졸卒하자 경절敬節이라는 시호를 내렸는데 일찍 일어나서 일을 공경恭敬하는 것이 경敬이요 염치廉恥를 좋아하여 스스로 절제하는 것을 절節이라 한다.
 3대三代에 연連하여 무과에 급제하여 남북의 변경邊境을 방수防守하고 졸卒후 시호諡號를 받은 일은 우리 역사에서 그 유례類例를 찾기 어렵다. 이런 위적偉績을 매몰埋沒시켜서는 안되겠기에 후손들이 정성을 모아 숭비崇碑를 세워 수전壽傳을 도모하였다. 불녕不佞이 그 문적文籍과 조선왕조실록을 고열考閱하여 세분의 행적을 간술簡述하고 3대 시호의 영광을 기리는 명銘을 붙인다.
시법諡法은 엄정嚴正하니 국가에 공정公定한 평評
몽시蒙諡에 광영光榮함을 누구나 자랑하네.
양정공襄靖公 호국위업護國偉業 계승한 아들 손자孫子
조선조朝鮮朝 국가안보國家安保 이분들 업적業績이라.
삼대三代에 이은 시호諡號 일문一門의 조급자손祖及子孫
역사상 희유지사稀有之事 매몰해 될 말인가
후손들 경침합력傾忱合力 궁비穹碑를 수건樹建하네 
천추千秋에 길이길이 역사歷史를 증언證言하리.
 
계미癸未 2003년 청명절淸明節
文學博士 慶尙大學校 敎授 中國 華中 師範大學 兼任敎授 金海 許捲洙 謹撰
 
도천서당  전경道川書堂全景
소재지: 하동군 옥종면 횡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