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덕재慕德齋
소재지: 진주시 수곡면 사곡리 사곡
모덕재慕德齋는 사산처사士山處士 용와容窩 하진현河晉賢공을 위하여 재실을 짓고 편액을 모덕재라 했다. 공의 재호를 용와容窩로 했던 그 뜻에는 거기에 적당한 설說을 담아서 후손들로 하여금 현판에 기록하려 달고 상시常時로 돌아볼 때 공의 대덕大德이 여기에 있다고 하였다.
모덕재 기
주서에 가로대 반드시 용납할 만한 덕德이 있어야 만이 이에 대방을 할 수 있다고 했는데 사산士山 처사 하공河公이 자호自號를 용와容窩라고 한 것은 대개 이 점을 취한 것인데 지금 그 후손들이 공을 위하여 재실을 짓고 현판에 모덕재라 했는데 또한 이와 같은 뜻을 포함하여 밝힌 것이다. 대개 사람이 인덕이 있는 것이 그릇이 물건을 수용하는 것과 같아서 그릇이 크고 작은 것이 있는 법이어서 그 물건을 그릇에 받는 것도 절도에 따라서 말로서 수량을 계산하는데 몇 되기지 솥과 말 술통이 정해져 있는데서 초과하면 넘치는 것은 쉽게 보인다. 또한 시험적으로 생각해 볼 때 사람이 세상에서 날마다 쓰이는 일과 물건이 눈앞에 다투어서 나타나는데 크고 작은 일, 순조로운 일, 거슬리는 일들이 첨차만별로 같을 수 없는데 그것을 나름대로 처치하는 데는 그 분양에 따르지 아니할 수 없다. 만약에 누구하나가 찬성하여 소근 거리며 이 일건사가 옳다고 생각되어서 의기가 양양 기분이 좋아했다가 이와 반대로 내 마음이 어기고 내 뜻이 거슬리고 듣기 싫고 보기 싫을 때는 비록 적은 일 적은 문건이라도 심통이 막혀서 얼굴모습이 변하여지고 말씨도 짓궂게 나온다. 이것은 사물을 포용하는 덕의 아량이 적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벅을 수 있는 음식물이 있어서 한평생 살아갈 수 있는 데에 비단옷 입고 거문고 퉁기며 언제라도 고정적으로 이것은 있다고 생각하여서 세상이 칭찬을 해도 기뻐할 줄도 모르고 세상이 비난을 해도 귀 밖으로 듣는 자는 구속은 어떠한 용량容量을 품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뜻을 세우는 처음에는 보통 때라도 비상한 격동을 갖는 곳은 뻔하다. 비록 그가 여기에 있어서 당당한 세력을 갖고 깃발을 흔들고 훈장을 띠고 있다 해도 좀처럼 은혜에 감사할 줄 모를 것이고 그를 미워하는 자가 그 얼굴에 침을 뱉는대도 침방울이 마르기를 기다리고 반항이 없으니 그 만큼 용물성用物性이 있다는 도량이며 우리가 본받아야 하겠는데 그가 능히 용납하는 여부에 따라서 덕의 대소가 판단된다. 우리는 한번 생각할 점이 있지 않는가 공이 진양고가에서 출생하여 그가 보유하고 있는 지벌은 남들만 못할 것이 없지만 오히려 겸손하고 사우들과 종유하여 문견을 높이고 평소에 가정에서도 모든 일을 다스리는데 희로를 얼굴에 표현하지 않았다. 그는 독서에 취미가 있어서 한마디 말씀도 실천에 옳기 곤 했다. 지금 그가 사망한지 2주년이 지났지만 진주에 인사人士들은 그에 행실을 전송하고 있다. 나또한 그에 남긴 글을 읽기도 했고 그의 묘 비문을 쓰기도 하여서 그의 덕행德行의 대치大致를 나 이미 알고 있었기에 여러 번 되풀이 하지 않는다. 다만 그가 용와容窩를 자호自號로 했던 그 뜻에는 거기에 적당한 설說을 하여서 그에 후손으로 하여금 현판에 기록하여 달고 상시常時로 돌아 볼 때 공의 대덕大德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시재是齋를 시종경기자始終經紀者는 공公의 증손 이진伊鎭과 현손 영두泳斗 영원泳源과 오대손 인근仁根 그 두 사람이다. 나에게 와서 기문을 요청한 한자者는 영두씨泳斗氏 유고우근야遺孤宇根也라.
세정미 상원 의성 김황 기
慕德齋記
周書曰必有容德乃大放士山處士河公之自號容窩蓋取諸此而今其後承爲公立齋扁曰慕德即亦所以追述其意也夫人之有德猶器之受物器之有大小而其受物也隨而爲節斗觧之量而不堪於鍾鼎盃觶之酌而稍過則溢固其所易見也宜嘗試思人之於也日用事物之交乎前者細大順逆有萬不同而至其應接而處置之莫不隨其分量若夫一個人之譽之而沾沾焉自以爲是一件事之快意而揚揚焉若將有餘其反是而拂吾心志逆吾耳目者則雖小事小物即懣然室塞於中而勃然見乎面貌辭氣是豈非德小而不能容之故哉迺有飯--茹草而若將終身袗衣皷琴苦固有之擧世譽之而不之喜擧世非之而不少感若此者果是何等容量而豈常之人之所與議到哉然而立志之初居常之際自不容不以是激昇也雖其下乎此者紆章麾節而不快恩仇人唾汝面而竢其自乾亦豈非能容之善而在吾人爲所當慕傚者乎噫觀其能容與否而德之大小是焉判可不念哉可不勉哉公生於晋陽古家其擁有世望固己不讓於人而猶常自折節從師友遊謙虛受益惟恐其或不及居家接物不見喜怒之形於色其深有味於書之一言而又能實踐之如是至今其卒其卒己二週甲而晋之人士莫不傳誦之余嘗獲讀其遺集而題諸墓己德行之大致其自可見不必累陳今窃獨因其自號之一義而据說如此使其後人揭之楣間而常顧諟庶不失爲公之大者乎是齋之始終經紀者公之曾孫伊鎭玄孫泳斗
歲丁未上元義城金榥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