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원모재遠慕齋
소재지: 밀양시 무안면 동산리
원모재는 호군공의 5세손 영모재 휘 재정再淨의 셋째아들이신 찰방공 휘 윤성潤城공의 제향을 올리는 재실이다. 1965년에 후손 재극載極 재신載信 재균載均 재근載謹 등 여러 종원들이 뜻을 모아 마을 남향 언덕에 네 칸 집을 세우고 원모라는 편액을 달았다.
원모재 기遠慕齋記
밀양의 대항에는 진양하씨가 많이 세거하여 모두 영모재 휘 재정을 조상으로 하는데 공의 제3자인 찰방공 휘 윤성은 효우와 문학으로 알려졌다. 그 후손들이 한미하여 떨치지 못하다가 중간에 동산 원곡으로 이사하여 사는 이가 열 두어 집인데, 문헌이 빠진 것이 많아서 선대의 일을 단장하지 못하여 한을 품은 지 오래였다.
지난해에 재극 재신 재균 재근 등 여러 사람이 종중에 의논을 내어, 사는 동네의 남향 언덕에 네 칸 집을 세우고 원모재라 편액을 달았다. 찰방공의 묘소가 남쪽 10리의 운정산 술좌 언덕에 있고, 공의 배위인 연일정씨의 묘소가 동편 10리의 독산에 간좌 언덕에 있어서, 여기서 세제의 재계하는 곳으로 하고, 또한 일족을 모으고 빈객을 맞이하는 두 가지 일을 겸하기 위함이었다. 금년 겨울에 그 일족의 수재인 표진이 내게 상인방에 걸 글을 청하였다. 나는 가만히 원모라고 편액을 단 것은 그 의미가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추모하는 마음은 그 소리와 모습이 접촉함으로 인하여 보고 느끼는 데서 생겨난다. 선조의 시대는 이미 수 백 년이 지나 바람결의 음성과 그림자 같은 모습이 아득하게 사라졌으니 무엇에 의지하여 멀리 추모하는 정성을 붙일 수 있겠는가? 하물며 들으니 공의 행적은 모조리 없어져 전하지 않으며, 단지 효도와 우애와 문학으로 알려졌을 뿐이라고 함에랴! 비록 그렇지만 선조는 후손의 뿌리이다. 뿌리가 없으면서 가지가 뻗어가는 것은 없다. 후손들이 매양 그 뿌리가 곧 나의 선조임을 생각한다면 저절로 하루라도 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세대가 멀어져 사당을 헐어 조천 하더라도 다시 묘제의 예가 있는 것이니, 이는 하늘의 이치가 사람의 정으로 마지못할 일이다. 이미 이 예를 행한다면 또한 재계할 장소가 없을 수 없다. 제사를 지내면서 재계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신이 오시어 상하좌우에 양양하시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이제 하씨 여러 사람이 한미한 일족으로 고달프게 애써 이 재실을 지었는데, 큰 성씨 큰 문벌의 사람이 손가락 한번 펴서 일을 이룰 수 있는 것과 비교하면 어찌 지극히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선조를 추모하는 정성이 참으로 훌륭하게 여길 만하다. 이로 말미암아 할 말이 있다. 대개 추모하는 데는 깊고 얕음이 있다. 만약 재계할 장소가 있어서 해마다 한 번 지내는 제사를 잘 치루는 것으로 추모하는 도리를 다하겠다고 여긴다면 모자란다.
선조께서 효도와 우애와 문학의 실질이 있었으니, 나 역시 그 효도와 우애와 문학을 본받아 국에서나 담장에서 사모하며, 키를 만들고 갖을 만들듯이 계승하여, 잠시라도 혹 늦추지 않아야 한다. 매양 일족을 모으거나 빈객을 맞이함에 한갓 술잔을 기우리며 한담만 하지 말고 때때로 선대의 아름다움을 강론한 뒤에라야 참으로 깊이 사모하는 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씨 여러분은 힘쓰시기 바란다.
을사1965 섣달 안동 권창현 기
遠慕齋記
密州之大項晋陽河氏多世居皆祖永慕齋諱在淨而公之第三子有察訪公諱潤城以孝友文學聞,其後昆寒弱不振中間移居銅山院谷者只十數家文獻多闕未能賁飾先事而齎悢者久矣頃年載極載信載均載謹諸氏創議族中建立四間屋於所居村向丁之丘扁以遠慕盖以察訪公墓在南十里雲汀山戌原公之配延日鄭氏墓在東十里獨山艮原於此焉爲歲祭齊明之所而亦以兼聚族延賓二事也.今年冬介其族秀杓鎭請不侫以揭楣之文不侫竊惟扁以遠慕其義何在,慕者因其聲容所接而觀感以生也.先祖之世己經屢百而風徽影象邈焉泯焉則憑何而致遠慕之誠乎況聞公之事行蕩佚無傳而只有孝友文學聞而己哉.雖然先祖後昆之根也.未有無根而枝達者矣後昆每念其根之卽吾先祖則自不能有一日可忘矣是以雖世遠而廟毁而復伸其誠於原野之禮此天理人情之所不容己者也毁行是禮則亦不可無齋明之所祭而不齋明則安敢望神之格思而洋洋乎上下左右乎今河氏諸人以寒弱之族積勞盡瘁創起是齋方諸豪姓大閥人可伸一指而事可集者豈不極難矣乎慕祖之誠儘可韙也因有一言盖慕有淺深若以齋明有所 而利行歲祭爲盡慕之道則未也先祖有孝友文學之實則我亦效其孝友文學于羹于墻 爲箕爲裘而無敢斯須或弛每於會族也延賓也勿徒以盃酒閑談而時時講討先徽然後眞可謂慕之深者也惟僉氏勉乎哉
歲乙巳 二之日 安東 權昌鉉 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