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사상재泗上齋
소재지: 경상남도 사천군 사남면 화전리 병둔
사상재는 판윤공 하유河游의 손자 저箸공의 제향을 올리는 재실이다. 1946년 2월 20일 병둔마을 1286번지에 창건한 이후 26년간을 지나는 동안 인접하고 있는 밭들이 논으로 전환됨에 따라 재실이 빈번히 침수되어 중수를 수차례 하였으나 특별한 대책이 없었다. 종원들의 뜻에 따라 화전리 1323-5번지에 이건 계획을 세우고 1971년 2월 1일 착공하여 동년 4월 20일에 준공하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제향일은 음 10월 15일이다.
1) 사상재 기泗上齋 記
사천읍 남쪽 10리여쯤 병둔동이 있어 한 구역을 이룬다. 그 지세는 우러러보면 와룡산과 이구산이 동남쪽으로 앞에 있고 굽어보면 사수가 동쪽으로부터 나와 북쪽을 경유하여 서쪽으로 흘러 들어간다. 또 들이 광활하여 형세가 넓으며 뽕나무와 삼나무, 곡식들이 자라기에 합당하고 수풀들이 우거져 기거起居하고 시를 읊조리는 아취雅趣가 일어나는데, 이곳에 하씨들이 살고 있다.
하씨는 진양의 드러난 성씨이다. 중세에 휘諱 지명之溟은 행 초계군수로 세 아들이 있었으니 현現 비備 저著이다. 저는 진주 사곡으로부터 이곳으로 이주를 해와 여러 세대를 지나 임진왜란을 만나 자손들이 편안하게 살지 못하고 흩어져 다른 곳으로 간 것이 십 수 세대가 지났다. 저著로부터 삼세의 분묘를 이리저리 떠도는 사이에 잃어버려 시제 향사를 단을 만들어 봉행하는 것을 면하지 못했다. 지난 병술년 봄에 후손 남진南鎭과 여러 종족들이 의논하여 말하기를 선조들을 받들 겨를이 없었던 것은 후손들의 책임이다. 이에 옛날 살았던 언덕에 수 칸 재실을 짓고 기와를 이고 당과 실, 정원, 담장을 질서정연하게 갖추어 시제 때에 재계하고 후손들이 모여 돈목을 다지는 곳이 되었다.
하루는 남진군이 나에게 말하기를 “재실 이름과 한 말씀을 남겨 후손들로 하여금 바라보고 느끼게 하는 자료가 되게 해 주십시오” 라고 하였다. 내 사양하였으나 이를 거절하지 못하고 말하기를,
이구와 사수라는 지명은 공자가 살던 곳의 지명인데 이 고장에도 있으니 우연한 일이 아니다. 사상으로 이름 짓는 것이 어떠한가. 또 말하기를 이곳은 그대 선조의 재실이 아닌가. 증자께서 말씀하길, “장례 때 슬픔을 다하고 제사 때 공경을 다하면 백성의 덕이 후하게 될 것이다” 라고 했다. 장례는 소홀히 하기 쉽기 때문에 슬픔을 다해야 하고 제사는 잊어버리기 쉽기 때문에 능히 공경을 다해야 한다. 이것이 근본에 보답하면 덕이 두터운데로 돌아간다는 의미이다. 문의 이름을 귀후歸厚라고 한 것은 호연히 두터운데 돌아가는 길은 추원에 있으니 추원의 의리가 곧 제물과 심신을 깨끗이 하는 것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고 선조의 업적을 잘 계승하여 영원토록 후손들을 넉넉하게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곧 이 재실을 짓는 것만으로 능사로 여겨 높은 곳에서 바라보며 술잔을 들고 읊조리는 것으로 본분을 다했다고 여긴다면 비록 천 칸을 짓고 종묘 제례의 예물로 행례를 한다고 해도 어찌 추원追遠의 정성이 있겠는가.
생각건대 그대의 선계는 태수공 이상은 이미 세상에 혁혁하게 드러났으나 이하는 겨우 문학으로 분수를 지키면서 집안의 전통을 이어와 이 고을의 명문가와 서로 견줄만하다. 또 그대의 조부 세암옹은 조상의 가르침을 잘 받들어 학문이 깊고 독실한 행실로 엄연히 고을의 명망 있는 인물이 되어 지금 고을 선비들이 유계를 모아이를 존경하니 이는 그대가 조상의 뜻을 잘 이어온 것이 아니겠는가. 그대의 많은 자손들이 행동을 바르게 하고 모두 온아하여 볼만함이 있는 것은 그대가 의로운 방법으로써 가르친 것이 아니겠는가.
지금 세상이 변하고 사람이 짐승만도 못하여 윤리가 무너져 버렸다. 이때를 당하여 더욱 마땅히 여기에 종족을 모으고 정성으로써 제사를 지내고 틈나는대로 돈목을 닦아서 화수의 즐거움을 이루어 조상이 모두에게 골고루 베푼 은혜를 추모한다면 그대의 선조들이 지하에서 기뻐하지 않겠는가. 그대의 종족들이 어찌 두터운데 돌아가지 않겠는가. 하물며 그대의 아들과 손자이겠는가. 이와 같이 하면 추원追遠 귀후歸厚의 도리가 어떠하겠는가.
하씨들 중 이 문을 들어오는 사람과 이 재실에 오르는 사람은 진실로 몸을 삼가고 행동을 바르게 하여 선조들의 교훈인 들어와서 효도하고 나가서 공경하는 마음을 가져야 된다는 선조의 말씀을 잘 새겨 선조의 유지를 받들어 간다면 이 재실에 대해 길이 좋은 말들이 있을 것을 내가 알 수 있겠다. 내 글을 써서 이를 평가하는 사람들을 기다린다.
계사 오월 하완 외예 합천 이정호 찬
泗上齋 記
東城縣治南十里强有所謂兵屯洞者其爲區也仰而臥龍尼丘案其東南俯而泗水出自震維經玄武流入兌隅又野豁而勢寬有枽麻稻菽之宜林木葱蒨有起居嘯詠之趣河氏居焉河氏晉陽著姓中世有諱之溟行草溪郡守有子三人曰現備著著自晉之士谷移寓於此歷數世遭壬辰兵燹子孫不能奠安散而之他如是而過十數世自著以下三世墳墓失守於流離漂泊之際歲時享祀未免設壇以奉之去丙戌春後孫南鎭與諸族議曰祖先未遑之事後孫責也乃就舊居塽凸處築數間齋舍葺以陶瓦堂室庭垣井井有制於是焉歲時齊戊聚族講睦之有所曰南鎭君謂余曰幸錫其名兼惠一言使來裔有觀感之資焉余辭不獲則曰顧此尼丘泗洙先聖所居之地而在於此鄕固非偶然也名之以泗上如何又曰此非君之先世祭室乎曾聖曰愼終追遠民德歸厚矣終者人之所易忽而能愼之遠者人之所易忘而能追之是皆報本歸厚之義也門則曰歸厚爲好然而歸厚之道在於追遠追遠之義非直以粢盛齋明之爲大而止而己也克紹先微以裕後昆於無窮尢其爲大者也直以能事於斯齋之構臨眺以爲勝觴詠以爲達則雖構之千間饗之太牢奚有乎追遠之誠哉竊惟君之世自太守公以上固己烜焃於世而以下則堇以文學操守相承襲克
保家聲與縣之名門相後先焉且君之王考洗巖翁擩染詒謨學邃而篤於行儼然爲鄕省之望至今鄕人士修儒契以尊之此非君之尢謹慎於繼述者乎又君之子與孫振兟成行而皆溫雅有可觀則此非君之敎之以義方者乎今天地飜覆人類化爲禽獸倫綱盡爲斁絶矣當此之時尢當聚族於斯灌饗以誠暇日修敦睦以成花樹之樂以追均視之恩則君之先靈豈不悅豫於洋洋之際乎君之諸族豈不歸之於厚乎況君之子與孫乎如是則於追遠歸厚之道爲如何哉竊惟河氏之入斯門登斯齋者苟能謹身制行服膺乎先聖之訓入孝出恭承襲乎祖先之武則吾知斯齋之永有辭於來世矣姑書此以待之
癸巳五月下浣外裔陜川李正鎬 撰