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강재龍岡齋
19) 용강재龍岡齋

용강재龍岡齋
소재지:  진주시 대곡면 단목리 단목
 
   용강재는 진사 단지공 하협의 삼남 생원生員 달한達漢공의 제향을 올리는 재실이다. 1996년 정초에 후손들이 공을 우모할 재사를 건립하기 위해 뜻을 모으고 진목위眞木位 설渫의 종중에서 부지 250평을 제공받고 후손들의 헌성금으로 세웠다. 재실의 명칭은 공公의 자호를 따서 용강재라 하였다.
 
1) 용강재 기龍岡齋記
  진주관아晋州官衙에서 동쪽으로 십리十里쯤 가다보면 장중莊重한 고가古家가 그득한 유서由緖 깊은 한 마을이 저 멀리 숲 속으로 은은히 보이는데, 이곳이 바로 이름난 단목丹牧 마을이다. 진양하씨들의 세거지世居地인데, 효우시례孝友詩禮의 가문家門으로서 명공현사名公賢士들이 끊이지 않고 나왔다.
하씨河氏는 고려 현종조 충절신 증문하시랑동평장사 휘 공진高麗顯宗朝忠節臣贈門下侍郞平章事諱拱辰을 시조始祖로 삼는다. 조선중기朝鮮中期에 이르러 증 이조판서 진평군 휘 위보贈吏曹判書晋平君諱魏寶는 십일남十一男을 두었는데, 모두가 유림儒林에서 명망名望이 있었다. 아들 가운데 휘 협諱悏은 호號가 단지丹池로서, 진사進士에 급제及第하였는데 학행學行이 뛰어나 그 행적行蹟이 진양지晋陽誌에 실려 전한다. 그 셋째 아들 휘 달한諱達漢은 문한文翰이 전아典雅하고 거지擧止가 단중端重하여 사우士友들의 추중을 입었다. 일찍이 사마시에 합격하고서 환로宦路에 나가지 않았으니, 당시의 조정은 당쟁이 격열激烈하여 자신의 경륜經綸을 펴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 때 유림과 관계官界에 크게 영향력을 갖고 있던 분이 이끌어주려고 했지만, 공公은 개결介潔한 성품性稟으로 구차苟且한 행동을 하려 하지 않았다. 물러나 향리에다 용강정사龍岡精舍를 짓고서 경학經學에 잠심潛心하여 자락自樂하였다. 세속世俗의 명리名利에 대한 생각을 끊고서 산수간山水間을 소요逍遙하니, 당시當時 사람들이 학鶴에 비유譬喩하였다.
  공公이 동강龍岡이라고 자호自號한 것은, 저으기 남양南陽땅 와룡강臥龍岡 아래에 은거隱居하면서 경륜經綸을 온축蘊蓄하던 제갈공명諸葛孔明을 흠모欽慕해서였다. 만약萬若 공公이 좋은 시대時代를 만나 그 온축蘊蓄한 바를 펼칠 수 있었다면 백성들에게 크게 혜택惠澤을 끼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제 삼백여년三百餘年의 세월이 흘러 공公의 후손들은 번성하여 이미 수백호가 넘었다. 그러나 용강정사龍岡精舍는 이미 자취가 없어져, 후손들이 한 데 모여 공의 유덕遺德을 존모尊慕하는 마음을 붙일 곳이 없어 늘 아쉬워해 왔다. 그러다가 지난 병자1996년 정초에 후손들이 모여 우모寓慕할 재사를 건립하기로 결의하였다. 이 이전에 공의 차자次子 진목위眞木位 휘諱 설渫을 위한 재사를 건립하기 위하여 진목위 종중眞木位宗中에서 마련해 두었던 250여평의 터를, 공을 위한 재사를 짓는 데 쓰도록 제공하였다.
이에 계동 장啓東丈이 추진위원장推進委員長에 추대推戴되어, 이 일을 위하여 계획을 수립하고 후손들의 정성을 결집結集하고 목재를 고르고 대목大木을 불러오는 등 이 일을 통관統管하였다. 당시 곤영회昆永會 회장會長 계식癸植은 이 일을 맨 먼저 발의하였고, 솔선率先하여 큰 성금誠金을 헌정獻呈했다. 위원委員 창식璨植, 일원一源, 무식武植 등은 각각 최선最善을 다해서 이 일을 도왔다. 특히 계동 장啓東丈과 무식武植은 늘 현장에 나와서 일을 감독監督하고 쇄사瑣事를 도맡아 처리하였다. 모든 후손들이 마음을 합치고 힘을 모아 오래 걸리지 않아 산뜻한 사간四間의 건물建物이 완성되었고, 문랑門廊 주사廚舍 축대築臺와 담장垣牆도 말끔하게 다 갖추어졌다. 재사齋舍의 명칭은 공의 호號를 따서 썼고, 규모는 지나치게 사치奢侈스럽지도 졸박拙樸하지도 않았다.
  재사齋舍는 옛날 공이 생장生長했던 단목 마을 중앙에 자리 잡았다. 뒤로는 멀리 두류산頭流山을 등지고 앞으로는 월아산月牙山이 마주하고 있고, 재사齋舍 앞에는 푸른 들판이 펼쳐져 있고 들판 끝으로는 남강南江이 감돌아 흐른다. 그윽한 동부洞府와 잘 조화調和를 이루고 사방四方 산수山水의 푸르런 기운氣運이 재사齋舍로 배어드는 듯하다.
  공의 후손된 사람들은 이 재사가 완성되었다 하여 이제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한다면 잘못이다. 이제부터 이 용강재에 자주 모여 조상祖上을 숭모崇慕하고 족의族誼를 돈독敦篤히 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지금은 촌수寸數가 멀어졌지만, 본래는 한 뿌리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하면 문운門運이 창성昌盛해져 무궁無窮토록 뻗어나 갈수 있을 것이다. 비록 한 할아버지의 子孫이라 할지라도 자주 모여 세계世系를 밝히지 않고 족의族誼를 돈독敦篤히 하지 않는다면, 자손 상호간相互間의 관계關係는 마치 모르는 길가는 사람과 다를 바가 없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하고서 어찌 문운門運이 창성昌盛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후손들은 이 재사에서 예법을 익히고 역사를 논하고 독서를 하고 정신을 식히는 일을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더 나아가 빈객賓客을 대접待接하고 젊은이들을 교육하는 일도 여기서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재사의 건립을 하찮은 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이 재사를 잘 활용하여 한 집안이 아주 화목하게 지내고 집안의 젊은이들이 예의범절禮儀凡節을 익혀 올바른 길로 나가게 된다면, 이것이 바로 큰 수확收穫이다. 이런 일이 확대擴大되어 나가면 오늘날의 곤란混亂한 세상 풍속風俗을 바로잡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공의 후손들은 이 재사를 건립하는 데 정성을 다하여 다른 가문의 부러움을 사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후손들끼리 화목하게 지내고 집안의 젊은이들이 바른 길로 나아가는 것으로써 세상에 널리 알려져야 할 것이다.
  재사를 짓는 일이 거의 끝나갈 무렵에 계동啓東과 무식武植이 나를 방문訪問하여 기문記文을 부탁付託할 새 내가 감당堪當하지 못할 일이라고 사양辭讓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公의 사행事行과 재사건립齋舍建立의 전말顚末)을 이상과 같이 간략簡略하게 적는 바이다.
            己卯(1999)년 正月 初十日 文學博士 慶尙大學校 敎授 許捲洙謹記
 
 龍岡齋記
晋州治東十里有一村隱現於林壑之中者曰丹牧自昔其名廣播於遠近乃晋陽河氏世居焉名公賢士接踵而出河氏以高麗忠節臣贈高麗門下侍郞同平章事諱拱辰爲肇祖降至朝鮮明宣之際有諱魏寶贈吏曹判書封晋平君生十一子其季成均進士諱悏丹池先生其學行載晋陽誌有三子曰諱達漢文學典雅擧止端重士友推重早中司馬擅才藝更不屑仕宦盖以邦日黨禍酷烈而難以展布其蘊奧故也時有山林領䄂欲爲之薦引而公以介潔之不肯作婀娜之態及卷懷鄕里構龍岡精舍潛心經學囂囂自樂布衣葛巾逍遙於泉石間泊然絶名利之念時人喩諸鶴扁以龍岡蓋竊自比於南陽卧龍先生也公若逢時展志則其貽澤於民者何如哉光陰倏忽今距公之世己過三百年子孫蕃衍至數百戶而精舍己圮難尋其影其爲子孫者無所寓慕自歉於心者久矣去丙子蓂新之日遠近居之後孫回集於故里也癸植首發建齋之議諸孫無不欣然贊之於是啓東見推爲委員長總管其務募誠集力鳩材招工諸後孫爭先來助焉且公之次子諱渫后孫眞木位宗中邨中塽塏處垈地二百五十餘坪提供癸植快捐鉅貲璨植一源武植各盡其任尤啓東武植無日不臨場董役辨完諸鎖事以是宏構四間不日而成並以門廊厨舍階砌垣牆齋備扁齋以龍岡盖仍舊也侈儉合度景用俱適齋位於村之中央遠背頭流山近對月牙山綠野夷曠於前南江繚野而流山水之翠微四方可挹自公之一身而子自子而孫自孫而至雲仍芸芸可謂盛矣昌矣然今爲公之後孫者或以建一齋舍爲能事己畢則是大錯想也須源源來會於斯齋而講崇祖睦族之事則門運可以連縣於無窮矣同爲一祖之後孫不相識若路人而豈可望門運之昌隆耶不但崇祖睦族之事習禮論史讀書怡神可以於斯齋也接賓訓幼亦可以於斯齋也然則斯齋之建不是微事推此而進則可以矯世風之荒亂矣爲公之後孫者其相勗旃此門之合心協力建成斯齋己爲他門之所欽羡矣不止於此將以崇祖睦族名於世是宜夫役將告訖啓東武植甫訪余而責記以不敢累辭不獲略記公之事行及建齋顚委右己
                              己卯正旬 慶尙大學校敎授文學博士許捲洙謹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