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각재愛慤齋
15. 애각재愛慤齋

애각재
소재지: 진주시 수곡면 사곡리 사곡 591번지
 
 송정공 수일受一의 차자 찬瓚과 그 후손들의 제향을 올리는 재실이다. 구 재실을 1930년에 수곡면 대천리 구태동에 창건하여 60여년을 지난 뒤 재실이 협소하고 퇴락하여 1991년에 후손들의 뜻을 모아 사곡동 양지에 자리를 잡아 이곳에  본 재실을 신축하였다.
애각愛慤이란 경애를 드리면 있게 되고 정성을 드리면 드러난다는 예기의 글로서 기록한 것이다. 제사는 이와 같이 하여야 제사하는 대상을 밝게 본다는 뜻이다. 제향일은 음력 10월 제3토요일 일요일 양일간이다.
 애각재 기愛慤齋記
   옛날 선조 인조 때 처사 하공은 휘가 찬瓚이요, 字가 중진仲珍이니, 곧 송정 선생 중자이시다. 진주 서쪽의 정곡에서 태어나 분가함에 즈음하여 비로소 사곡에 거하게 되니 하씨가 이곳에 거하게 됨은 이때부터다. 자손이 백년간 이 터를 수호하다가 증손대에 이르러 구태로 옮긴 후로 지금토록 기거하니 이 땅은 사곡과의 사이에 한 재를 끼고 있다. 공의 묘는 귀곡산 손좌에 위치하며 공의 자子 자징, 자호, 자혼의 묘도 또한 근방에 있어 자손들이 정성껏 세제를 받들어 왔으나 일찍이 재사 없음을 한하여 사옥경진에 애각재를 창건하고, 사부자의 분암으로 삼았으니 이제 오십 여년이다. 그런데 구재가 협소하고 또한 오래되어 퇴락하므로 광복 신미년 봄에 옛터에 중건하려 하였으나, 마침 백파 종손 병태의 권유로 문득 사곡의 양지에 자리 잡고 종전보다 광대하게 건축하여 일년  후에 완성하니 높다란 모릿대는 공중에 치솟고 주변 산천이 감싸니 한층 더욱 빛났다. 그 규모는 오칸 이며 아호는 전과 같다. 대개 고향에 짓지 않고 이곳에 지은 것은 공의 복거한 뜻을 잊지 않아서이다. 낙성에 미쳐 후계 재신, 영석, 창근이 그 연혁을 기록하여 인찬에게 기문을 청하므로 내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쓰기를, 그 애를 이룩하면 선령이 존재하고, 그 공을 이룩하면 나타난다는 말은 무엇을 이르는가? 그 친제에 있어 비록 부모의 의용을 보고자하나 볼 수 없음을 다함께 한탄한다. 이에 불망하고 치성하면 마침내는 의용을 갱장에서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이같이 하면 존재하지 않는 곳에 존재하게 되고 나타나지 않던 곳에 나타나게 되어 사친의 염念이 성하게 일어난다. 친제에서 이 같으면 선조의 제사에도 또한 이 같으며, 묘제에서 이 같으면 묘제에도 이 같이 된다. 혹자가 이르기를 선제를 받들되 생전에 승안하지 못하면 비록 모앙하여 불망하나,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응답하기를 그렇지 않다 추모함이 지극하면 알 수 없는 가운데 알 수 있게 되고 잊어도 잊을 수 없게 된다. 그것은 오직 심지로 말미암을 뿐이다. 선조의 심지는 반드시 전가하는 법이 되어 장구하여도 불멸 하니 그 후예 되는 이 어찌 그 심지를 거울삼아 깊이 사모하지 않을 소냐. 이것이 애각의 중요한 점이다.
 생각컨대 송정의 학문은 각재에 근원하고 각재의 학문은 남명에 근원하니 그러면 공의 학문은 곧 남명이 연원이다. 공이 경사를 두루 읽어 사람의 도리와 사물의 이치를 색구하고 애친과 경형에 힘쓰며 선조를 받드는 정성이 독실하고, 사소한 일에도 충직하고 신의가 있었으며 공경하고 신중하였으니 하겸재가 이른바 감동이 뼈에 스며든다고 함은 이것 때문이다. 어찌 절약하고
근면할 뿐이겠는가? 셋 아들로 하여금 겸재문謙齋門에 수학하게 하여 글 읽는 소리가 날마다 성하더니 그 증손 지명당 세응에 이르러 마침내 대성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논한다면 뿌리 깊은 나무는 지엽이 반드시 무성하고, 덕을 쌓은 군자는 후견이 반드시 창대하다 하니 그 이치를 속일 수 없다. 세삼 도의가 쇠퇴하면서부터 운이 옛날만 못하나 그러나 여음의 발함이 아직 미진하니 앞으로 창성할 것이 조명하다. 하씨 제공은 어찌 힘쓰지 않겠는가. 이 역사에 부지를 희사한 이는 방손 병석炳奭이다.
愛慤齋記
宣仁之世有處士河公諱瓚字仲珍卽松亭先生仲子也生於晋西之井谷而及於析箸始卜于士谷里河氏之居斯者自此焉子輿孫之守基者百年而至後孫移寓九台洞至今聚居其地與士谷相去者隔一嶺也公墓在於貴谷山巽坐原而公之子自徵自灝自渾之藏亦在其近雲仍之歲時奉香謹虔不懈而嘗恨齊宿滌濯之無所社屋庚辰後裔創設愛慤齋以爲公父子之墳菴于玆五十有餘年矣然而舊制甚隘且歲深頹圯光復辛未春將更謀於故基而適賴伯派宗孫炳台之款導輒相地于士谷之陽戮力重建而增恢閱一年而功訖隆棟翼然屹空包藏山川一層增色矣其規六楹五架其扁則無改焉蓋不于故址而于斯者不忘公始卜之義也建旣落後孫載臣泳錫昌根敍其事屬寅巑以一言記之余辭不獲謹爲之說曰夫致愛則存致慤則箸是何謂也其於親祭雖欲見其儀容不可得是人子之所其恨也於是不忘而致誠則終可見於羹中墻上之謂也如此則不存者存不箸者箸慕親之念勃然興起焉祭於親如此則祭於其先祖猶是也祭於廟如此則不存者存不著者著慕親之念勃然興起焉祭於親如此則祭於其先祖猶是也祭於廟如此則祭於其先墓猶是也或曰祭於先祖未及承顏則其儀容不可知雖欲思之而不忘何得焉應曰不然追慕之所至不可知而可知可忘而不可忘者存焉惟其由心志而己矣先祖心志必爲傳家之規範久遠而不滅其爲人後者烏不爲爲鑑而深念哉此愛慤之要也竊惟松亭之學源於覺齋覺齋之學源於山海然則公所受之學卽山海之淵源也公涉獵經史而索求人物之理愛親敬兄而尤篤奉先之誠忠信敬愼徧於些細事河謙齋所謂感銘刻骨者以是也豈惟節躬勤課子孫俾三子受業於謙門絃誦之聲無日不盛傳至於曾孫知命堂世應而益明焉由此論之根固則枝葉必旺德深則來後必昌斯理不可誣也自世道衰後運少遜於昔時然餘蔭之發尙未艾則將必有熾昌者審矣河氏諸公曷不勉哉於斯役喜捨敷地者傍孫炳奭其人也
                                          光復壬申春分節朔寧崔寅巑謹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